[철학시 4-11 해설] 산•바카라•글

-작은 철학시의 글쓰기 과정-

by푸른킴

길ㅡ글 탄생


서재를 나와야 숲으로―

부시시 잠 깬 잡초햇살 함께 수다,

조용히 길 이슬 쩍 누워, 맺히는 산바카라글


1. 개요

길은 글의 원천이다. 철학시 4-11 〈길ㅡ글 탄생〉은 길이 어떻게 글로 바뀌는가를 사유한 나의 단시이자 작은 철학시이다. 여기서 ‘길’은 은유 이전의 길이다. 두 발로 밟고, 몸으로 통과하며, 사유하는 몸이 바깥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장소이다. 반면 ‘글’은 그 걸음의 끝에서 맺히는 사유의 작은 매듭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글은 처음부터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걷는 동안 생겨나고 풀리고 다시 맺히는 과정의 한 형식이다.


이 시의 근본 논지는 단순하다. 글은 바카라상 위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재에서 읽고 사유한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살아 있는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몸이 길 위로 나가야 한다. 숲으로 들어가고, 풀과 햇살을 만나고, 이슬에 발이 젖고, 걸음이 느려질 때 사유는 다시 몸속에서 순환하며 글로 맺힌다. 그런 점에서 〈길ㅡ글 탄생〉은 나의 글쓰기론을 시적 형식으로 압축한 메타 글쓰기론이다.


이 시의 출발점은 ‘길’과 ‘글’의 발음과 형태적 유사성이다. 두 단어는 본래 의미상 가까운 말이 아니다. 길은 바깥에 있고, 글은 안쪽에서 생긴다. 길은 몸이 지나가는 외부의 통로이고, 글은 내면의 사유가 문자로 조직되어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형식이다. 그러나 나는 이 차이 속에서 하나의 생성 가능성을 보았다. ‘길’은 ‘글’이 될 수 있다. 두 글자는 ㄱ과 ㄹ이라는 자음 구조를 공유하고, 결정적 차이는 모음 ‘ㅣ’와 ‘ㅡ’에 있다. ‘ㅣ’가 서 있음이라면, ‘ㅡ’는 누움이다. 길의 ‘ㅣ’가 눕는 순간, 길은 글이 된다.


제목 〈길ㅡ글 탄생〉 가운데 놓인 ‘ㅡ’는 바로 그 변화의 흔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연결 부호가 아니라, 길이 글로 넘어가는 순간의 몸짓이다. 세워진 획이 눕고, 이동하던 걸음이 머물며, 바깥 풍경이 안쪽 사유로 갈무리되는 자리이다. 이 작은 가로획 안에서 걷는 몸과 문자와 세계가 한순간 만난다.


세 행의 흐름도 이 생성 과정을 따른다. “서재를 나와야 숲으로―”는 글쓰기의 출발이 고립된 사유가 아니라 몸의 이동임을 보여준다. “부시시 잠 깬 잡초햇살 함께 수다,”는 숲의 사물들이 서로 스며들며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연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길 이슬 쩍 누워, 맺히는 산바카라글”에서는 ‘길이 슬쩍’이라는 소리가 “길 / 이슬 / 쩍”으로 갈라지며, 길의 ‘ㅣ’가 이슬처럼 떨어져 ‘ㅡ’로 눕는 문자적 사건이 일어난다.


따라서 〈길ㅡ글 탄생〉은 길이 글이 되는 새벽의 사건을 붙잡은 시이다. 글은 머리에서만 생산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길 위를 걷는 몸과 세계가 서로 스며들며 만들어내는 생성의 결정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계를 밖에서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그 세계 속을 통과하며 사유가 글로 바뀌는 순간을 살아내는 일이다. 이 시는 바로 그 찰나, 곧 길이 글로 몸을 바꾸는 순간을 “산바카라글”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낸다.


2. 이 시의 형식론

나의 철학시 대부분이 그러하듯 〈길ㅡ글 탄생〉 역시 극도로 압축되어 있으면서도 의미를 중의적으로 중첩하려고 시도했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자 자체의 분석, 재배열, 생김의 분석 등을 창의적으로 수행했다. 예를 들어 발음과 소리의 분석, 띄어쓰기, 획의 방향성과 공간감을 시의 형식 원리로 삼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단순히 단어를 활용한 시가 아니라, 그 단어 자체가 자기 몸으로 움직여 만들어내는 어떤 개념을 포착한 것이다.


가장 먼저 제목을 보자. 〈길ㅡ글 탄생〉은 앞서 말했듯이, 가운데 놓인 ‘ㅡ’가 핵심이다. 이는 시 전체의 내용을 함축한다. 단순히 두 글자의 연결 부호가 아니라. ‘길’이라는 글자 속에 있던 ‘ㅣ’를 옆으로 누인 것이다. 그리하여 ‘길’이 ‘글’이 되는 일련의 생성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목을 읽는 순간 이미 하나의 철학적 장면이 응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워진 것이 눕고, 이동하던 것이 머물면서 길이 글이 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나의 철학시는 의미를 이해하는 시이기 전에 상상 속에서 먼저 “보는 시”다. 보이지 않으면 일단 나의 시가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문장을 이해하기 전에 시 안에서 이미 다양한 현상들이 눈에 그려져야 한다. 이번 시처럼 획의 방향과 문자 형태의 변화를 포함하여 세 행이 차례대로 시각적 여정을 충분히 상상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결국, 나의 철학시는 읽고 이해하는 시가 아니라 보고, 참여하는 시이다.


제목을 연상하면서 이 시의 시어들을 좀 더 분석해보자. 대체로 시 전체의 행들에 쓰인 단어는 직립에서 “눕는” 행동으로 전화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서재(ㅓ)가 숲(ㅜ)으로, 부시시(ㅣ)가 수다(ㅜ)로, 이슬(l)이 산바카라글(ㅏ, ㅡ)와 같은 변환이다. 모음의 방향성까지 눕기와 흐름의 감각을 암시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시 전체의 단어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이동한다는 흔적이다. 세로로 곧게 서 있던 세계가 천천히 가로로 눕는다. 사실, 이 흐름은 다소 과장될 수 있으나, 단순한 이미지 전환만은 아니다. 이때 ‘눕는다’는 것은 그저 자세 변화가 아니라 긴장에서 사유로, 목적지향에서 과정으로, 속도에서 머묾으로 이동하는 존재의 행동 방식에 대한 철학적 방향 전환을 가리킨다. 제목의 (ㅡ)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은 또 있다. 바로 1행 끝의 긴 대시(―)다.


서재를 나와야 숲으로―

이 시어에서 나는 문장을 마침표로 닫지 않고 숲 쪽으로 길게 미끄러지는 듯한 이미지로 구현했다. 마지막에 사용한 (ㅡ)는 숨의 연장이자 시선의 이동이며, 동시에 제목 속 ‘ㅡ’와 호응하는 모습이다. 다름 아닌 ‘눕기’를 연상하게 돕는 것이다.


또한, 이 철학시의 형식적 특징은 둘째 행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부시시 잠 깬 잡초햇살 함께 수다,

‘부시시’는 표준어에서 살짝 비껴난 단어다. 발음의 흐트러짐을 여과하지 않고 보여주려는 것이다. 본래는 ‘부스스’가 표준어다.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비속어처럼 들리는 말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를 통해 존재하는 것들의 뒤섞임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세계에서 생명은 단 하나로 고립되지 않고 선명하지 않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 일이 많다. 나는 이를 구체적인 시어를 통해 이미지화했다. 예를 들어 “잡초햇살”이라는 조어다. 잡초와 햇살은 완전히 이질적인 사물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사물을 결합하여 잡초 위에 가볍게 내려와 누워버린 듯한 햇살을 그려낸 것이다. 하여, 햇살이 누운 잡초는 아예 ‘잡초햇살’이 ‘된’ 것이다. 이제 햇살과 일체된 잡초는 어떤 이미지일까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시어를 통해 내가 관찰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보다 내가 ‘본’ 것이 어떤 이미지인가를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 시어 “함께 수다”는 잡초햇살이 일체가 되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행동’이다. 요컨대 둘째 행은 형식적으로 길을 걷는 내 앞에서 일어나는 사물의 동작들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새벽의 덜 정돈된 감각을 그대로 살리며, 그 사물들이 흐릿하게 섞여 있으면서도 각자 그리고 같이 살아 움직이는 호흡을 공유한다는 것을 드려내렸다.


이제 마지막 행에서 나는 이 시의 형식 실험을 좀 더 강화했다.


조용히 길 이슬 쩍 누워, 맺히는 산바카라글

‘조용히’ 라는 부사는 사족처럼 쓰였다. 없어도 충분한 구조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이 구절의 적막한 정서를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다. 표면적으로 그 적막은 한편으로 길의 상태와 몸짓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길이 고요한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이슬’이 소리없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조용히’라는 시어는 중의적이다. 길이 겪을 긴장감이면서 이슬의 동작이고 나아가 이 둘이 어울려 아울러 뭔가 일어나는 운동이 복합되어 있음을 다성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이 3행에는 본래 중의적인 표현보다도 하나의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본래 구상은 ‘길이 슬쩍’이었다. 즉 길의 행동을 묘사하려는 것이다. 조용히는 길의 동작인 것이다. 풀어쓰면 ‘길이 슬쩍 눕는다’가 본래 의도였다. 하지만, 시의 형식을 중의적으로 바꿨다. 이 시어의 형식을 뒤틀어 마치 이슬이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만들었다. 이것은 문장의 다층적 해체이다.


이 해체는 이 시어를 귀로 들을 때와 눈으로 볼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귀로 들으면, ‘길이 슬쩍’처럼 들리지만, 눈으로 볼 때는 “길 / 이슬 / 쩍”이라는 새로운 행동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내가 시도한 기법은 띄어쓰기의 착시다. 띄어쓰기를 단순한 호흡 조절이 아니라 의미 생성 장치로 만들었다. “길이 슬쩍”이라는 음성 문장이 “길 이슬 쩍”이라는 시각적 파열로 변형되며, 단어 내부에 숨어 있던 문자 운동이 드러나게 한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런 해체가 단순한 말장난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길’의 ‘ㅣ’가 떨어져 나오고, 그 ‘ㅣ’가 이슬처럼 스며들며, “쩍” 하는 파열음과 함께 눕고, 마침내 ‘ㅡ’로 스며들어 끝내 ‘글’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 3행은 길과 글의 관계를 말로 설명하지 않고 단어가 스스로 몸을 바꾸는 과정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바로 ‘산바카라글’이다.


결국, 이 시행에서 나는 한국어의 음성 구조와 문자 구조, 띄어쓰기와 시각 배치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효과를 구상했다. 내가 보기에 한국어의 매력은 단어와 단어의 배열과 발음만으로도 새로운 단어를 창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 “쩍”이라는 파열음 역시 이런 한국어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시행 안에 일어나는 정서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소리는 “조용히”와 충돌하면서도, 오히려 그 고요 속에서 문자 하나가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몸 밖에서 나는 소리인데 곧바로 내면의 소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한 음절 때문에 “ㅣ가 ㅡ로 눕는 결정적인 파열음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시의 마지막 단어인 “산바카라글” 또한 형식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얼핏보더라도 이 단어는 산, 바카라, 글, 산바카라, 글의 언어유희이다. 문학적 장르를 지칭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새로운 리듬의 창조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산바카라은 어슬렁거리는 걸음이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걸으면서 멈추고, 천천히 흔들리다 머물고 우회하는 느릿한 걸음이다. 따라서 “산바카라글”은 미안의 글쓰기를 시사한다. 나의 철학시는 고정된 완결체가 아니라 걸으며 계속 생성되는 문장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길ㅡ글 탄생〉의 형식은 다음과 같은 다층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


시각적 형식 : ‘ㅣ→ ㅡ’의 문자 변형

음성적 형식 : “길이 슬쩍”의 숨은 리듬

공간적 형식 : 띄어쓰기와 행간의 해체

철학적 형식 : 직립에서 눕기로의 전환

생성적 형식 : 완성보다 진행을 중시하는 구조

<그림, 제미나이>

따라서 나의 철학시 4-11은 문자 자체가 움직이고, 소리가 해체되고, 획이 방향을 바꾸며, 언어가 몸을 얻는 과정을 형식 그 자체로 보여주는 철학적 타이포그래피 시라 할 수 있다.


3. 시의 행별 분석


1행 “서재를 나와야 숲으로―”

나의 단시에서 1행은 사건의 발단이자, 그 사건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치환의 순간이다. 다시 말해 길 위에서 촉발된 모든 사유가 마침내 ‘나(我)라는 주체에게로 수렴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우선 이 시어에서 시간의 표기는 생략되었다. 나의 생활 습관에 따르면, 이 시간은 대체로 이른 아침이거나 늦은 오후이다. 주로 서재에 있을 때 이 시간은 나에게 일정하게 작동한다. 공간적 의미는 ‘서재’와 ‘숲’에서 포착된다. 구체적으로는 서재로부터 숲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시질적으로 사건의 발생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 행에서 주목할 공간의 의의는 바로 ‘나와야’라는 말에 있다. 서재와 숲이 상호작용하는 것은 이 ‘나옴’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나옴’이라는 행위는 내가 말하려는 시 전체 의미의 방향을 제시한다. “안”에서 “밖”으로, “정지”에서 “이동”으로, “사유”에서 “감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과 밀접하다.


일반적으로 “서재”는 개인이 축적해 온 지식과 문자, 개념과 사유가 배열된 장소다. 바카라과 언어가 놓여 있는 공간이며, 정신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몸을 쓰는 일보다 우위에 놓이는 장소다. 서재는 한 개인의 의식과 외부로부터 들여온 다양한 문명이 나름대로, 자기 취향대로 구축한 직립의 개인 공간이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숲은 공공의 장소이다. 나무와 풀의 축적이라는 점에서는 서재와 비슷하다. 하지만, 숲은 스스로 움직인다. 살아있어서 개체들이 서로 얽히고 함께 자라간다. 바카라이 무동의 물체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서재에는 생물만이 움직인다. 서재는 멈춰버린 문자들의 저장고라면, 숲은 아무리 미생물이라도 살아 움직이며 감각이 먼저 살아나는 번식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빛과 풀과 이슬과 냄새가 끝없이 움직이며 생을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서재에서 숲으로 “나와야”라는 표현은 단순히 산바카라을 나왔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이 말에는 강한 필연성이 들어 있다. “나와”가 아니라 “나와야”라는 표기한 것은 숲이 어떤 선택지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임을 말하려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편의 글이 머릿속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탈고하는 최종 단계는 몸이 서재로부터 벗어나 바깥으로 걸어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유의 결실로서 단시(철학시)라는 글쓰기는 몸은 정지하고 손과 머리만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몸 전체가 이질적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결국 나의 단시는 익숙한 서재를 벗어나 이질적인 장소, 곧 나에게는 숲이라는 헤테로토피아로 이동할 때 비로소 일단락되는 글쓰기다.


또한 이 문장은 매우 흥미로운 역설을 품고 있다. 나는 서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재(도서관)는 글쓰기에 있어서 숲으로 가는 관문으로 이해한다. 서재를 거쳐 숲으로 가는 행위가 글쓰기의 한 여정이라는 의미다. 즉 문자 탐색과 사유의 축적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이해는 글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시 자연과 몸의 세계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 나의 글쓰기론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행 끝의 긴 대시(―)는 ‘글을 만드는 과정’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이다.


“숲으로―”

이 표기는 숲으로 가는 모든 여정은 끝이 없는 반복적 행위라는 것을 함의한다. 숲으로 나가는 일은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긴 선을 놓음으로써 글쓰기는 숲을 오가는 여정으로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다. 이 대시는 걸음의 연장이며, 글을 읽고, 글을 쓰려는 호흡의 깊이이며, 시선의 이동이고, 끝내 ‘ㅡ’와 연결되는 예비 동작이다. 또한, 이 기호는 단순한 문장부호가 아니라, ‘길’의 ‘ㅣ’가 ‘글’의 ‘ㅡ’로 변화해 가는 과정의 첫 번째 흔적이다. 따라서, 첫 행은 내가 “왜 숲으로 가는가?”가 아니라 “글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글은 서재가 아니라 서재 밖으로 걸을 때 완성된다. 길이 이미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걷는 행위’의 끝에 길이 만들어진다. 그 만들어진 길을 나는 ‘글’이라 부른다.


2행 “부시시 잠 깬 잡초햇살 함께 수다,”

철학시에 둘째 행은 나에게 치환된 사건의 확장이나 심화를 묘사한다. 이 행에서는 시의 감각이 본격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 나의 사유 범주를 넘어선다. 단시에서 첫 행이 방향의 선언이었다면, 둘째 행은 그 방향 속에서 나와 세계가 깨어나는 장면이다. 이를 위해 이 행에서 나는 나의 단시의 특징인 부사어를 사용하고, 나름 대로 조어(造語)도 구사했다. 의인법도 활용했다.


“부시시”라는 부사는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헝클어진 상태다. 막 잠에서 깨어난 얼굴처럼, 아직 세계의 윤곽이 또렷이 굳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나의 상태가 아니라 숲의 카오스같은 새벽 풍경을 묘사하려 했다. 숲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나의 관점에서 숲의 새벽은 정갈하기보다 부산하다. 밤새 바쁘게 움직였던 것을 추스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숲의 밤은 인간의 한낮만큼 분주하다. 생장점을 자극해야 하고, 축적한 양분을 저장하거나 한껏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단시에서 부사는 시 전체의 역동성을 결정짓는 전략적 용어다. 이 시의 시간인 새벽은 깨어나는 시간이면서도 선명하지 않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 놓인 흐릿한 시간으로 기동한다. 새벽, 동틀 녘처럼 검은 세계이면서도 어슴푸레 빛이 스며드는 시간이다. 모든 존재는 그 검은 안식 아래서 서로 경계 없이 스며들고, 아직 미완의 상태로 조금 열려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시선일 뿐, 숲의 세계는 오히려 이 희뿌연 시간에서마저도 역동한다. 그것을 나는 “잡초햇살”이라는 조어로 상징화했다.


잡초는 단순히 잡스런 풀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개성이 강한 풀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기 방식대로 성장을 주도하는 풀이다. 그런데 이 독특한 풀 위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풀을 비추고, 양분을 제공한다. 새벽부터 햇살이 밤새 생존을 위해 분투한 잡초 위에 가볍게 자기 몸을 덧댄다. 그리하여 개성 강한 풀이 끝내 ‘햇살’이 누울 터를 제공해주었다.


‘잡초햇살’은 단순한 합성어가 아니다. 잡초와 햇살의 공존을 시사한다. 햇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비추는 존재다. 힘과 권위를 상징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햇살은 그 힘을 잡초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 것으로 쓰고 있다. 잡초와 어울리기 위해서다. 잡초는 한치도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고, 한번 뿌리내린 곳에서 발아하여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햇살은 형체도, 방향도, 소리도 없다. 어디든 잡초 위를 운행할 수 있다. 언제든 잡초를 떠날 수도 있다. 길들여진 존재가 아니다. 어디로든 번지고 스스로 살아남는다. 하지만, 지금 그 햇살이 잡초 위에 머물러 내려앉았다. 자신을 고정한 것이다. 하늘의 빛이 땅의 생명성과 바로 뒤섞였다. 햇살이 잡초를 땅 위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퍼져가도록 이끈다.


이제 햇살은 더는 외부에서 세계를 비추는 빛이 아니다. 잡초와 잇대어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일부가 된다. “잡초햇살”은 잡초와 햇살이 한 자리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음을 알리는 명명이다. 햇살처럼 통제되지 않는 생명의 무한한 에너지이면서 잡초처럼 굳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유한한 생명이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둘이 어우러져 “함께 수다”하는 행위다.


잡초와 햇살은 ‘수다’로 한 덩어리가 된다. 하여 새벽부터 세계는 침묵하지 않는다. 아니 지난 밤부터 무한한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새벽이 오고 다시 햇살과 잡초와 새벽과 이슬은 서로 생존을 위한 덕담을 건네는 듯하다. 세계는 단독자의 고독한 생존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함께’의 그물망인 것이다. “수다”는 고급스런 논쟁이 아니다. 실없는 말이며, 바로 사라질 말일 수도 있다. 형이하학 같은 일상의 대화이며, 시덥지 않은 이야기이다. 정제된 언어가 아니다. 일상적이고 가볍고 살아 있는 말이다. 햇살은 잡초에게, 잡초는 햇살에게,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땅의 언어로 말을 건넨다. 잡초는 햇살이 되었다. 햇살은 잡초가 되었다.


이렇게 둘째 행에서 나는, 세계의 요소들이 공동체성을 갖는다는 것을 관찰하고 묘사했다. 서재에서 숲으로 나온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무질서의 과정을 거친 세계의 조화이다. 서로 구별짓기를 멈추고, 연동하고 스며드는 무분리의 상태다. 견고한 팥이 미지근한 열기로 서로에게 스며들어야 ‘팥죽’이 되는 것처럼 햇살과 잡초, 잠과 깨어남, 말과 침묵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서로 뒤섞인다. 이 유연한 상태에서 비로소 내가 사유한 파편들은 새벽 길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역동처럼 서로 조화를 이뤄 하나의 수다로 남겨질 준비를 마친다.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쓰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받아적는 행위일 뿐이다.


3행 “조용히 길 이슬 쩍 누워, 맺히는 산바카라글”

단시에서 셋째 행은 1행과 2행을 거쳐온 사유가 시학적 윤리로 집약, 수렴되는 단계다. 이 셋째 행에서 그 윤리는 ‘산바카라글’로 묘사되었다. 즉, 이 말은 ‘길이 글이 되는 문자적 사건’을 넘어, 글쓰기가 세계를 듣고 몸으로 수행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수렴하는 것을 밝혀주는 시어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곧 걸음으로써 살아있는 글(산.바카라)이 되고, 그런 글이야말로 산바카라처럼 삶의 여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자기 밖으로 나가 타인이 들려주는 소리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글쓰기는 타인을 청종하는 프락시스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행은 시 전체가 응집되는 지점이다.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현장이다. 윤리와 삶의 방식이 촉발되는 단계다. 이 시에서도 앞선 두 행이 길과 숲과 생명의 분위기를 열어 놓았다면, 이 행에서는 마침내 문자 자체가 몸을 바꾸기 시작한다.


우선 “조용히”라는 부사어를 다시 언급하려 한다. 이 시에서 가장 불필요한 지점에 의도적으로 놓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어느 단어와 연결되는지도 선명하지 않다. ‘조용히’와 같은 부사는 주체의 행동과 직결되는 일이 많은데, 셋째 행에서는 주체가 선명하지 않다. 내용적으로 ‘길’이 가장 적당하지만, 현재 시어에서는 오히려 ‘이슬’의 호응 관계가 더 명확해 보인다. 결국, 이 둘을 모두 고려하면, 조용히는 첫째, 길이 소리 없이 하는 어떤 행동이며, 둘째, 이슬이 소리 없이 맺히거나 움직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새벽이라는 시간을 감안하면, 새벽의 역동성이 고요한 상태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셋째 행에서 더욱 낯설게 구사한 것은 바로 “쩍”이라는 표현이다. 소리이기도 하면서 행위이기도 하다. 앞선 조용히 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소리다. 하이쿠에서 시도하는 ‘기레지’와 비슷하기도 하다. 기레지는 장면을 끊고 전환시키는 절단어를 말한다. 이를 반영하면 “쩍”은 갈라짐의 소리이며, 방향 전환의 파열음이다. 아주 독특한 긴장을 만들어 낸다. 가장 고요한 순간 안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슬은 조용히 맺히지만, 문자는 “쩍” 하고 몸을 바꾼다. 하지만, 나의 시에서 이 표현은 단지 그런 기교를 위한 표현이 아니다. 이 표현은 전형적인 ‘파자(破字)의 기교’다.


다시 말해 ‘쩍’은 “길 이슬 쩍”을 시각적으로 해체한 결과를 보여준다. 이런 기교는 청각과 시각이 서로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본래 이 표현은 ‘길이 슬쩍’이다.

하지만, 청각적 측면에서 이 ‘길 이슬 쩍’을 귀로 들으면 평범한 문장처럼 들린다. ‘길이 슬쩍’인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읽는다면, 길 / 이슬 / 쩍으로 분해된다.


이것이 ‘문자 철학’의 한 예이다. 이를 통해 ‘길’ 속의 ‘ㅣ’가 분리되고, 그 ‘ㅣ’가 ‘이슬’ 속으로 스며들며, 마침내 “쩍” 하는 파열음과 함께 가로로 눕는다. 그 결과 길 → 글이 된다.


나는 이런 언어적 흐름을 단순히 언어유희로 만든 것이 아니다. 길이 글이 되는 과정을 청각과 시각으로 실현해 본 것이다. 모음 하나가 방향을 바꾸는 순간 단어의 의미론적 실존이 변환한다. 세로의 ‘길’은 가로의 ‘글’이 되고, 이동은 멈춤이 되며, 걸음은 사유의 덩어리가 된다. 나는 이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도록 애썼다. 나는 글자의 의미가 삶의 어느 자리와 만날 때 더욱 실감 난다는 것을 적극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길이 글이 된 것은 물방울이 이슬이 되었다가 사라지는 원리와 같다. 문자의 변형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새벽 자연의 물리처럼 구체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어 “산바카라글”의 의의도 분명하다. 그것은 이 시가 지향하는 궁극적 윤리에 수렴한 것이다. 달리 말해, 철학을 완성하는 결정적 단어라는 것이다. 원래 초안에서 이 마지막 단어는 “맺힌 글”이었다. 이슬을 형상화한 글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퇴고하면서 ‘맺히는 산바카라글’로 마무리되었다. ‘맺힌 글’이었다면, 이 시는 하나의 완결된 결과물을 남기는 글쓰기를 제안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맺히는 산바카라글”이 됨으로써 현재 진행의 의미가 살아났다. 결국, 글은 완성된 물체가 아니라 걷는 동안 계속 생성되는 존재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살아났다.


그런 의미에서 “산바카라”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산바카라은 목적지를 향한 직선 운동이 아니다. 머물고, 돌아보고, 느리게 걷고, 우회하는 움직임이다. “산바카라글”은 이 시의 장르가 아니라 나의 단시가 이 시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의의이다. 글은 바카라상 위에서 완성되지 않아야 한다. 최종 완성을 위해 길을 걸어야 한다. 걸으며 자신의 만들어낼 글을 암송하듯 풀었다가 조였다가를 반복한다. 몸이 숲길을 조용히, 천천히 걷고, 햇살과 수다를 나누고, 이슬 속에서 획 하나가 눕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때 비로소 길은 글이 되고, 사유는 글쓰기라는 최종 윤리를 통해 프락시스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글을 일컬어 ‘산바카라글’이라 부른다.


종합하면, 〈길ㅡ글 탄생〉은 전체적으로 치환―확장과 심화-수렴이라는 구도를 따라 길의 이동-사유의 교감-윤리의 생성이라는 구조를 유지한다. 1행은 서재를 나와 숲으로 향하며, 글쓰기가 고립된 사유가 아니라 몸의 이동, 길을 걷는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2행에서는 숲의 새벽이 “잡초햇살”과 “수다”로 깨어나며, 세계가 고립된 개체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고 말 건네는 생명의 공동체성으로 조화를 이루는 시공간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3행에 이르러 “길 이슬 쩍”이라는 파자적 장치를 통해 길의 ‘ㅣ’가 누워 마침내 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때 글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걷고, 듣고, 젖고, 머무는 과정 속에서 계속 “맺히는 산바카라글”이라는 점도 부각했다.


이로써 글의 최종 완성은 바카라상이 아니라 길 위에서 여전히 미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이로써 길과 글은 분리된 주체가 세계와 스며들고, 자기 길에 놓인 사물들과 어울리며 이루는 작은 대동(大同)의 사건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글을 쓰기보다 걸음의 끝에서 글을 만나야 하는 나그네이다. 요컨대 이 시의 세 행은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서재에서 촉발되어 무르익어가는 사유가 숲의 감각을 통과해, 끝내 몸으로 수행되는 글쓰기의 윤리로 응결되는 여정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길을 걸으며 매듭짓고 다시 걸어가는 참여적, 실천적 프락시스다.


4. 이 시의 주제

나의 철학시 대부분이 함의한 주제는 시 자체에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도출되는 가변적인 것이다. 어제 읽고 찾아낸 주제가 오늘은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의 시가 하나의 주제로만 읽히는 것은, 그 시가 스스로 말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잠정적으로 철학시4-11의 주제는 앞서 반복해서 말한 대로 “글은 길 위에서 생성된다.”라는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다. 바카라을 읽고 자료를 찾아 글을 쓰더라도, 글의 완성은 바카라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것을 ‘서재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명제로 정리했다. 결국 글의 잠정적 완성은 ‘걸음’에 달려있다. 써둔 글을 걸으면서 되새기고, 되새긴 것을 다시 사유하면서 글의 끝까지 밀고 가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몸이 이동하는 그 자체이며, 몸 곳곳의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존재가 세계와 접촉하는 것 자체다. 다시 말해 길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선(線)의 이미지가 아니라, 몸이 부딪는 다양한 세계의 결이라는 점에서 원(圓)에 가깝다.


길은 단순히 “걷는 장소/공간”이 아니다. 내가 “서재를 나와야 숲으로―”라고 말한 것은 숲이 글의 목적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숲은 길이 글이 되는 장소/공간일 뿐이다. 글의 완성은 그 숲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조화로운 질서를 체감하는 데서 마지막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내가 이 단시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숲으로 가자’가 아니라, 숲에서 ‘글의 마지막을 찾아내자’라는 것이다.


내가 쓰려는 글이 무엇이든, 글의 마지막은 길이 더는 뻗지 않고 잠시 눕는 자리에서 발생한다.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사유가 멈춘 듯 보이지만 오히려 몸 안에서 조용히 가라앉는 순간, 그곳에서 글은 맺히기 시작한다. 조금 과장해 말하면, 글쓰기의 끝은 내가 길을 걷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어느 순간 내가 걸어온 길 자체가 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내가 곧 길이다”라는 오래된 말은 내게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주어진 신학적 선언이라기보다, 쉼 없이 걷고, 자기 삶으로 통로가 되고, 마침내 다른 이들이 걸어갈 수 있는 흔적이 된 존재의 말로 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길’이라고 불렸다는 사실보다, 그가 끝까지 걸었다는 사실이다. 길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걸음이 반복되어 생겨난다. 그리고 어떤 존재가 자기 삶 전체로 걸어간 뒤에야, 그 삶은 다른 이들이 읽고 따라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된다.


글은 길이 된 존재의 흔적이다. 먼저 걸어간 이는 반드시 많은 글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후대의 기억과 언어 속에서 다시 글이 된다. 글은 걷는 사람과 그 길을 뒤따라가며 자기만의 작은 길을 만들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길이 글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단어의 모음이 바뀌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세계와 접촉하며 자기 삶을 통로로 만들고, 그 통로가 다시 누군가의 문장으로 맺히는 사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길ㅡ글 탄생〉이 말하려는 주제는 분명하다. 누구나 자기 삶의 자리에서 걸어야 한다. 걷는 일만이 길을 만들고, 길이 된 흔적만이 글로 남는다. 글쓰기란 생각한 바를 단순히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 몸과 언어가 서로를 천천히 변환시키는 걸음의 사건이다. 길의 ‘ㅣ’가 이슬처럼 떨어져 ‘ㅡ’로 눕는 순간, 걸음은 멈춘 것이 아니라 글로 다른 몸을 얻는다. 그리하여 길은 글이 되고, 글은 다시 누군가가 걸어갈 작은 길이 된다.


결국 이 단시의 주제는 누구나 자신이 길이 되도록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걸음만이 길이 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예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은 ‘그가 길이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쉼 없이 걸었다’라는 행동을 본받는 것이다.


걸음으로 생겨난 길에서 이제 글이 탄생한다. 그런데 자신의 걸음을 쉼 없이 걸어 마침내 길 자체가 된 사람들은 놀랍게도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 글은 대체로 그를 따르던 후대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다. 그 글 속에는 앞서 걸어서 길이 된 존재의 흔적이 담겨 있다. 결국 모든 글은 길이 된 사람과 그 길을 뒤따라가며 자신도 작은 길이 되려는 사람들의 만남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가장 먼저 걸음을 내딛는 자의 위대함을 뒤따라는 이들이 넘어서긴 힘들다.다만, 걷던 것이 더 걷지 않아도 되는 순간, 움직이던 것이 어느 순간 멈추고, 내몸 바깥 풍경이 내 안쪽 언어로 응결될 때 생성되는 글을 붙잡을 수는 있다.


길이 글이 되는 것은 ‘걷는 이가 여기 있다’라는 흔적이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세계와 접촉하며 스스로 다른 존재로 “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걸음으로써만 길이 되고, 길이 되어야만 글이 남을 수 있다. 글쓰기란 단순히 생각한 바를 창작하는 여정이 아니라, 세계와 몸과 언어가 서로를 천천히 변환시키는 걸음의 창발적 사건이다.


5. 이 시의 철학적 요소 ― 되어가기

철학은 개념의 중첩이다. 어느 철학이든 삶을 관조하는 자기만의 핵심 개념 없이는 성립되기 어렵다. 〈길ㅡ글 탄생〉에 내재한 철학적 요소는 ‘길의 운동성’이다. 길은 걸음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라는 명사는 ‘걷는다’라는 동사가 무수히 반복된 뒤에야 생겨난 결정체다. 그러므로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걸음 속에서 되어간다.


우리 앞에 이미 놓인 듯 보이는 길도 처음부터 길이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지나갔고, 다시 누군가가 밟았으며, 그 반복된 흔적이 굳어져 길이 되었다. 그러나 한번 생겨난 길도 영원하지 않다. 걷는 이가 사라지면 길은 풀과 흙과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말해 ‘걷는다’라는 운동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길은 유한하고, 걸음만이 길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 점에서 나의 단시가 추구하는 또 하나의 철학적 개념은 ‘길의 육체성’이다. 두 발로 걷든, 목발에 의지하든, 휠체어의 도움을 받든, 누군가의 부축을 받든, 심지어 길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상태라 해도, 자기 사유를 품고 자신을 앞으로 내미는 존재는 걷는 나그네다. 중요한 것은 보행의 형식이 아니라 사유를 실은 몸의 움직임이다. 반대로 길을 걷고 있다 해도 아무 사유 없이 맹목적으로 이동하는 이는 그저 이동할 뿐이다. 사유를 만들고, 그 사유를 자기 걸음에 실어 세계와 접촉하는 이에게서만 글은 남는다.


이 사유의 결정체가 ‘글’이다. 글은 사유 있음의 흔적이며, 걸었다는 육체적 수행의 결실이다. 글에는 한 사람이 품었던 개념만이 아니라, 그가 지나온 길의 리듬과 체온도 함께 남는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글은 정신의 출력물이 아니다. 글은 세계를 통과한 몸이 남긴 변형의 흔적이다. 나의 단시가 세 행으로 구성되고, 1행이 사건의 치환, 2행이 치환된 사건의 확장과 심화, 3행이 윤리적 프락시스의 생성으로 이어지는 것도 결국 걸음의 과정을 이미지화하여 하나의 철학적 개념으로 응결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길ㅡ글 탄생〉의 철학적 요소를 종합하는 개념은 ‘운동성’이다. 그것은 걷는 것이며, 동시에 그 걸음의 끝에서 쓰는 것이다. 걸음의 결과로서의 길과, 그 길의 끝에서 맺히는 글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사유하는 사람이고, 사유하는 사람이기에 걷는 사람이다. 길 위에서 사유는 몸을 얻고, 몸을 얻은 사유는 마침내 글로 눕는다.


이 걸음은 빠른 이동이 아니다. 인위적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행위도 아니다. 사유가 응결되는 순간이 걸음의 끝이라면, 그 걸음에 가장 가까운 말은 ‘산바카라’이다. 산바카라은 머물고, 돌아보고, 우회하고, 천천히 세계 속으로 스며드는 움직임이다. 그런 점에서 산바카라은 살아 있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바카라이다. 그것은 제본된 바카라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풀리고 다시 엮이는 인간 자신이라는 바카라이다.


이로써 〈길ㅡ글 탄생〉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 곧 ‘되어가기’의 철학이 된다. 존재는 완성된 채 머무르지 않는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며, 걸음 속에서 길이 되어간다. 다시, 길은 끝내 글이 되어간다. 그러므로 길과 글은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아니라, 존재가 세계와 접촉하며 스스로 다른 존재로 변형되어 가는 과정의 두 국면이다.


여기서 ‘되다’는 단순한 변화 동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자기 바깥과 접촉하면서 스스로를 열어가는 생성의 운동이다. ‘이다’가 존재를 하나의 고정된 이름 안에 머물게 한다면, ‘되다’는 존재를 관계와 과정 속으로 밀어 넣는다. 길은 “길이다”라고 규정될 때보다, 누군가의 걸음 속에서 “길이 되어갈” 때 더 살아 있다. 글 또한 “글이다”라고 완결될 때보다, 걷고 듣고 고치고 다시 맺히는 동안 더 깊어진다.


내가 이 시에서 “맺힌”이 아니라 “맺히는”이라고 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글은 끝난 물체가 아니라 계속 생성되는 흔적이다. 걷는 동안 사유는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몸속에서 눕고, 마침내 문장으로 맺힌다. “맺히는”이라는 현재진행의 말은 글이 닫힌 결론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교정되며 다시 태어나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길이 글이 되는 일은 존재가 다른 존재로 되어가는 가장 작고도 선명한 사건이다.


히브리어의 어떤 동사가 ‘이다’와 ‘되다’의 뜻을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도 이 대목에서 조심스레 떠올릴 수 있다. 존재는 고정된 방식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존재는 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자기 바깥과 만나며, 다른 모습으로 열려간다. 다만 이 언급은 신학적 논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시가 말하는 ‘되어가기’의 감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다. 〈길ㅡ글 탄생〉에서 중요한 것은 거대한 교리의 산맥이 아니라, 길 위에서 한 획이 조용히 눕는 작은 사건이다.


옛 지혜자 코헬렛이 많은 바카라을 짓는 일을 피곤한 일로 말한 것도 이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바카라의 무용이나 출판의 부정이라기보다, 글쓰기가 몸과 정신을 함께 소모하는 고된 수행이라는 고백에 가깝다. 글쓰기는 편안한 산출이 아니라, 사유를 계속 수정하고 재배열하며 자기 삶을 공공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글은 한 번에 완성되는 도착지가 아니라, 다시 걸어가게 만드는 디딤돌이다.


내가 “산바카라글”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과정적 걸음의 철학을 붙잡기 위해서다. 산바카라글은 효율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느린 행동이며,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는 방식이다. 걷는 리듬을 따라 머물고, 돌아보고, 우회하고, 천천히 세계 속으로 스며들 때 사유는 비로소 몸을 얻는다. 그리고 그 몸의 감각 속에서 세로의 획 하나가 가로로 눕는다. 길은 조용히 글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 시의 철학은 ‘이다’에서 ‘되다’로 움직이는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정태적 존재에서 생성적 존재로의 이행이다. 길은 길로 고정되지 않고, 걸음 속에서 길이 된다. 글은 글로 닫히지 않고, 다시 누군가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된다. 존재의 가치는 완결된 이름 안에 머무를 때가 아니라, 걷고, 스며들고, 눕고, 변형되며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깊어진다.


이처럼 〈길ㅡ글 탄생〉은 길이 글이 되는 조용한 변형의 순간을 붙잡는다. 길의 ‘ㅣ’는 이슬처럼 떨어져 ‘ㅡ’로 눕고, 걷던 몸은 사유를 문장으로 맺는다. 그 순간 글은 바카라상 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세계를 통과한 몸의 흔적이 된다. 길은 걸음 속에서 스스로 글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시는 그 조용한 변형의 찰나를, 새벽이슬 한 방울의 떨림처럼, 잡초햇살의 숨결처럼 붙잡아 낸다.


6. 글쓰기의 매듭 ― 산.바카라: 산바카라글

이제 이 단시의 마지막 단어인 “산바카라글”로 돌아온다. “산바카라글”은 이 시 전체의 형식과 철학이 응축된 생성어다. 그것은 단순히 산바카라하면서 쓰는 글을 뜻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산”과 “바카라”이라는 두 움직임이 한몸이 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우선 “산(散)”은 흩어짐이다. 길 위를 걷는다는 것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다. 산바카라하는 몸은 시선과 생각과 감각을 세계 속으로 흩어놓는다. 햇살에 흩어지고, 풀냄새에 흩어지고, 바람과 이슬 사이로 흩어진다. 그러나 이 흩어짐은 무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고정된 자아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 세계와 접촉하게 하는 개방이다. 서재 안에서 응축되어 있던 사유는 숲길 위에서 흩어지며 살아난다.


반면 “바카라(冊/策)”은 다시 묶는 일이다. 흩어진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걷는 동안 몸에 스민 햇살과 이슬과 바람은 어느 순간 언어로 맺힌다. 이때 바카라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다. 그것은 흩어진 세계를 다시 엮는 행위다. 다만 그 엮임은 완벽한 질서나 닫힌 결론이 아니다. 산바카라글은 세계를 체계로 붙잡기보다, 세계 안을 지나간 몸의 리듬과 흔들림을 그대로 품는다.


그러므로 “산.바카라”은 흩어짐과 묶임의 이중 운동이다. 산(散)으로서 세계 속으로 퍼져나가는 감각이며, 바카라(冊/策)으로서 그 흩어진 감각을 다시 언어로 엮는 일이다. 그 사이에서 시가 태어난다. 몸이 길 위를 천천히 걸을 때, 세로의 획 하나가 조용히 눕고, 흩어진 세계는 어느 순간 한 편의 산바카라글로 맺혀 간다.


결국 산바카라글은 이 시가 도달한 가장 느린 글쓰기의 이름이다. 글은 바카라상 위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몸이 길 위를 걸으며 세계 속으로 흩어지고, 다시 그 흩어짐을 언어로 묶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길은 걷는 동안 글이 되고, 글은 다시 누군가가 걸어갈 길이 된다. 그 오래되고 느린 생성의 형식을, 나는 “산.바카라”, 곧 “산바카라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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