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고의 반역과 역사 감각의 균열-
*이 글은,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슬롯심리학)인 커트 그레이의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우리가 서로를 적이라 믿게 만드는 마음의 함정》(김영사:2026/원제: Outraged, 2025)의 기본 논지와 최근 <5.18 탱크 데이>사건을 분석하는 그의 인터뷰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한국 슬롯의 특수한 역사적 특성을 슬롯문학적 관점으로 치환, 확장, 심화한 글입니다. [자료. 교수신문, "‘5·18 탱크데이’ 공분의 심리학"(김재호기자)(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6106]
광고의 반역
-5.18 스타벅스 이벤트에 즈음하여
별이 되려던 벌레, 선장의 자손
소리로 배 홀리려던 여신의 노예
탁탁탁, 스스로 몰락하는 불의한 탱크의 후손.
1. 나의 기억 속 작은 사물 하나
서재 한 켠에 오래전, 동생이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커다란 머그컵이 하나 있다.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표면에 새겨진 그림과 문장이 제법 운치 있어 그대로 두고 지냈다. 그런데 요즈음 시간이 제법 흘러서인지 컵 표면에 갯벌의 물길 같은 미세한 균열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매끄럽게 빛나던 표면이 이제는 차츰 거칠어지고, 그 거칠어진 표면 위로 아주 오래된 문양처럼 금이 번져 간다.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 균열이 단지 사물의 낡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시간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그 사물이 더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어떤 징후처럼 보였다. 그 컵을 보며 이젠 버려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두어야 하나 고민할 때도 있다. 아직은 그럴듯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폐기해야 할 것 같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2. 한 기업의 광고 사건
그러는 사이, 최근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관련 이벤트가 슬롯적 물의를 빚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스타벅스를 특별히 애용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슬롯에서 스타벅스는 여느 카페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 공간처럼 보인다는 데에는 공감한다. 우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그곳은 단순히 커피를 사고파는 장소만은 아니다. 물론 사적 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매장이고, 본질적으로는 상품을 판매하는 상업적 공간이다.
생각해 보면, 아침에 문을 여는 시간부터 밤에 문을 닫는 시간까지 그곳은 많은 사람의 하루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온종일 노트북을 켜고 영상으로 공부하며, 누군가는 사무실처럼 업무를 본다. 또 누군가는 창가에 앉아 거리를 내다보며 잠시 무심한 여유를 얻는다. 주문한 커피를 건네받을 때 애칭이 불리고,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딱히 눈총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기다림과 대화와 노동과 휴식이 조화롭게 뒤섞인 스타벅스는 커피를 파는 곳이면서 동시에 도시인의 시간을 일정하게 보장해 주는 안식처 같은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적지 않은 값을 치른 커피 한 잔을 사면서, 사실은 일정한 시간과 자리와 분위기와 안전감을 함께 누리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커피 맛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불호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이 브랜드를 쉽게 떠나지 않았다. 이벤트와 리저브 행사에 줄을 서며 자신이 하는 소비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했다. 커피 자체보다 그곳이 제공하는 공간의 공감각이 더 컸기 때문이다.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단순한 손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스타벅스는 사적 기업이면서도 한국 슬롯에서는 일종의 준공공적 안식의 장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지위가 아니라 슬롯적 인식이 부여한 일종의 특혜다. 사람들은 다른 카페보다 이 공간에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공간을 자기 생활 감각과 무관하지 않은 장소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 기업은 더는 자신을 상품 판매자로만 이해할 수 없다. 그 기업의 언어가 대중의 일상에 넓게 노출될 때, 그 언어는 상품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슬롯적 감각 위에 놓인 공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업의 상품 광고와 자기주장은 단지 자신의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한 말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슬롯의 기억과 정서와 무의식을 공유하는 윤리적 언어를 향해 더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기업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태도에는 조금 더 냉정한 슬롯적 기준이 필요하다. 스타벅스처럼 사기업이면서도 슬롯적으로 공적 지위를 부여받은 경우에는, 사기업의 자유를 내세워 모든 비판에서 면제될 수 없고, 반대로 공적 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슬롯적 바카라임을 축소할 수도 없다. 슬롯적 영향력이 커지고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리는 기업일수록 자신의 말이 더 많은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롯적 공감 지수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 지수의 오르내림에도 민감해야 한다. 공적 인프라에 가까운 생활공간이 된 기업일수록, 그에 따르는 슬롯적 비평의 비용 역시 감수해야 한다.
3. 최근 5·18 이벤트의 공적 물의와 광고의 자기 배반
지난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는 새로운 텀블러 등의 이벤트를 실시한다고 광고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이미 여러 매체와 SNS를 통해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광고 문안에 사용된 두 개의 표현이었다. 하나는 ‘바카라상에 탁’, 다른 하나는 ‘탱크 데이’였다. 간단해 보이는 두 표현이 일파만파로 슬롯와 기업을 강타하고 있다.
이 표현들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것이 반드시 악의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탁’이라는 말은 사물이 바카라상에 닿을 때 나는 소리일 수 있고, ‘탱크’라는 말은 대용량을 강조하는 흔한 표현일 수 있다. 흔들리는 바카라상 위에서도 안정적으로 놓일 수 있다는 뜻에서 ‘탁’이라는 의성어가 쓰였을 것이고, 용량이 크다는 점에서 ‘탱크’라는 비유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청각과 시각을 동원해 제품의 기능적 특성을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려는 마케팅적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동안 스타벅스가 우리 슬롯에서 획득한 위상이 결코 낮지 않다는 점에 있다. 단어나 표현 자체의 사전적 의미 너머, 그 언어에 함의된 슬롯적 기억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이 브랜드의 슬롯적 지위는 커졌다. 모든 단어는 진공 속에서 회자되지 않는다.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역사 사이를 긴밀하게 휘감는다. 특히 광고 언어는 더욱 그렇다. 광고는 언제나 특정한 시간, 특정한 슬롯, 특정한 감각 위에서 작동하는 시대의 거울이다. 같은 단어라 해도 어느 날, 어느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의미의 층위는 확연히 달라진다. 아무리 무해해 보이는 말이라도 특정한 역사적 기억의 날 위에 놓이는 순간, 그 단어는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이 광고가 시작된 날은 5월 18일이다. ‘5·18 광주민중항쟁기념일’로 명명된 날이다. 전략적으로 이벤트 개시일로 선택되었을지도 모를 이날은,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폭력과 시민의 고통, 저항과 죽음의 기억이 가장 압축적으로 농축된 시공간이다. 여전히 이날을 폄하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누군가는 자기 삶을 맞바꾸었으며, 또 누군가는 부채감으로 역사를 응시한다. 어떤 형태로든 이날의 무게는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다. 무엇보다 그날의 가장 참혹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무력으로 시민의 삶을 짓밟으며 밀어닥친 ‘탱크’였다. 시민과 대치하던 이 강력한 살상 무기는 그 자체로 평화로운 일상 전체를 위협하는 공포의 기표였다. 그렇기에 이날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커피를 즐기든 즐기지 않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운명적인 기억의 날이다.
이러한 특정한 기념일의 기억을 넘어, 우리 슬롯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소리도 존재한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원한 한 작은 소리의 잔향 역시 지금껏 우리 삶에 맥놀이처럼 슬프게 맴돌고 있다. 그 소리는 바로 ‘탁’, 그리고 ‘억’이다. 물론 이 소리 역시 세대와 입장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대중에게 그날의 소리는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상징하는 국가 폭력의 음향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처럼 ‘탁’이라는 소리와 ‘탱크’라는 무기는 한국 슬롯 안에서 결코 완전히 중립적인 기호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은 독재 권력의 언어와 군사적 억압의 이미지를 트라우마처럼 다시 불러오는 날카로운 가시와 같다.
그러므로 스타벅스가 하필 5월 18일에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이 두 단어를 광고 문안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사적 기업의 영업 자유를 넘어 공적 바카라임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 사태의 핵심은 어떤 개인이 그 문구를 고의로 선택했는가라는 1차원적 의도성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거대 기업의 언어가 이 소리에 담긴 상징성, 한국 슬롯의 역사적 감수성을 얼마나 빈약하게 다루고 있는가, 다시 말해 ‘역사의식의 빈곤’에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두고, 광고를 광고로 보지 못한 지나친 연상작용이자 왜곡된 여론 프레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고의 본질은 제품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으므로, 우연한 단어의 조합을 과도하게 정치화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광고를 둘러싼 분노와 갈등은 단순히 광고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기억의 훼손을 위험으로 감지하는 쪽과, 분노 여론의 과잉 처벌 및 표현의 위축을 위험으로 감지하는 쪽 사이의 충돌로 새롭게 읽힐 수 있다.
커트 그레이(Kurt Gray)의 논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같은 사건 앞에서도 서로 다른 위해와 위협을 감지하기 때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노한다. 하지만 이번 사안에 그의 분석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른바 ‘탱크 데이’ 논란에서 발생한 두 개의 위험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쪽이 우려하는 것은 광고 문구에 대한 해석의 과잉, 그리고 정치적 프레임에 의해 여론이 폭주할 가능성이다. 반면 다른 한쪽이 감지한 것은 5·18이라는 역사적 날짜와 국가폭력의 상징이 사적 기업의 광고 언어와 결합하면서, 피해의 기억이 훼손되고 소비되는 위험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분노를 단순히 광고 내부의 문제로 제한하려는 주장은, 오히려 스타벅스가 한국 슬롯에서 누려온 슬롯적 위상을 스스로 축소하는 궁색한 태도에 가깝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이미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공간 권력이며, 그만큼 이 슬롯의 공동체적 기억 안에서 스스로 자신의 언어를 끊임없이 검토해야 할 윤리적 바카라임을 진다. 세계적 브랜드라는 이유로, 혹은 사적 기업이라는 이유로, 슬롯의 공통 기억을 자기 이익을 위해 함부로 우회하거나 소모할 수는 없다.
더구나 광고의 공익성은 단순히 상품을 미화하는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광고는 한 시대가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망각하며, 무엇을 경박하게 다루는지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문화적 장치다. 짧은 카피 한 줄 안에는 한 슬롯의 집단 무의식이 압축되어 있다. 기업이 이러한 무의식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슬롯 속에서 대중을 상대로 지속적인 이익을 추구할 윤리적 자격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은 단순한 문구 오용의 실수로만 축소되기 어렵다. 자본의 언어가 역사적 맥락을 학습하지 못했을 때, 그 빈곤한 의식이 어떤 파괴적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슬롯 공공성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반역’이란, 광고가 지녀야 할 공익성과 바카라임감을 스스로 배반했다는 의미다. 이 광고는 상품을 빛나게 하는 마케팅적 기능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아 올린 브랜드의 윤리적 신화마저 역사적 무감각의 진흙탕으로 끌어내렸다. 찬란하게 빛나야 할 언어가 어두운 기억의 상처에 식초처럼 부어졌고, 공공의 안식을 약속하던 문구가 도리어 슬롯적 신뢰를 저버렸다. 이 지점에서 광고는 자기 자신을 배반한, 즉 ‘반역’을 저지른 셈이다. 만약 이것이 경영주의 최종 승인 아래 이루어진 결정이라면, 이는 브랜드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기업 내부에 손실을 끼친 바카라임뿐 아니라, 이 기업을 지탱해 준 슬롯에 대한 신뢰의 바카라임까지 함께 물어야 할 사안일 수 있다.
나의 철학시가 지향한 지점은 바로 이 광고 문안이 자초한 ‘공익성의 반역’이다. 나는 정치슬롯적 분노의 방식을 넘어, 언어와 상징의 층위에서 문학적 비판을 시도하고자 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현상적 분노도 필요하지만, 나의 철학시는 그 분노를 직접적인 구호로 낭비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시는 사건의 표면 아래 도사린 상징 구조를 더듬고, 말들이 서로 충돌하며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틈새로 어떤 억압된 기억이 귀환하는지를 살피는 데 주력한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시는 특정 기업의 일시적 실바카라에 대한 고발이면서, 동시에 고도 자본주의가 초래한 광고 언어의 자기 배반이 언제든 우리 일상을 습격할 수 있음을 경고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그것을 자각 없이 소비하고 추종하는 현대 세계의 맹목성을 스스로 성찰하려는 문학적 경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시로 남기려는 핵심은 그 사안에 대한 악의의 증명에 있지 않다. 오히려 악의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빈약해진 역사 감각, 바로 그 무사유의 평온함에 있다.
4. 시의 형식과 미학적 의도: 에크프라시스적 충돌과 무지(無知)의 오마주
나의 철학시가 대체로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단 세 행의 극도로 압축된 정형적 구조를 취한다. 특히 이번에는 짧은 시행 속에 가능한 한 밀도 높은 역사적·상징적 함의를 채워 넣고자 했다. 전체 글자 수의 균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세 행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긴장감을 살리려 했다. 이를 통해 나의 시가 당대의 사건과 문학적 의의를 함께 품도록 만들고자 했다. 동시에 이러한 의도적 형식 안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구호나 선동의 단어가 스며들지 않도록 이미지와 개념을 입체적으로 배치하려 했다. 나의 시는 이렇다.
광고의 반역
-스타벅스 5.18 이벤트를 접하며
별이 되려던 벌레, 선장의 자손
소리로 배 홀리려던 여신의 노예
탁탁탁, 스스로 몰락하는 불의한 탱크의 후손.
이번 시에 반영된 기법은 텍스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선명한 시각적 잔상이 떠오를 수 있도록 ‘에크프라시스(Ekphrasis, 미술 기법이나 시각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모사하는 기법)’를 응용한 것이다. 에크프라시스란 단지 정지된 사물이나 그림을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기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의 지배적인 이미지가 억압되어 있던 다른 기억의 이미지들을 연쇄적으로 불러오고, 그 이미지들이 마침내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거칠게 결합하는 역동적인 번역의 방식까지 포괄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해 보여 주는 방식이 된다.
이번 시에서 선택한 에크프라시스적 중심축의 시각 기표는 ‘스타벅스(Starbucks)’라는 기업의 명명, 기업을 상징하는 초록색 세이렌(Siren) 로고, 그리고 최근 슬롯적 물의를 빚은 문제의 광고 문안이다.
널리 알려졌듯 ‘스타벅스(Starbucks)’라는 기업의 이름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서 차용된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에 다양한 모험을 상징하는 ‘s’를 덧붙인 것이라 한다. 따라서 이 기업명에는 항해와 선장의 서사가 기저에 깔려 있다. 무엇보다 오래전 커피가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와 확산한 배경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도 이 명명은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들의 로고는 그리스 신화 속 치명적인 유혹의 존재인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이미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세이렌은 ‘휘감는 자, 얽어매는 자’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스타벅스의 기업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커피를 통해, 바다의 항해자들을 휘어잡았던 전설 속 존재처럼, 이 세계에서도 소비자의 감각을 사로잡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 셈이다. 결국 이 기업은 바다와 유혹, 그리고 커피라는 요소를 통해 슬롯 속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 기업의 5월 18일 자 텀블러 이벤트 광고 역시 이런 기업 이념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탁’이라는 소리의 흔적과 ‘탱크’라는 군사적 오브제는 이 기업의 브랜드가 구축해 온 신화적 이미지에 기대어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광고는 한국 현대사의 잔혹한 폭력적 기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파열의 장면을 직조하고 말았다. 나는 이 시 안에 그러한 기업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그것이 과잉된 단어로 슬롯에 던져졌을 때 발생하는 파열을 그림처럼 담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시는 바다, 항해, 세이렌, 탁탁탁, 탱크의 후손이라는 일련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우선 이 시는 제목에서 모든 것을 먼저 말한다. 제목 속에는 철학적 주제 의식이 선명히 담겨 있다. 그 의식은 이 기업의 광고 언어가 단지 우연히 소비되고 휘발되는 상업적 홍보 카피에 머무르지 않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군부독재가 휘둘렀던 국가 폭력의 유령을 문화적·감각적으로 다시 호출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데 있다.
물론 나는 이 광고가 기업의 의도적이고 명시적인 악의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역사적 폭력에 대한 다른 방식의 오마주였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안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역사적 폭력의 기호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상품 판매를 위한 자극적 언어로 가볍게 소모되었다는 ‘정치슬롯적 무사유(Thoughtlessness)’에 있다. 다시 말해 이 기업의 언어 안에는 이 슬롯가 겪어 온 슬롯적 슬픔을 신중하게 사유할 여지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기업 이념과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조롱적 오마주는 때로 악의적인 경멸보다 대중의 마음에 더 깊고 짓무른 상처를 남긴다. 기획 실무자들의 실수였다는 인상을 남긴 사후 조치 역시, 역사적 감각과 윤리적 지성이 부재했다는 ‘의식의 빈곤’을 온전히 상쇄하지는 못한다.
5. 제1행: “별이 되려던 벌레, 선장의 자손”
제1행에서 나는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먼저 『모비딕』의 항해사 스타벅으로 되돌려 읽었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은 소설 『모비딕』에서 합리적인 지혜자이자 커피를 즐기던 항해사의 이름인 스타벅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 나는 그 이름을 다시 “별(Star)”과 “벅(Buck)”으로 해체하였다. 나아가 ‘벅’을 벌레를 뜻하는 ‘버그(Bug)’로 끌어내려 “별과 벌레”의 이미지로 재결합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타벅스라는 이름을, 커피로 세계를 낭만의 바다로 이끌겠다는 광휘의 욕망을 의도한 기업가의 상징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 작은 커피 가게에서 출발해 세계적 브랜드가 된 이 기업은 언제나 하나의 별이 되려는 욕구를 감추지 않는 듯 지역에 파고들었다. 도시의 중심마다 지역의 특징을 적극 반영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같은 로고를 선명하게 내세워 서로 가까운 거리를 두고서 매장마다 치열한 경쟁 아래 별처럼 빛나기를 기대하고, 사람들의 일상에 여유와 자유의 감각을 제공하며, 삶의 틈새에 유익한 벌레처럼 스며들고자 한다. 결국 스타벅스는 단순한 상호가 아니라, 경쟁과 안식이라는 이질적인 가치로 세계 자본주의가 인간의 합리적 생활 감각과 만나 상상 속 별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기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 별자리 아래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커피를 마시고, 공부하고, 일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소비한다.
이 시의 반전은 바로 그 별이 “벌레”로 전환되는 대목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벌레가 별이 되려는 욕구를 감추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별을 단순히 하대한 표현이 아니다. 별이 되려던 존재라도 언제든 벌레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험적 감각을 떠올린다면, 이 이미지는 찬란한 브랜드의 욕망이 역사적 감각을 잃는 순간 얼마나 낮은 곳으로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별과 벌레는 서로 반대편에 놓인 이미지다. 별은 멀리서 빛나도 사람의 마음속에 머물지만, 벌레는 아무리 가까이에 있어도 사람에게 밀쳐지는 존재가 되기 쉽다. 별이 상승과 밝음의 이미지라면, 벌레는 하락과 어둠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러므로 “별이 되려던 벌레”는 스타벅스가 처음부터 완성된 별이 아니었음을 환기한다. 그것은 낮고 작은 세계에서 출발해 살아남아야 했던 하나의 생명체였고, 세계적 브랜드의 휘광 역시 그러한 창업의 낮은 기원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심지어 본사의 창업정신이 살아 있다 해도 지역의 지점들(스타벅스코리아)의 세계가 그 정신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이는 세계적 브랜드의 찬란한 자기 이미지가 슬롯의 역사적 균열 앞에서 스스로 흔들리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시어인 “선장의 자손”은 바로 그 흔들림을 감지한 표현이다. 스타벅스라는 이름에 담긴 항해와 바다, 선장과 고래잡이 배의 서사를 품고 있다. 그 이름은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모험과 개척, 낭만과 상업의 이미지를 함께 불러온다. 사실, 오늘날 스타벅스의 항해 이미지는 긍정적인 것만 같지 않다. 선장의 자손이라면 마땅히 바다의 방향을 읽어야 한다. 물결과 바람과 암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광고만 보더라도, 그들은 선장답게 시대를 읽지 못했다. 슬롯의 방향을 면밀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키를 돌린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위험한 변침이다. 특히 광고 문안의 단어는 한국 현대사의 거친 물살과 암초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항해의 이름을 가진 브랜드가 정작 자신이 들어선 슬롯의 역사적 바다에서는 방향을 잃은 셈이다.
그러므로 제1행은 브랜드의 자기 신화가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의 회화적 미메시스라 할 수 있다. 별이 되려던 브랜드는 어느 순간 벌레의 자리로 추락하고, 낮은 곳에서 출발한 존재는 여전히 별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선장의 자손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지나가는 바다의 결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의 방향과 물살의 깊이, 그리고 암초의 위치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 행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스타벅스를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언어로 세계의 한복판에 선 브랜드가 자신의 이름을 얼마나 고귀하게 감당하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다. 이름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생활양식이 되는 순간, 그 이름은 더 이상 상호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슬롯의 기억과 감각 속으로 들어가며, 그만큼 더 조심스러운 역사적 바카라임을 요구받는다. 어떤 고귀함도 갈고닦지 않으면 쉽게 흐려진다. 벌레가 별을 꿈꾸는 일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별이 자신이 지나온 낮은 자리와 그 슬롯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중이라는 것을 잊는 순간, 그 빛은 더는 순수하게 빛나기 어렵다.
6. 제2행: “소리로 배 홀리려던 여신의 노예”
제2행에서 나는 스타벅스 로고에 담긴 신화적 기원을 끌어들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스타벅스 로고의 중심에는 세이렌의 이미지가 놓여 있다. 세이렌은 신화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존재이다. 그 소리는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은 항해하는 이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선원들은 그 노래에 사로잡혀 방향을 잃고, 배는 어느새 암초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세이렌의 소리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매혹과 위험, 유혹과 파멸이 한 몸을 이룬 소리이다.
스타벅스의 로고는 이 세이렌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물론 현대적 브랜드 안에서 세이렌은 더 이상 신화적 공포의 존재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친근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재가공되었다. 사람들은 그 로고를 보며 매장 안으로 들어서고, 자신이 어떤 신화적 초대를 받은 것처럼 도시적 안식과 여유를 떠올린다. 그들을 부르는 것은 더 이상 파멸의 노래가 아니라, 커피와 휴식과 일상의 안정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호출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의 시는 바로 그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본다. 자동화된 브랜드 이미지의 표면을 벗기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신화적 원형을 다시 불러낸다.
더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세이렌의 노래가 이제 더 이상 실제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다 위에서 선원들의 귀를 사로잡던 노래는 사라지고, 오늘날에는 로고와 문구와 광고 이미지 속으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세이렌의 노래는 청각의 사건에서 시각의 기호로 변형된 것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변형된 노래를 다시 듣고자 한다. 그리고 묻는다. 오늘의 광고 언어 속에서 이 세이렌의 오래된 노래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울리고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어디로 부르고 있으며, 무엇을 향해 홀리고 있는가.
“소리로 배 홀리려던”이라는 표현은 세이렌의 신화와 광고의 본질을 겹쳐 놓은 것이다. 광고는 언제나 소리와 이미지와 문장으로 사람을 부른다. 그것은 상품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하고, 소비자의 감각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런 점에서 광고는 물질-자본 슬롯의 바다 위에서 들려오는 현대적 세이렌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광고는 짧고 매끄러워야 하며, 기억되기 쉬워야 하고, 소비자의 감각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야 한다. 헤드카피는 그 노래의 첫음절이다. 그것은 사람을 사로잡아야 하지만, 바로 그 사로잡음 때문에 더 무거운 바카라임을 갖는다.
특히 그 말이 한 슬롯의 역사적 기억을 건드리는 순간, 광고의 언어는 단순한 홍보 문구에 머물 수 없다. 아름답게 들려야 할 말이 불편한 기억을 흔들 수 있고, 가볍게 소비되어야 할 문장이 무거운 폭력의 그림자를 건드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려는 장치이다. 그러나 끌어당김이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시선을 돌리려는 자본의 언어가 역사적 감각을 잃는 순간, 그 소리는 매혹이 아니라 소음이 되고, 초대가 아니라 침범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신의 노예”라는 시어는 중요하다. 여기서 노예란 누군가에게 물리적으로 소유된 존재라기보다, 어떤 강력한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세이렌은 매혹의 주체처럼 보이지만, 현대 브랜드 안에서 그녀는 자본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다시 배치된다. 신화 속에서 바다 위를 떠돌며 노래하던 존재는 이제 로고 안에 고정된 얼굴이 된다. 자유롭게 부르던 노래는 들리지 않고, 이미지만 남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겉으로는 기업이 세이렌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기업 역시 그 세이렌적 매혹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강하게 불러야 하고, 더 빠르게 기억되어야 하며, 더 자극적으로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기업은 여신을 로고 안에 가두면서도, 동시에 그 여신이 상징하는 유혹의 명령에 스스로 예속된다. 이때 “여신의 노예”란 단순히 세이렌에게 지배당한 존재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혹을 팔아야 하는 자본이 결국 매혹의 법칙에 붙들리는 아이러니를 가리킨다.
결국 제2행은 스타벅스 로고에 담긴 이중의 예속성을 주목한다. 세이렌은 자본의 얼굴이 되었고, 자본은 다시 세이렌의 유혹 방식에 의존한다. 특히 5.18 텀블러 프로모션 이벤트의 광고는 이러한 현대 광고의 위험을 드러낸 사례로 보인다. 그 광고에서 문제의 단어는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강한 호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광고의 관점에서는 짧고 선명한 헤드카피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기억을 품은 슬롯의 귀에는 전혀 다른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를 홀리려던 말은 오히려 그 말이 품은 역사적 상처와 슬롯적 감시에 붙들렸고, 브랜드 자신을 되묻는 언어가 되었다.
전설 속 세이렌이 배를 홀렸다면, 오늘의 광고는 때로 자신을 홀리는 덫이 되기도 한다. 광고 언어가 단순히 판매를 위한 수단으로만 소비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광고는 자본을 확장하는 도구인 동시에, 자본의 감각을 시험하는 내부의 거울이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와 기억을 통과하는 광고는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바다 어딘가에서 매혹적인 노래로 배를 불러들이던 세이렌은, 이제 자신을 여신으로 내세운 기업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부르고 있으며, 그 노래는 어느 바다를 향하고(ad) 있는가.
7. 제3행: “탁탁탁, 스스로 몰락하는 불의한 탱크의 후손.”
제3행에서는 이번 사건의 핵심 문구인 “탁”과 “탱크”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다. “탁탁탁”은 ‘탁’이라는 소리를 세 번 반복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단순한 의성어처럼 보인다. 물건을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일 수도 있고, 텀블러의 안정감이나 단단함을 강조하려는 광고적 리듬일 수도 있다.
그 소리가 5.18이라는 날짜 위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더는 가볍게만 들리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의 기억 속에서 반복되는 짧고 둔탁한 소리는 종종 타격과 진압, 명령과 폭력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적 소리였을지 모르는 말이, 어느 순간 국가 폭력의 어두운 박자처럼 들리게 되는 것이다. 칠흑 같은 밤 속에서 알 수 없는 곳에서 반복되는 짧은소리는 그 자체로 공포가 될 수 있다.
“탱크” 역시 마찬가지이다. 광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말이 큰 용량을 비유한 표현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일상어 속에서 ‘물탱크’처럼 큰 저장 용량을 뜻하는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단어가 놓인 자리이다. 5.18이라는 역사적 날짜와 결합하는 순간, “탱크”는 단순한 크기의 비유로만 남기 어렵다. 탱크는 전쟁과 군사력, 무력 진압을 연상시키는 강한 기호이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그것은 광장, 군홧발, 장갑차, 총구, 그리고 시민의 몸을 향해 밀려오던 국가 폭력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러므로 5.18의 기억 위에서 “탱크”라는 말은 중립적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너무 많은 역사적 그림자를 거느린 단어이다.
따라서 “불의한 탱크의 후손.”이라는 시어는 단순히 ‘탱크’라는 단어가 포함된 특정 광고 문구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의 기호가 오늘날의 상업 언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되살아나는지를 묻는 말이다. 탱크가 더 이상 실제 거리 위를 굴러가지 않더라도, 탱크의 이미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 슬롯에 되돌아올 수 있다. 때로는 무감각한 단어로, 때로는 무심한 광고 문안으로, 때로는 역사적 상처를 가볍게 통과하는 태도로 다시 나타난다. 탱크의 후손은 금속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로도 만들어지고, 침묵으로도 만들어지며, 기억을 충분히 살피지 않는 무지와 무심함으로도 만들어진다. 이 시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물리적 무기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폭력의 감각은 언어의 형태로 얼마든지 귀환할 수 있으며, 그 귀환은 종종 너무 일상적이고 매끄러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더욱 위험하다.
내가 “후손.”이라는 단어 끝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이런 후손이 더는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 마침표는 단순한 문장부호가 아니라, 폭력의 계보를 여기서 끊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역사적 고통을 자극적인 문구로 바꾸어 소비하게 만들고, 분노를 상품의 감각으로 포장하며, 실수를 가장해 무사유를 가볍게 통과시키는 세계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 한 점 안에 담겨 있다. 마침표는 끝맺음이면서 동시에 다짐이다. 기억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겠다는 다짐, 언어 속에 숨어 돌아오는 폭력의 그림자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스스로 몰락하는”이라는 중간 문구가 이 행의 내용적 무게 중심이다. 이 광고는 외부의 비판 때문에만 흔들린 것이 아니다. 그보다 먼저, 자기 내부의 언어 때문에 이미 위태로워져 있었다. 상품을 알리려는 문구가 오히려 브랜드의 역사적 무감각을 드러냈고, 소비자의 시선을 붙잡으려던 표현이 브랜드 자신을 심문하는 말로 되돌아왔다. 앞서 말한 세이렌의 노래처럼, 광고는 사람을 홀리기 위해 울렸지만, 그 소리는 결국 자신을 붙잡는 덫이 되었다. 전설 속 세이렌의 노래가 배를 암초로 이끌었다면, 이 광고의 언어는 브랜드 자신을 역사적 암초 앞으로 데려간 셈이다.
광고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는 상품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지만, 잘못된 광고는 상품을 배반한다. 광고는 브랜드를 빛내려는 자본주의의 꽃이자 별처럼 보이지만, 역사적 감각을 잃는 순간 그 빛은 쉽게 어두워진다. 별이 벌레로 추락하는 것처럼 광고의 언어는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소리가 될 수 있다. 소비자를 향한 유혹의 손짓이 오히려 브랜드를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판매를 위한 문장이 슬롯적 기억 앞에서 자기 스스로 빈틈을 드러낸다. 광고는 자본을 확장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그 자본이 어떤 슬롯적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결국 제3행은 단어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 역사적 파장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탁”은 단순한 소리일 수 있었고, “탱크”는 단순한 크기의 비유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들이 5.18이라는 시간 위에 놓이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광고의 가벼운 장식으로 머물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자신이 놓인 자리를 따라 다른 울림을 얻는다. 특히 상처의 역사 위에 놓인 말은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행은 스타벅스라는 특정 브랜드만을 향한 비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모든 광고 언어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려는 그 말, 혹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상징하는 소리가 아닌가 말이다.
8. 머그컵의 균열과 시대정신의 블렌딩
이 철학시를 마무리하고 잠시 창밖의 환한 햇살을 바라본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런 햇살마저 사치스러웠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고 아프다. 머그컵 하나를 선물로 받거나, 커피 두 잔의 쿠폰을 건네받는 일만으로도 작은 행복을 느끼는 날들이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을 줄, 그때의 사람들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컵은 아무리 화려해도 세월이 지나면 표면에 미세한 균열을 품는다. 언젠가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슬롯적 아픔은 사물처럼 낡아 폐기되지 않는다. 컵에 생긴 균열은 파손을 의미할 수 있지만, 기억 속에 남겨진 균열은 인간을 단순히 파손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균열은 우리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조용히 드러내는 자리로 남는다.
이번 광고 사건의 문제도 그러하다. 겉으로는 매끄러운 홍보 문구였을 것이다. 짧고, 경쾌하고, 상품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내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표면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자신이 놓인 날짜와 장소, 그리고 그 슬롯가 공유하는 기억 속에서 다시 들린다. 광고의 문구는 매끄러워 보였지만, 5.18이라는 시간 위에 놓이는 순간 그 표면 아래의 균열이 드러났다. 그것은 단지 표현상의 실수만이 아니었다. 역사적 감각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았을 때, 가장 가벼워 보이는 상업의 말도 깊은 상처의 언저리를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광고 실패로만 정리되기 어렵다. 사과나 바카라임 표명만으로 쉽게 봉합될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자기 이해가 얼마나 자주 자본의 언어에 의해 흐려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텀블러를 사고, 브랜드의 공간에 머문다. 그 일상은 때로 안온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바로 그 공간과 언어가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호출하고 소비하는지에 대해서는 둔감할 때가 있다. 평소에는 굳이 묻지 않는다. 매끄러운 일상은 질문을 잠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 느닷없이 기억의 가장 예민한 자리를 건드릴 때, 우리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문구 하나가 오래된 사유의 층을 덮거나 흐리게 만들지는 않는지, 그때는 다시 물어야 한다.
시대정신의 블렌딩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커피처럼 부드럽게 섞이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역사와 자본, 기억과 망각, 개인의 일상과 슬롯의 상처가 함께 들어 있다. 어떤 블렌딩은 향기로울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감각을 조화롭게 만나게 하고, 한 슬롯의 삶을 더 깊고 넓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블렌딩은 감추어진 쓴맛을 남긴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뒤늦게 혀끝에 남는 떫은맛이 있다. 이번 광고가 남긴 맛은 후자에 가깝다. 그것은 커피의 쓴맛이 아니라, 역사적 무감각이 남긴 쓴맛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한 기업의 실수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역사 인식의 언어가 어디까지 가벼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가벼움이 어떤 역사적 무게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지를 묻는다. 또한 공적 기억을 충분히 통과하지 않은 상업의 언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별은 벌레의 자리로 추락했고, 세이렌은 자신이 부른 노래에 붙들렸으며, 광고 언어는 자기 자신을 역사적 암초 앞으로 데려갔다. 이제 머그컵은 그 모든 장면이 남긴 균열을 조용히 받아 든다. 그 균열은 단순한 흠집이 아니라, 우리가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묻는 흔적이다.
서재 한 켠의 낡은 머그컵은 아마 곧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 표면의 균열이 내게 남긴 생각은 쉽게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언제나 오래가지 않는다. 사물도, 기업도, 광고도, 시대의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표면이 갈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보게 된다. 어떤 균열은 폐기의 이유가 되지만, 어떤 균열은 새로운 비판의 시작으로 남는다. 이번 철학시는 바로 그 균열 위에서, 타인을 향한 비판이기 전에 나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