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환과 확장을 통한 존재론적 번역으로서의 글쓰기
“글쓰기는 작은 한 사람이 거대한 세상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통로이다.”
오래된 글을 만나는 아침
아침, 눈을 뜨고 나서도 잠시 누워 있는다. 밤을 안전하게 건너온 것에 대한 안도감을 누리고 싶어서다. 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생각해 본다. 대부분 헤벨처럼 빠르게 사라지지만, 그래도 한두 마디 단어가 생생할 때가 있다. 서재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바카라상에 앉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경전 한 구절을 읽는다. 할 수 있다면 가볍게 암송해 보기도 한다.
암송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낭송이라 할 수 있다. 그 일은 예전 어느 날, 어떤 자리에서 한 구절의 문장을 남겼던 이를 상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과연 자신의 글이 경전에 남아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나에게서 실현된다는 이 우연은, 거대한 삶의 질서 속에서는 필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암송을 마무리하면서 어떤 날은 글을 쓴다. 그때의 글은 널리 읽히기 전, 오로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글이다. 나는 이런 글을 개인적으로 ‘사기(思記)’라 부른다. 일기처럼 삶의 단편을 담으면서도 사유를 일깨우려는 의도가 있는 글이라는 의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의 사기야말로 아침 식사만큼이나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글은 내 앞에 놓인 경전의 심연에 귀를 기울이다가 마침내 듣게 된 지혜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경전과 나누는 대화로서 글쓰기
글쓰기는 나를 대면하는 나의 기록이다. 바깥 세계를 설명하는 기술(記述)이기 전에, 세계 앞에 오래 머무는 나의 태도에 대한 증언이다. 어른 아이였을 적, 나는 글쓰기를 다른 사람에게 내보일 독특한 의미를 빠른 속도로 생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거친 광석을 다듬어 보석을 만들 듯, 뒤엉킨 사유를 매끄럽게 정리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름 가치 있는 글들을 생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갈수록, 특히 아침에 일어나 경전 앞에 앉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거칠고 붙잡을 수 없는 것들 곁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지막에 고요히 사라지는 존재의 숨결을 한 자락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다. 결국 경전 앞에서 나는 글을 만들어내기 위한 지루한 여정을 스스로 감당하려는 느릿한 자발적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변주된 글쓰기의 세계, AI
오늘날의 글쓰기는 경계 없이 확장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글의 아우토반을 내달릴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는 대로 글이 될 수 있고, 글이 되는 대로 바카라이 태어날 수 있다. 태어나자마자 삶의 결을 달리해야 하는 운명일 수도 있지만, 모름지기 바카라은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옆에 놓인 인공지능, 아니 이제는 인공지능 옆에 나란히 선 인간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원하는 대로 빠르게 창조하고, 쉽게 분해하며, 세밀하고 풍요로운 설명으로 포장할 수 있는 기술이 가능해졌다. 미진한 생각이라도 더 명확하게 주장할 기회가 있으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도 즉각적으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글을 쓰려는 사람은 누구나 글쓰기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계의 은총 아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경계가 사라진 글쓰기의 위기
그러나 이런 글쓰기의 자유는 알게 모르게 글을 만들어내는 인간 장인의 손맛을 묶어버릴 수도 있다. 사유의 자극을 무디게 만든 채 태어나는 글도 적지 않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어떤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 의의를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모든 글에는 고유성이 있고, 그 식별 가능한 특징으로 그 글의 생애가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설명 뒤에 얕아지는 세계, 폭증하는 정보와 쉽게 공허해지는 인간의 내면 같은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글을 만드는 이와 만들어진 글이 일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AI 시대에 AI를 활용했는지 여부는 윤리적 문제를 불러일으키지만, 그것만이 핵심 문제일 수는 없다. 애당초 기술의 발전을 희망한 것이 인간이라면, 그 발전의 결과만을 탓하는 것도 인류의 반복되는 자기모순일 수 있다. 오히려 문제는 AI를 AI 답게 다루는 인간의 태도가 아니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답게’이다. 인간다움은 기계다움과 다르고, 기계다움은 인간다움과 같을 수 없다. 나다움은 너다움과 동일하지 않고, 너다움은 나다움과 한 묶음일 수 없다. 태어난 모든 것은 스스로 고유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의 소멸과 그것의 대응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데이터가 범람하는 시대다. 많은 데이터를 가진 자가 경쟁에서 이긴다는 생각도 당연시된다. 그러나 데이터는 인간다움과 비대칭적인 사물이다. 여기서 인간다움이란 데이터를 활용할 적절한 방식과 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간다움은 인간을 제거하거나 도태시키려는 태도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 데서 드러난다. 인간은 퇴보를 불안해하고, 아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데 두려움을 갖는 인식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심지어 사물들에게도 그 고유한 ‘다움’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공존과 공생의 지혜일지 모른다. 오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 지식 속에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톺아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혜로 만들기 위해 자기 경험을 강화하고, 그 끝에 글을 남긴다. 물론 그 지혜를 자기 속에 침잠시켜 다시 직접 살아낼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글쓰기라는 행위는 사라질 지식을 붙잡아 내 삶에서 다시 느릿하게 운행할 여백을 만들어내는 윤리의 실현이다.
자기 결정으로서 인간다움의 소생을 위한 분투
따라서 이 글쓰기의 윤리는 인간의 자기 결정에 의한 산물이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 선택의 결과라는 의미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앞에 다가오는 어떤 것을 천천히 관찰해야 한다. 그 관찰을 따라가며 그 사물과 대화해야 한다. 대화는 최초의 질문에서 시작되며, 그 질문에 따라 대답과 또 다른 대답으로 이어진다. 방향을 바꾸고 싶다면 새로운 질문을 꺼내면 된다.
누구나 알 듯이, 글쓰기는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간단히, 빠르게 판단하지 않을 때 글다워진다. 설명하기보다 설명을 들으려 하고, 서둘러 그 앞을 비켜나지 않고 가능한 한 그 곁에, 그 앞에 오래 머물러 있는 태도가 무르익을 때 글다움에 가까워진다. 결론을 서둘러 문장으로 쓰지 않으려 하고, 이해되지 않는 현상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리는 태도다.
모든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기에 글로 그 무지의 세계에 맞서 분투하는 것이다. 물론 승패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계에는 그 싸움 자체만으로 충분한 백색전쟁도 있는 법이다. 이 싸움의 대상은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 바로 자기(self)라는 타자이다. 결국 글쓰기란 나와 타자인 나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분투이며, 지적 상호 저항이다.
이 다툼에서 나를 둘러싼 내 안의 세계와 내 밖의 세계에 담긴 의미는 완전히 파악되어 소유되지 못한다. 삶은 언제나 자신의 인식 바깥에 무엇인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결정에 의한 글쓰기에는 한 가지 특징이 선명하다. 그것은 늘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불친절한 글쓰기야말로 전장의 흔적이다.
인간다움을 극대화한 자기 저항적 지혜자, 코헬렛
나는 이런 점에서 인간다움을 극대화한 글쓰기의 예로 고대의 자기 저항적 지혜자 코헬렛의 수행을 들곤 한다. 그의 글쓰기에 따르면, 삶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처음이든 끝이든 ‘헤벨’이다. 해 아래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것’은 헤벨이다. 그것은 질병과 같고 바람 같은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스캔들론으로 인간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허무하다는 말이 아니다. 허무는 인간이 여전히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일말의 사치를 변주한 말일 수 있다. 그러나 헤벨은 아예 이해할 수 없음에 가깝다. 그것이 ‘실재(實在)’한다는 것이다. 추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인간은 모든 것을 헤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바람처럼 붙잡히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설명될 수 없으나 삶 깊숙이 파고드는 것이다.
하지만 코헬렛은 그 인간의 한계 상황인 헤벨의 담론 안에서도 지혜자의 고군분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는 문제의 해법을 찾아낸 지혜자의 결실이 아니라, 문제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지혜자의 순례 그 자체가 헤벨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글쓰기는 헤벨을 제거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헤벨 속에 머물며 새로운 지혜를 창출하는 분투에 가깝다.
코헬렛의 글쓰기, 나와 타자로서 나의 담론 경청
하여 글쓰기는 내 속에 간직된 사유를 꺼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넘어 타자인 나와 나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경청하는 일이다. 해석보다 번역이 우선인 이유는, 경청의 결과가 말을 알아듣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언제나 조용히 많은 말을 들려준다. 세계의 존재 이유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세계다움이다.
소리의 발원지에는 항상 마찰과 고통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다만 인간은 이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너무 빠르게 해석하려 한다. 가청 범위 안에서만 듣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그렇게 소리를 놓친다. 사라진 부모의 잔소리, 오래된 앨범에 쌓인 먼지들의 소리, 미술관의 어둠이 말하는 침묵의 소리, 늦은 밤 되돌아오는 자박자박한 발소리 같은 미세한 음향을 지나친다. 그런 소리의 흔적들은 설명보다 말해지지 못한 진실을 품고 있다. 그 진실은 거대한 사건을 넘어 삶의 잔향에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나의 글쓰기는 바로 그 잔향을 듣는 기술이어야 한다.
글쓰기에서 경청의 실천윤리 1: 세계 언어를 나의 언어로 치환하기
경청은 단순히 듣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재배열하는 치환의 단계로 나아간다. 치환이란 고착된 의미와 익숙한 관념을 다른 자리로 옮겨 놓음으로써, 그 안에 숨어 있던 새로운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오래된 앨범의 먼지는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사라진 소리를 불러오는 촉매제가 된다. 미술관의 침묵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라 상실 이후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이끄는 사유의 안내자가 된다. 이처럼 경청의 글쓰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평면 위에 나열하기보다 세계를 입체적으로 다시 배치하고, 지난날의 단어를 오늘 나의 언어로 바꿔낸다. 사소한 것 속에 감춰진 채 무시되는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낸다.
오늘날 글쓰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보편화되었고, 전문화되었다. 바카라의 출판이 가져온 급속한 발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만큼 뿌리도 얕아진 듯하다. 무한히 복제되어 글이 글을 낳는 데이터의 무력(武力)만 강해지는 듯하다. 직접 겪은 경험보다 검색의 요약에 덥석 방점을 찍어버린다. 내밀한 인간과 사물의 감정 교환보다 정해진 알고리즘이 제기하는 감정 언어에 자신을 방치한다.
데이터는 평균일 뿐, 한 인간의 삶이 가진 고유한 무늬를 읽어주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나와 무관한 어떤 이의 글을 끌어와 즉각적인 문장을 쏟아낼 때,
출처 없는 글이 뿜어내는 근거 없는 소리 앞에서 나의 글은 오랜 침묵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실천적 윤리는 세상이 규정한 보편적 문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고유한 형용사와 부사를 되찾아 단어를 치환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수많은 데이터가 명사와 동사를 제공하는 데 급급할 때, 나는 나의 상태를 세밀하게 끄집어내는 문장 요소를 발견해야 한다. 상실을 통계로 말하는 시대에, 부모님의 낡은 구두 뒷굽을 보면서 그리움의 구체적인 형태를 직접 빚어내야 한다. 외부의 소음을 걷어내고 내면의 미세한 신호에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이로써 경청은 부사와 형용사의 발견이 된다. 이를 통해 AI 앞에서도 자신을 데이터의 부속품이 아닌 자기 삶의 주권자로 바로 세울 수 있다.
글쓰기에서 경청의 실천윤리 2: 확장과 공유
글쓰기의 인간다움이 만들어내는 두 번째 실천은 확장이다. 모든 글쓰기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함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고립된 섬이 될 수 있다. 진정한 글쓰기는 자기만의 언어를 얻은 뒤, 그 언어를 다시 타인과 세계를 향해 열어 놓는 일이다. 플랫폼에 글을 남기는 일은 자신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를 자기 글에 담긴 사유의 강가로 초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글쓰기는 내가 천착하는 공공적 번역이자 그것의 실천이 된다. 공공적 번역이란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슬롯적 바카라임과 윤리의 언어로 확장하는 일이다. 한 사람의 상실은 단지 개인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고, 시대의 고통에 응답하는 언어가 된다. 바카라을 출판하는 것은 공공적 번역의 지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글쓰기 자체가 곧 이런 번역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는 나만의 섬을 만드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 섬과 타인의 대륙을 잇는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만이 타인의 언어를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 자기 슬픔을 통과한 사람만이 타인의 슬픔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자기 안으로 깊이 내려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일이다.
글쓰기에서 경청의 실천윤리 3: 개념을 자기 내면으로 심화하기
이렇게 확장된 글쓰기는 다시 자기와 타인의 삶을 동시에 심화시킬 수 있다. 심화란 추상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번역된 진실 앞에 자신을 세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존재론적 결단이다. 글쓰기는 경험하는 나와 바라보는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그 거리 속에서 삶을 다시 묻는다. 나는 무엇을 겪었는가. 그것은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가. 그 경험은 타인의 삶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제 어떤 언어로 살아갈 것인가.
페터 비에리의 글쓰기 철학은 바로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에리에게 인간은 자기 삶을 무작정 당하는 존재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삶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형성되지만, 인간은 자기 인식과 자기 결정의 과정을 통해 그 삶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삶을 스스로 이해하고,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물음은 글쓰기의 본질과 깊이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글쓰기는 자기 삶의 저자가 되려는 행위와 연동한다. 흩어진 경험을 자기 언어로 다시 엮고, 미처 이해하지 못한 감정을 문장 속에서 바라보며, 타인의 언어에 빼앗긴 삶을 다시 자기 목소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글쓰기는 자기기만을 걷어내는 느린 작업이며, 경험하는 나와 바라보는 나 사이에 거리를 만드는 사유의 장소다.
그러나 이 자기 결정은 세계의 타자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오만, 즉 인간다움의 상실을 경계한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수용하고, 세계 앞에서 자기 언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겸손이다. 결국 경청의 글쓰기는 세계를 소유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앞에 마주 서서 소리를 듣는다. 자기 결정의 글쓰기는 삶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욕구를 버리고, 들려오는 삶의 소리에 자기 목소리로 응답한다.
경청의 글쓰기와 어둠의 소리를 끌어안는 검은 안식의 철학
이러한 글쓰기의 윤리는 결국 내가 말하는 검은 안식의 철학과 만난다. 검은 안식이란 어둠을 제거한 뒤 얻는 평화가 아니다. 어둠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빛을 꺼뜨리지 않는 상태다. 고통을 억지로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고통이 삶 전체를 폐허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태도다. 그 어둠의 소리를 끝까지 들으려는 용기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완전히 치유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그 상처 곁에 오래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상실을 소유하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 흔적을 조용히 경청하는 일이다.
결국 글쓰기는 경청과 자기 결정, 그리고 공공적 번역이 만나는 자리다. 세계의 잔향을 듣고, 그 잔향을 자기 언어로 치환하며, 그 언어를 다시 타인의 삶을 향해 확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삶은 조금 더 깊어진다.
이처럼 글쓰기는 “글을 쓴다”가 아니라 “글을 만든다”에 가깝다. 창조주처럼 글이라는 피조물을 자기 형상을 담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서 ‘글은 나의 얼굴이다’라는 명제를 여전히 고수한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범람하는 정보의 바다 위에 자기만의 단독적인 영토를 세우고, 그곳에서 타인에게 닿는 신호를 발신하는 행위다. 그 영토는 비록 작고 외로울지라도,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 결정의 자리다. 그곳에서 비로소 인간은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자기 숨결이 담긴 진짜 문장을 만난다.
그러므로 나의 글쓰기에서 경청이란 세계를 정복하려는 도청 기술이 아니다. 나만의 정보를 독점하여 삶을 지배하려는 첩보전도 아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존재, 누구보다 자신의 미세한 숨결을 듣기 위해 자기 속도를 늦추는 존재론적 훈련이다. 또한 자기 삶을 남의 해석에 넘기지 않고, 자기 언어로 다시 살아내려는 존엄한 자기 결정이다.
가장 나다운 글은 나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글을 자기 삶으로 만들고, 자기 삶을 글로 호환하는 유일한 존재다. 완벽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도 글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저 설명되지 않는 자기 삶 앞에 오래 머물러 그 삶이 들려주는 초미세한 소리를 듣거나, 가청 범위를 넘어선 고주파를 들으려는 자기 인내에서 글은 생명을 갖는다.
그리고 그 인내가 마침내 자기 언어를 찾아낼 때, 글쓰기는 미물 같은 자기가 생을 경청한 끝에 일궈낸 최고 결정이 된다. 나아가 누구나 자기 글 안으로 초대받을 수 있는 공공적 번역이 된다. 그런 글을 만들어낸 사람은 검은 안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대 같은 삶의 작은 불빛으로 머물다, 조용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