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기 인식과 기다림이라는 희망이라는 헤벨 담론
과거는 여전히 살아 있다. 과거를 회상하기보다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충고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과거가 삶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거는 현재가 가장 탄탄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순식간에 나타나 현재의 가장 깊은 치부를 찌르며 되돌아온다. 코헬렛의 ‘헤벨 담론’(hebel discourse)은 과거가 현재를 찌르는 지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AI가 세계를 더 많이 설명하고, 더 빠르게 예측하며, 더 정교하게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이 시대에, 오래전 지혜자의 혜안은 오늘날 일상의 이야기 속에서 날카로운 질문으로 되살아난다.
1. 서론 — AI 시대, 지식은 늘었는데 지혜는 깊어졌는가
오늘날 AI는 거의 지식을 지배하는 신처럼 우리 앞에 있는 것 같다. 바벨탑이 언어를 통해 인간 욕망의 집요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면, AI는 지식과 글, 계산과 예측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AI를 세계에 등장시킨 인간은 이를 통해 세계를 더 많이 설명하고, 더 정확히 예측하며, 심지어 더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 듯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무 문제없어 보이던 어제의 사소한 무지가 오늘은 느닷없이 두려움의 씨앗처럼 자라나는 상황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 지식은 노력해서 천천히 얻는 것이 아니라, 관심만 있다면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불로소득의 수확물과 같다. 문제는 많이 알수록 더 지혜로워질 것 같았는데, 오히려 그 지혜로움은 쉽게 깊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식이 빠르게 증폭되는 자리에서 인간의 불안이 예기치 못하게 가중된다.
한편, AI의 등장은 권력의 원천도 조금씩 이동시키고 있다. 과거의 권력은 지식의 독점에서 나오곤 했다. 고대 서기관들은 그런 권력 기원의 중추였다. 하지만 오늘날 권력의 기원은 달라졌다. 권력 습득은 보편화되었고, 급기야 권력 중독의 시대가 되었다. 특히 지식의 배열과 조정, 접근과 해석의 능력에 따라 권력은 편향된다. 누가 더 많이 아는가 보다, 누가 더 빠르게 연결하고 더 정교하게 분류하며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가가 중요해진다. 이처럼 AI는 단순한 지적 함양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욕망을 구성하는 방식,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에 깊이 개입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이 글의 관심은 이러한 AI 자체의 능력, 특히 기술적 성능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에 있지 않다. 또한 그 기술의 양상이 얼마나 폭넓게 확장되었는지에도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하는 AI 기술은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인다.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AI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본질, 그 성격을 인간이 스스로 파악해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짐작하건대 AI가 파생시킨 담론은 지식의 확장이 인간을 어떻게,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시 말해 AI가 만들어내는 담론은 인간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2024년 10월 인간을 습격하듯 삶으로 들어온 AI는 어느새 우리 시대를 데이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끌어가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의 형식으로 앞당기며, 인간의 욕망을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목록으로 재배열해 준다. 인간이 개입하기도 전에 새로운 인식 체계의 등장을 알려준다. 이런 사건이 평범한 삶을 급격히 추동하고 있다.
2. 고대 지혜자 코헬렛의 헤벨 담론
나는 AI에서 발원한 담론의 성격을 좀 더 잘 이해해 보기 위해 고민하던 중, 고대 히브리어 지혜자인 코헬렛의 ‘헤벨’에 주목했다. 코헬렛의 사유가 AI 담론을 이해하는 데 유용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주변에서 AI의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가장 많이 쏟아내는 마음의 말이 “허무하다”, “부질없다”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AI가 어떤 점에서 헤벨이고, 이 헤벨의 상황에 대해 나는 어떤 지혜를 천착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고 답하는 데 어느 정도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주전 4세기의 지혜자가 지금 나의 삶을 찌르고 있다.
알려진 대로, 코헬렛의 전략적 용어인 ‘헤벨’은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새로운 개념이 소개되는 단어다. 이 연구들에 의하면 그 의미는 대체로 허무, 덧없음, 안개, 바람, 시간의 흐름, 부조리, 모호함 같은 사전적 의미의 미미한 변주들이다. 사실 그런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기도 하다. 그러나 코헬렛의 글 전체를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헤벨은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비극적인 감정만 담지 않았다는 점이 보인다. 그는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 듯하다. 이 세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의미를 고정하며 미래를 자기 손에 넣으려 할 때 피할 수 없는, 인식의 유한성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세계 역사를 허무하다고 평가하는 것에는 누구든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다. 태초 이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인간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려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설명 너머의 그 무엇인가로 인간의 지식을 압박했다. 다른 관점에서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을 자기 삶 속에서 예측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간은 숫자를 넘어 인간의 영역 밖에서 흘러오고 또 그곳으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인간은 세계의 의미 중 하나라도 붙잡아보려 했지만, 어느 의미 하나로 끝나지 않고 무한히 다른 개념으로 변주되고 있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코헬렛이 발견한 인식의 유한성으로서 헤벨은 오늘날 AI와 연관성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다행히 이런 문제의식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 학자가 있다. 나는 철학자 한병철이 정보 지배 슬롯를 분석한 연구에서 어느 정도 그 단서를 찾았다. 그의 저서 『정보의 지배』는 AI 지배 세계가 내재한 헤벨의 속성을 간파한다. 그는 오늘의 세계가 더는 전통적인 규율과 억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그보다는 정보, 데이터, 투명성, 최적화, 예측이 인간을 지배하는 주요한 방식이 되었음을 관찰한다.
3. AI의 지배-인포크라시의 시대
그는 이런 시대를 일컬어 ‘인포크라시(infocracy)’라고 명명했다. 이 말은 정보(information)와 민주정치 체제(democracy)의 합성어다. 이 신조어는 세계의 권력이 정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인포크라시는 인간을 강제로 침묵시키기보다, 오히려 끊임없이 말하게 하고 기록하게 하며 반응하고 선택하게 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 변환되고, 그 데이터는 다시 인간을 예측하고 조정하는 체계 안으로 스며든다. 결국 데이터는 종교적 신처럼, 혹은 정치적 빅파더처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으로 더욱 견고히 자리 잡는다.
물론 이러한 정보 체계를 곧바로 야훼의 전지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의 기술적 체계가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하고, 예측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전지성에 가까운 힘을 보인다고 말할 수는 있다. 중요한 문제는 이처럼 우리 의식 안에서 AI의 전능성을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데이터의 축적과 계산에서 인간이 끝내 따라갈 수 없는 힘이 계속 생성되고 진화하며 표출되기 때문일 것이다. AI는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을 떠나 스스로 자기 세계를 구축할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AI가 드러내는 힘은 창조주가 보여주는 지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그 힘의 용도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야훼의 힘은 세계를 천천히 열어 보인다. 드러나지 않아야 할 세계를 여전히 닫아둔 채, 인간의 인식 속도에 발을 맞춘다. 그러나 AI는 자기 속도에 따라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세계를 빠르게 열어젖히려 한다. 이런 성급함은 세계를 계산할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할 위험을 재촉하는 듯하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코헬렛의 헤벨 개념이 인공지능 시대의 담론을 이해하는 한 처방이 되리라 생각한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세계가 더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식 한계가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AI는 무엇이 질서인지, 어디가 올바른 방향인지 무수히 많은 길을 지체 없이 열어주지만, 정작 인간은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제 두 발을 머뭇거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바로 AI가 헤벨로 이해되는 나의 이유다.
4. AI 시대의 헤벨 특징: 선명함 속에 깃든 불투명성
생각해 보면, 헤벨로서의 AI 세계는 기본적으로 명확한 답변 속에 불투명한 현실이 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데이터가 축적되고 공개될수록 의미는 깊어지지 않는다. 제시된 의미는 끝없이 표면으로만 넓어진다.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고, 설령 드러난 의미라도 나타나자마자 곧 이어지는 새로운 정보에 의해 곧장 밀려난다. 미래를 예측하여 현재를 수정해 보려는 시도는 너무 많이 제시된 미래 전망 탓에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또한 그 미래는 오기도 전에 새로운 미래로 대체되고, 가능성은 현실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흩어진다. 설명은 빠르게 공급되지만,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 새로운 분석이 뒤덮어 버린다. 질문이 무르익기 전에 답변이 먼저 도착하고, 사유가 길을 찾기도 전에 새로운 개념이 길을 막아 세운다.
이처럼 AI 시대는 명쾌함 뒤에 불투명함을 동반한다. 인간이 지식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도 전에 휘발해 버리는 바람에 그 지식의 온전한 속성을 끝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빠른 정보 앞에서 스스로 사유할 시간을 잃어버리는 ‘인지의 시간차’에 스스로 갇혀 버린다. 그리하여 어떤 답변도 지혜로움을 보장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지혜는 정보를 소유하는 데서 생기지 않고, 수많은 현상의 관찰과 분석이라는 해체 과정을 거쳐 창발 한다. 그것은 제 몸 안에 총체적으로 수용한 분별력이다. 이해할 수 없음 앞에 오래 머물며 관찰하고, 상황이 달라지는 현상들을 기다리며 천천히 침전되는 무형의 지식이다.
오래전 지혜자 코헬렛에 따르면, 헤벨은 인지부조화와 같은 현상이다. 그 역시 자신이 겪은 당대의 삶을 스스로 관찰하면서 자기 삶을 끝내 헤벨로 규정했다. 그런데 그가 헤벨로 규정한 세계는 그저 ‘허무하다, 살 가치가 없다’라는 비관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연속’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특히 그것이 창조주의 영역이 미치는 현실이라면 그런 이해 불가성은 더더욱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삶을 지배해 온 당대 지혜의 무력감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전 생애를 통해 시도한 관찰과 경험, 분석에 자기비판을 곁들여 자기 시대를 헤벨이라고 잠정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 결론에는 한 가지 숨은 의미가 내장되어 있었다. 그 헤벨이 더는 ‘허무, 무가치함, 부조리, 모호함’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 불가한 세계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속에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가 결론 내린 헤벨은 그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오히려 신의 창조 의지를 인간이 수용하는 통로가 되었다. 신이 감춰둔 세계와 인간의 이해 불가 사이를 소통하게 만드는 다리처럼 기능했다. 그는 이런 의미를 어디서도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자기 이야기 구조 속에 담아냈다. 다시 말해, 그의 글쓰기 전략 속에 헤벨을 ‘헤벨 담론’으로 읽도록 장치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헤벨을 ‘헤벨 담론’ 안에서 이해했다. 그 결과, 헤벨의 시대는 허무의 역사로 끝나지 않는다. 무작정 비관하거나 부정해야 할 삶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헤벨 담론 안에서의 헤벨은 새로운 지혜이다. 어느 학자가 말한 대로 이는 ‘잠정적 지혜’다. 다시 말해, 헤벨이라 규정할 만한 사건과 이야기 속에서도 코헬렛은 헤벨을 하나의 담론과 연관 지어 다시 관찰한다. 마침내 새로운 지혜를 창발 하는 길을 찾아낸다. 단지 "고난도 유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고난 자체가 유익하다는 것은 그 고난이 만들어내는 사건과 이야기를 어떻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코헬렛의 관점이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소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I 시대가 인간에게 21세기형 헤벨을 제시한다면, 이제 코헬렛처럼 그 헤벨을 하나의 헤벨 담론으로 읽어내는 능력, 즉 현실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1세기는 다시 헤벨의 시대다. 앞서 본 대로 그 바탕에는 AI가 있다. AI의 등장은 지식의 힘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지식의 불안정성과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앎이 삶의 의미를 완전히 보증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더 빠르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설명이 존재의 깊이를 모두 열어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더 정교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지만, 미래는 여전히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옛 헤벨이 새로운 옷을 입고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헤벨의 시대를 코헬렛처럼 헤벨 담론으로 읽어낼 지혜가 필요하다. 그가 헤벨 담론 안에서 천착한 헤벨은 그저 낡은 탄식이 아니라, 당대의 삶을 새로운 길로 이끌어 간 지혜자의 희망을 담은 탄원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그렇다면 기대도 생긴다. 코헬렛의 지혜를 빌리자면, 이 시대의 헤벨 담론은 이렇게 구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AI가 세계를 더 많이 설명하고, 더 빠르게 예측하며, 더 정교하게 인간의 욕망을 배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헤벨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 헤벨 안에 내재한 그 희망이란 무엇인가?
5. 헤벨에서 헤벨 담론으로 — 허무에 담긴 인식론적 전환
헤벨 담론 안에서 헤벨은 인간을 새롭게 조명한다. 이성과 감성을 섭렵해 가는 인간은 세계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전체를 한꺼번에 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끝을 자기 손에 쥐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 능력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세계의 속살에 닿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끝없이 지혜를 추구하려 한다. 하지만 지혜는 여전히 인간에게 완전히 열리지 않는다. 찾아도, 또 찾아도 지혜는 언제나 조금 물러서 있는 듯하다. 열릴 듯하면서도 끝내 다 열리지 않는 문처럼, 무지의 문을 열고 들어서서 찾아낸 앎 앞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다시 등장한다.
코헬렛 자신도 스스로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 결과는 괴로움으로 끝났다. 자기 삶의 경험과 관찰을 통해 길어 올린 것들이 결국 자신을 더욱 힘겹게 한 것이다. 코헬렛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간 역시 종종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결과를 통제할 수 있으며, 시간의 흐름까지 어느 정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 인간은 사건을 경험하지만 그 사건의 전체 의미를 즉시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때’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때가 어떻게 열리고 닫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코헬렛에 따르면,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야훼의 감춰진 통치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유한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인간이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조건에서 발생한다.
코헬렛은 세계가 헤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삶 전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헤벨은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인간의 용어이지만, 코헬렛이 보여준 것처럼 헤벨에 근거한 ‘헤벨 담론’에 의한다면, 그 이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헤벨은 허무의 선언이지만, 헤벨 담론 안에서는 인간의 자리와 삶의 방식을 다시 묻는 과정을 통해 헤벨 너머를 조망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벨 담론 안에서 헤벨은 새롭게 정의된다. 즉 헤벨의 의미는 단정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무엇이다. 이에 따라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가 있는 존재”가 된다. 의미를 확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흐름을 관찰하고 추론하며 탐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만물의 중심에 군림하는 절대적 주체가 아니라, 경계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지혜 추구자에 가깝다. 그 지혜 추구의 방식은 일어난 사건, 일어나고 있는 사건, 일어날 사건을 자신의 세계와 그 너머를 토대로 관찰하는 일이다. 그 관찰은 헤벨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그 헤벨 너머의 세계를 향해 시선을 두고 머물며, 천천히 바라보고 오래 기다리는 일을 감수한다.
이 점에서 AI 시대가 헤벨이라면, 이 시대의 특징은 인간의 유한성이다. 기계의 무한한 지식 확장에 비해 인간이 가진 인식 능력은 늘 한계에 부딪힌다. AI는 그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유한한 능력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 앞에서 더 이상 유일하고 압도적인 인식 주체처럼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생산한 지식을 총합한 AI가 때로 인간보다 빠르게 답하고, 인간이 남긴 데이터는 AI를 통해 다시 인간을 해석하며, 인간이 설계한 체계는 인간의 판단 일부를 대신 수행한다.
이것이 곧바로 인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이 자기 앎을 절대화해 온 방식에는 균열이 생긴다. 헤벨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 앞에서 다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리번거리게 된다. AI 시대를 헤벨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간이 지식의 변방으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AI의 세계, 이것 또한 헤벨이며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코헬렛이 그랬던 것처럼 이 새로운 헤벨의 시대가 보여주는 새로운 길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재이해이다. 헤벨로서의 AI 시대는 인간이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지워주는 장치라기보다 인간의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는 거울일 수 있다. 인간의 몰락을 알리는 기계적 징표로만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다시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인간에게는 여전히 기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자리가 남아 있다. 그것은 바카라임의 자리이며, 기다림의 자리이고, 희망의 자리이다. 인간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알 수 없음 속에서도 선택하고, 견디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것을 망각하지 않고 AI 시대를 헤벨 담론으로 인식한다면 유의미한 사유를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은 기다리지 않는 AI 앞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세계 앞에 머물러 그 말을 오래 기다리며 듣는 태도를 간직한 거의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중심에서 경계로 밀려났다고만 말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본래부터 중심을 완전히 소유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없었으며, 세계 안에 맡겨진 존재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주어진 세계를 관찰하고 돌보며 그 안에서 지혜를 구하는 존재로 부름 받았다. 인간이 이 경계인의 자의식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자리는 언제나 지혜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코헬렛은 자기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코헬렛은 세계를 헤벨로 인식했지만, 헤벨 담론이라는 자기 방법론을 찾아 주어진 삶을 인내하며 살아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자기 글에 담았다. 그는 그 글 속에서 부족한 인식 아래서도 창조주를 기억하려는 인간의 지혜 추구를 더 분명히 북돋았다. 인간은 모든 때를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때를 살아야 한다. 인간은 선과 악의 최종 판별을 자기 손에 쥐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야훼 앞에서 자기 삶을 살고 판단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는 인간이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느릿한 삶의 방식으로 야훼의 감춰진 질서와 인간의 유한성이 함께 드러나는 지혜의 장소이다.
요컨대 이것이 헤벨에서 헤벨 담론으로 나아가면서 획득한 지혜이다. AI 시대, 헤벨이 인간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안개이며 붙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사라지는 바람이라면, 이 시대의 헤벨 담론은 그 안개와 바람 앞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인간’이 자기 자리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사유의 버팀목을 제공한다. AI 시대는 이 오래된 통찰로 다시 그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 하여 인간은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나는 무엇을 기다릴 수 있는가. 그리고 알 수 없는 세계 앞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며 어떤 지혜를 구하며 살아갈 것인가.
6. 정보의 지배와 헤벨 — 기다림을 방해하는 것들: “데이터는 의미를 구원하지 못한다”
앞서 살핀 한병철의 사유에 따르면, 오늘날 디지털 세계는 정보 지배의 시대다. 이 시대에 인간이 표현하는 모든 것은 계산 가능한 흔적으로 변환된다. 자유로운 선택은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다시 선택의 가능성을 배열한다. 이 순환 속에서 인간은 더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유는 점점 더 예측 가능한 행위의 형식으로 포획된다. 정보 자본주의의 지배는 자유를 억압하기보다, 자유를 활용하여 자유의 방향을 조정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새로운 착시에 사로잡힌다. AI가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곧 인간의 몰락일 수 있다는 생각,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이미 눈앞에 다가왔다는 불안, 설명 가능성이 확장되면 존재의 불투명성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서로 뒤섞인다. 더 많은 데이터는 다시 더 많은 데이터를 요구하고, 하나의 예측은 또 다른 불확실성을 낳는다. 데이터는 의미를 담을 수 있지만, 데이터 자체가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도구이며 흔적이며, 때로는 바람처럼 흩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더 높은 예측력이 곧 더 깊은 지혜를 뜻하지도 않는다. 예측은 빨라질 수 있지만, 그 예측을 해석하고 바카라임지는 인간의 시간은 오히려 가난해질 수 있다. AI는 가능한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 답을 견디고 선택하며 삶으로 바카라임지는 일은 결국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지식은 저장고에서 꺼내 쓰는 물건처럼 취급될 수 있지만, 지혜는 그렇게 인출되지 않는다. 지혜는 기다림과 관찰, 실패와 반복의 시간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인간에게 남는다.
빠른 답변이 올바른 판단을 보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딥페이크가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이듯이, 즉각적인 설명도 때로는 가장 정교한 착각이 될 수 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의미 추구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빨리 소거될 수 있다. 말이 많아질수록 말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가능한 미래가 많아질수록 판단은 더 모호해질 수 있다. 답변이 즉시 주어질수록 삶은 해결되기보다, 질문을 빼앗기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결국 헤벨 담론 아래서 AI 시대 정보가 지배하는 세계는, 세계를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빛은 언제나 새로운 그림자를 함께 만든다는 양면성이 포착된다. AI가 하나의 지식을 빠르게 제공할 때,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무지를 얻게 된다. 하나의 설명은 또 다른 설명의 필요를 낳고, 하나의 예측은 또 다른 불확실성을 생산한다. 지식은 누적되지만 존재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AI 시대의 헤벨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다. 그것은 '기다릴 수 없음'이다.
이처럼 AI가 헤벨인 이유는 그것이 무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빠른 속도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너무 빠르고, 너무 풍부하며, 너무 설명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무가치하다는 착각을 일깨운다. 기다림의 끝에서 비로소 열리는 소망의 실체를 흐리게 만든다. 인간에게 지식이 기다림 끝에 얻는 결실이 아니라, 이미 보관된 것을 즉시 찾아내는 검색 결과처럼 보이게 한다. 지식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고, 느리게 묻는 사람은 뒤처진 사람처럼 비친다. 그러나 기다림이 사라지면 인간은 자기 지식과 자기 무지가 동시에 증폭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어렵다. 기다림은 E. 블로흐의 말처럼 몸이 기우는 '희망'을 상징한다.
여기서 AI 시대의 또 다른 결핍이 드러난다. 그것은 희망의 부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는 희망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소리 없이 소거한다. AI는 희망을 가능성이라는 수치로 대체한다. 다시 말해 희망을 계산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세계는 숫자로 확정되지 않는다. 자기 몸을 완전히 맡기는 희망은 숫자 너머에서 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희망은 정보의 산출물이 아니다. 희망은 유한한 인간이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자신을 열어두는 모험과 자기 분투의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다. 희망은 확률 0%의 상황에서도 확실히 올 것을 향해 마음을 쏟아붓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의 방향성이다.
그러므로 AI 시대를 헤벨 담론으로 재구성하면, 이때의 헤벨은 두 가지 점을 일깨운다. 하나는 '오래 참는 인간'에 대한 재인식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여전히 '희망하는 존재'라는 자기 이해이다. 인간은 알 수 없음 속에서도 희망하고, 불확실성 속에서도 기다리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기 삶을 기울일 수 있다. 보잘것없어도 희망할 수 있다면, 그는 창조주의 감춰진 세계를 향해 지혜를 구하는 존재가 분명하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나 기다리며 걸어가는 순례자의 후예인 것이다.
요컨대 AI 시대를 헤벨 담론으로 조망한다면, 그 헤벨로 인해 인간은 희망에 관해 물을 수 있다.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어디로 가는가? 이 지식은 내 몸을 어느 방향으로 기울게 하는가? 나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여전히 두 발로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희망이 부재한 AI에게서 나의 희망을 빠르게 찾아내려 하는가?
오래전 코헬렛은 이런 고민을 자기 글쓰기 안에 담았다. 이제 나는 그가 남긴 전도서 5장 1~7절에서 헤벨 담론을 인식하고 지혜를 찾아내는 그의 글쓰기를 고찰해 보려 한다. 특히 그의 글쓰기는 ‘공공적 번역’의 한 예를 잘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는 많은 말과 많은 꿈, 그리고 많은 ‘헤벨들’이 뒤엉킨 자리를 재구성하여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현재화해 준다.
7. 전도서 5장 1–7절 — 많은 말, 많은 꿈, 많은 헤벨들
전도서 5장 1~7절은 전도서 전체에서 다소 이질적이다. 무슨 이유인지 코헬렛은 앞선 이야기들과 달리 성전, 말, 서원, 꿈, 그리고 야훼와 인간의 거리라는 주제를 하나의 긴장 속에 묶어낸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코헬렛이 이 단락에서 복수형인 “헤벨림(hebelim)”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단수형 헤벨이 허무성, 곧 의미의 휘발성을 가리킨다면, 복수형 헤벨림은 그 휘발성이 증폭되고 중첩되어 실체를 더 깊이 가려버리는 상태를 형상화한다. 헤벨의 관점에서 이 현상은 야훼 앞에서 숱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관찰된다.
한편, 그의 언어가 이질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은 그가 슬롯적 언어로부터 종교적 언어로 방향을 돌려 그 현상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장면은 일상에서 성전으로 옮겨간다. 막 성전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거기에 있다. 코헬렛은 그를 향해 권면한다. “발을 조심하라.” 그런데 코헬렛은 왜 갑자기 이런 경고성 권면을 실제 대화처럼 꺼냈을까.
우선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한 예배 예절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성전으로 향하는 발, 말로 야훼를 설득하려는 입, 서원으로 미래를 고정하려는 욕망 등은 모두 경건의 이름으로 불확실성을 관리하려는 인간의 깊은 충동을 향한 경고로 들린다.
코헬렛은 그 틈에서 야훼와 인간의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야훼는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 어쩌면 코헬렛은 한계 상황 같은 운명적 거리감을 통해 인간의 절망감을 극대화하려 했을지 모른다. 인간은 말로 하늘을 자기 삶으로 끌어당기려 하지만, 야훼는 다가오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 안에 갇히지도 않는다.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개역개정)
2 하나님 앞에서 말을 꺼내기 위해
너의 입을 함부로 하지 마라, 또한 너의 마음을 서두르지 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너는 땅 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의 말들을 조금만 할 것이다. (개인번역)
인간은 서원이라는 무기로 야훼로부터 오는 미래를 붙잡아 두려 하지만, 야훼는 그 인간의 입술을 원천 봉쇄한다. 인간은 꿈으로 가능성을 소유하려 하지만, 야훼는 그 꿈마저 깨뜨린다. 꿈은 깨어나는 순간 스스로 흩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단락의 헤벨이 감지된다. 인간의 다가옴을 막아 세우려는 야훼의 의지다. 인간은 그 앞에서 더 많이 말하려 한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할수록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을 빼앗긴다. 인간이 여전히 땅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만 더 깊이 폭로될 뿐이다. 이것이 헤벨이다. 인간을 아프게 하는 질병이다.
여기서 코헬렛이 겨냥하는 것은 종교적 언어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미래와 감춰진 희망을 독점하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은 말로 야훼를 움직이고, 서원으로 시간을 고정하며, 꿈으로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전통 지혜의 언어마저 자기 확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말을 특권처럼 활용했다. 그는 신에게 서원하며 말할 수 있고, 자기 꿈을 획득하기 위해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헤벨이다.
한편 헤벨이라는 관점은 코헬렛이 이 말을 인간의 욕망 해결을 향한 집착으로 이해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그 욕망을 일축한다. 이 상황에서 코헬렛은 ‘헤벨들’이라는 복수형을 언급한다. 헤벨이 아니라 헤벨들이다. 이는 헤벨이 중첩되고 증폭되어, 인간의 입술과 욕망 사이에서 실체를 가려버리는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헤벨은 그저 한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많은 말과 숱한 꿈에 모두 대응하는 복합적인 언어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헤벨들’은 오늘날 AI 시대를 다시 이해하는 동기어(Leitwort)다. 오늘날 헤벨은 단일하지 않고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말 대신 프롬프트를 입력한다. 꿈 대신 시뮬레이션을 생성한다. 서원 대신 예측 모델을 세운다. 성전 대신 플랫폼 앞에 선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어떤 길이 최적의 길인가? 어떤 말이 가장 정확한 말인가? 이에 대해 AI는 즉각 답한다. 그러나 바로 그 즉각성 안에서 인간은 다시 의구심을 품는다. 이 답변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이 예측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이 의미는 다음 의미에 의해 얼마나 빨리 폐기될 것인가?
답변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많은 가능성 속에서 길을 잃는다. 의미는 생성되지만, 그 의미는 곧 이어지는 다른 의미에 의해 깨진다. 말은 넘치지만 말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꿈은 증식하지만, 그 꿈들은 잠에서 깨어난 뒤 사라지는 수많은 꿈처럼 흩어진다. 설명은 풍성해지지만 삶은 반드시 깊어지지 않는다. 정보는 밀려오지만, 지혜는 오히려 뒤로 물러난다.
이 지점에서 AI의 기이한 현상 하나를 주목해야 한다. 바로 AI의 환각(Hallucination)이다. AI의 환각은 단순히 정보가 부족해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보의 과잉, 검증되지 않은 연결, 실체에 뿌리내리지 못한 데이터의 조합 속에서도 발생한다. 데이터들이 서로를 참조하며 가짜 진실을 직조해 내는 현상이다. 이런 방식으로 AI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역사와 논리를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출력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오류에 그치지 않는다. 헤벨 담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코헬렛이 경고한 헤벨림, 곧 헛된 것들이 중첩되어 실체를 가려버리는 혼돈의 디지털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코헬렛도 인간의 환각을 일깨웠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난다”라고 경고한 것이다. 알다시피 여기서 꿈은 단순한 수면 중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닿지 못한 채 부풀어 오르는 인간 욕망의 형상이다. 야훼의 언어를 쓰지만 전혀 이질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AI의 환각과 닮았다. 기다림과 관찰을 삭제한 채 즉각적인 답변만을 인출하려는 인간의 인식론적 조급함이, 기계가 쏟아내는 거짓처럼 야훼 앞에서 거짓 꿈을 꾸게 만든다.
결국 환각 현상은 정당한 의미의 풍요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과잉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왜곡, 즉 ‘어리석은 자의 소리’를 의미한다. 데이터가 증폭될수록 진실의 밀도는 오히려 희박해질 수 있고, 인간은 자신이 입력한 프롬프트의 환각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킬 수 있다. 코헬렛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말이 많아질수록 꿈이 많아지고, 꿈이 많아질수록 하늘과 땅의 거리는 무시된다. 그 모든 정교한 환각들이 결국 헤벨들이다.
그래서 코헬렛의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성전에 들어갈 때 너의 발을 조심하라.” 이제 이것은 헤벨 시대를 살아가는 자의 삶의 윤리다. 단순히 신앙 의식의 경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이는 프롬프트 앞에 선 인간을 향한 윤리다. 의미를 과잉 생산하려는 전진을 멈추고, 질문의 속도를 늦추라는 요청이다. 많이 말하지 말고, 급히 서원하지 말며, 미래를 점유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야훼는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이다.
이 냉정한 거리 두기는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헤벨의 늪에서 건져내어 자기 자리에 다시 서도록 안내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자유의 도구다. 인간이 하늘을 소유하려 할 때 헤벨은 증폭된다. 인간이 땅에 선 자기 자리를 기억할 때 지혜는 시작된다. 실체 없는 데이터의 증식 속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단지 더 정확한 답변이 아니다.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거리 감각’이다. 야훼는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감각. 그 거리 안에서 비로소 환각의 안개는 걷히고, 헤벨들은 헤벨 담론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다. 헛된 꿈이 사라질 때 인간은 비로소 희망한다.
8. 야훼의 비가시성과 인간의 자리 — 희망하는 존재
헤벨들을 헤벨 담론으로 옮기면, 이제 헤벨의 중의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헤벨은 인간을 향한 야훼의 경고성 권면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경고는 인간에게 새로운 자의식을 작동시킨다. 코헬렛이 시종 강조했던 것처럼, 중요한 것은 야훼의 통치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훼는 ‘올람(Olam, 영원)’ 속에 자신의 의지를 봉인해 버렸다. 인간에게 전체를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 안에 살지만, 세계의 전부를 소유하지 못하며, 시간을 통과하지만, 시간의 시작과 끝을 자기 손에 쥐지 못한다.
그런데 이 비가시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전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혜를 추구하도록 견인하는 장치다. 인간은 모든 것을 볼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세계 앞에서 멈추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제한이 인간을 절망으로만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희망을 오래 관찰하는 지혜의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문제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지식을 농축하여 저장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AI를 도구 삼아 지혜 추구를 위해 스스로 기다리기를 포기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인간이 AI 앞에서 희망이라는 오랜 기다림을 먼저 놓아버리는 데 있는 것이다. AI의 제안을 들은 뒤 그것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태도는 신의 침묵을 기다리지 않고, 세계의 비가시성을 견디지 않으며, 미래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헤벨 담론에 근거하면 인간은 기다림의 속성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 쏟아진 지식의 덩어리를 자기 손으로 일일이 해체하여 분해하고 다시 결합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야훼의 감춰진 희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자의식을 다시 자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며, 모든 지식을 소유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다. 인간은 가려진 것 앞에서 기다리고, 주어진 것 안에서 관찰하며,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를 향해 희망하는 존재라는 정체성을 다시금 명확히 할 수 있다.
요컨대, 침묵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인 답변만을 원하며, 곧바로 생성되는 답변과 가능한 미래, 최적의 선택과 즉각적인 의미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코헬렛은 다시 묻는다. 그 모든 답변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땅에 있지 않은가. 그 모든 정보 이후에도 야훼는 여전히 하늘에 있지 않은가. 그 모든 생성 이후에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헤벨의 안갯속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인간은 여전히 오래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이처럼 AI 시대를 헤벨 담론으로 읽을 때, 그 헤벨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되묻게 한다. 그리하여 헤벨 담론은 이해 불가능한 시대, 모든 지식이 주어져도 여전히 인식의 유한함을 넘어설 수 없는 시대에도 인간이 여전히 '희망하는 존재'라는 하늘의 지혜를 일깨워준다. 코헬렛의 글쓰기는 이런 지혜를 현실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시 들려주고 있다.
9. 향유와 침묵 — 헤벨의 늪에서 피어나는 소박한 저항
앞서 본 대로, 헤벨 담론에 근거할 때, AI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존재한다는 것이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희망하는 인간이다. 그는 이런 희망을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더욱 명확히 들려준다.
이 희망에 대한 코헬렛의 해설은 놀라울 만큼 소박하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누리며, 자기에게 주어진 몫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헤벨 상황의 회피가 아니라 헤벨 아래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한 저항이다. 왜냐하면 향유는 세계를 소유하는 데서 오지 않고 그것을 현재 누리는 행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향유는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다 쓰는 일이 아니다. 향유는 현재다. 전체를 모두 이해한 뒤에야 겨우 시작되는 삶도 아니다. 오히려 향유는 이해할 수 없음 속에서도 오늘의 식탁을 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직 모든 의미가 해명되지 않았더라도, 아직 내일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더라도, 인간은 오늘 주어진 빵과 포도주, 노동과 사랑, 관계와 숨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 점에서 코헬렛의 향유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헤벨을 모르는 자의 가벼운 즐거움이 아니라, 헤벨을 아는 자가 이해 불가한 삶을 대하는 깊은 긍정이다. 세계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의 삶을 버리지 않는 희망의 태도이다. 인간이 모든 때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때를 살아내는 기다림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코헬렛이 말하는 먹고 마심은 단순히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한계를 인정한 자리에서 야훼가 허락한 몫을 받는 행위이다. 향유는 소유의 언어가 아니라 수용이라는 지혜의 언어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전도서 9장 9절과 5장 1~7절은 멀리 떨어진 말이 아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는 코헬렛의 분석은 5장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말과 꿈을 줄이고, 의미를 과잉 생산하려는 욕망을 제한하라는 것은 그 제한 속에서 삶을 즐기라는 말과 연동한다. 이 둘은 상보적인 구절이다. 이 둘을 함께 읽을 때 침묵 없는 향유는 소비가 되고, 향유 없는 침묵은 체념이 된다. 코헬렛의 지혜는 말이 줄어든 자리에서 식사가 깊어지고, 꿈이 줄어든 자리에서 오늘의 삶이 선명해진다. 서원을 서두르지 않는 자리에서 인간은 오히려 자기 몫을 더 조용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AI 시대가 초래한 헤벨 상황은 단순히 AI 사용을 줄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 해결은 인간이 세계 앞에 자신을 세우는 태도를 다시 배우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너무 빨리 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을 곧바로 해석 가능한 정보로 만들지 않는 것, 불확실한 미래를 가능한 선택지의 목록으로만 다루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다림을 무능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코헬렛의 침묵은 말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말이 자기 자리를 되찾게 하는 절제이다. 침묵은 질문을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질문이 성숙하도록 허락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코헬렛이 취한 지혜로운 행동인 글쓰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도서 곳곳에서 코헬렛은 헤벨 사이사이에 ‘향유’의 지혜를 끼워 넣는다. 그리하여 헤벨이 우세한 현실에서 백합화처럼 피어나는 ‘즐거운 생’에 대한 찬가가 들어있다.
10. 공공적 번역과 관찰적 글쓰기 — 묵시적 현재를 걷는 사유의 순례
헤벨 담론에 근거하면, AI 시대를 주도하는 변화는 글쓰기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카라이 아니다. 글쓰기 자체의 감각을 바꾸는 것이다. AI 시대의 글쓰기는 빠른 결론, 정돈된 요약, 즉각적인 설명, 최적화된 문장을 권장한다. 쓰지 않아도 풍성한 글들이 쏟아진다. 이것은 한편으로 유용하다. 우리는 그 유용성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유용성이 만들어내는 한계 때문에 인간의 글쓰기는 자기 길을 다시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글쓰기가 AI보다 더 빠른 문장을 생산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경쟁일 수 있다. 인간에게 남겨진 글쓰기의 자리는 속도가 아니라 깊이이며, 즉시성이 아니라 머무름이며, 완결된 답변이 아니라 질문을 견디는 힘이다. 길고 오래 이어지는 글쓰기다.
내가 보기에 헤벨 담론의 글쓰기는 결론을 느릿하게 미루고, 과정을 세밀하게 미분하며, 사유를 순례길처럼 걷는 수행이다. 그것은 글을, 순례길을 걷듯이 천천히 오래 관찰하며 쓰는 일이다. 때로는 마지막 문장을 독자에게 남겨두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닫아버리는 글이 아니라,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남겨진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빠르게 확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다시 보게 하는 언어이다. 이 글쓰기는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이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지를 묻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러한 글쓰기를 공공적 번역이며 동시에 공공적 글쓰기라고 부른다. 나의 관점에서 코헬렛은 전적으로 공공적 번역을 구현한다. 이때 공공적 번역은 단순히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헤벨의 세계에서 사유를 사유 안에만 가두지 않고, 공동의 삶과 일상의 언어로 옮겨놓는 글쓰기이다. 야훼와 인간 사이의 거리, 지혜와 삶 사이의 거리, 고대 텍스트와 AI 시대 사이의 거리를 성급히 지우지 않으면서도, 코헬렛의 언어 속을 누구나 자기 언어로 걸어갈 수 있는 언어의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해석이 아니다. 의미를 풀어 헤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번역이다. 우리에게도 공공적 번역은 주전 4세기의 언어를 오늘 나와 우리 언어로 옮겨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적 번역은 텍스트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너를 텍스트 앞으로 이끌어주고, 우리 스스로 텍스트 앞에서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마침내 야훼 앞에서 자신의 자리를 묻게 하는 실천적 글쓰기이다.
나는 이 글쓰기를 다음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공공적 글쓰기는 먼저 치환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치환은 고대의 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그대로 옮겨놓는 일이다. 이때 치환은 언어의 바꿈이 아니라 자리의 옮김에 가깝다. 코헬렛의 “많은 말”은 오늘의 프롬프트로, “많은 꿈”은 시뮬레이션으로, “서원”은 예측 모델로, “성전”은 플랫폼으로 치환된다. 이 치환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지혜가 현재의 한복판을 찌르게 하는 방식이다. 고대의 말이 오늘의 기술 언어와 만날 때, 독자는 낡은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현재를 다시 읽게 된다. 여기서 글쓰기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얻는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말속에 담긴 그림이다. 현재가 감추고 있는 욕망과 불안을 그려내듯 드러내는 능력이다. 공공적 글쓰기는 AI 시대가 스스로를 가장 탄탄한 지식의 시대라고 믿는 순간, 그 믿음 아래 숨어 있는 헤벨을 그려낸다.
다음은 확장이다. 확장은 한 개인의 사유를 공동의 질문으로 넓히는 일이다. 슬롯정치적 영역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헤벨을 깨닫는 일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그것은 사적인 탄식이 된다. 공공적 글쓰기는 그 탄식을 공동의 언어로 확장한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무엇을 너무 빨리 안다고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꾼다. “나는 왜 불안한가”라는 질문을 “우리 시대는 왜 즉각적인 답변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넓힌다. 이때 글쓰기는 대상을 낯설게 하기 시작한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던 AI, 데이터, 설명, 효율, 최적화가 낯선 얼굴로 독자 앞에 선다. 낯설게 하기는 사물을 이상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함 속에 감춰진 지배와 욕망을 다시 보게 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은 심화이다. 심화는 치환되고 확장된 번역을 다시 나의 삶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AI가 빠른 답을 준다는 현상은 단순한 기술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기다림을 잃어버리고, 침묵을 견디지 못하며, 희망을 즉각적인 결과로 인출하려는 시대적 징후이다. 공공적 글쓰기는 이 표면의 현상을 깊이 파고든다. 그래서 AI의 유용성 아래 놓인 희망의 부재, 정보의 풍요 아래 놓인 지혜의 빈곤, 설명의 과잉 아래 놓인 존재의 비가시성을 드러낸다. 이 심화의 과정에서 글쓰기는 내 삶에 묵시적 현재를 구성한다. 묵시적 현재란 먼 미래의 종말만을 가리키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심판의 순간이다. AI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현재가, 인간의 유한성과 야훼와의 거리를 폭로하는 묵시적 시간이 되는 것이다. 코헬렛은 헤벨의 상황에서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행복을 자기화한다.
한편, 이 세 방식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치환은 과거를 현재로 데려오고, 확장은 개인의 질문을 공동의 질문으로 열며, 심화는 표면의 현상을 신학적 자리로 밀고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공공적 글쓰기는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현재의 오만을 찌르고, 낯설게 하기로 익숙한 세계를 다시 보게 하며, 서사적 자아로 글쓴이 자신을 사유의 현장 안에 세우고, 묵시적 현재로 지금 이 순간을 야훼 앞에서 다시 읽게 한다. 여기서 서사적 자아는 중요하다. 공공적 글쓰기는 무인칭의 차가운 해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모든 것을 아는 해설자처럼 뒤로 물러나 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몸과 자기 질문을 글 속에 들여놓는다. “나는 왜 이 시대를 헤벨로 읽는가.” “나는 왜 AI의 빠른 답변 앞에서 기다림을 다시 말하려 하는가.” “나는 어떤 희망을 AI에게서 인출하려 했는가.” 이러한 서사적 자아는 글을 사적인 고백으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삶의 자리를 통과해 공동의 질문에 도달하게 한다. 개인의 경험은 공공의 질문으로 열리고, 공공의 질문은 다시 독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공공적 글쓰기는 헤벨을 제거하거나 빠르게 새로운 언어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헤벨의 속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언어로 넓히는 것이다. 허무를 결론으로 닫지 않고, 허무를 공동의 질문으로 번역한다. 이해 불가능성을 개인의 좌절로 방치하지 않고, 함께 견딜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옮긴다. AI가 답변을 사적으로 최적화한다면, 공공적 번역은 질문을 공적으로 열어놓는다. AI가 한 사람의 필요에 맞춰 다수가 남긴 의미를 빠르게 제공한다면, 공공적 글쓰기는 여러 사람이 함께 머물 수 있는 느린 의미의 자리를 고독한 순례자처럼 홀로 마련하는 행위다. 따라서 헤벨의 공공적 번역은 ‘이해 불가하다 그러나 나는 신뢰한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또한 공공적 번역은 빠른 해설이 아니다. 그것은 느린 설명이다. 텍스트를 소비하기 쉬운 정보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텍스트가 지닌 낯섦과 불편함을 오늘의 삶 안에서 다시 견디게 하는 긴 글이다. 코헬렛의 헤벨을 단순히 “허무”라고 닫아버리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말, 꿈, 서원, 욕망, 기다림, 향유를 다시 묻게 하는지 상세히 풀어내는 일이다. 말하자면 공공적 번역은 지혜를 사유의 창고에 보관하지 않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위에 다시 길게 늘여놓는 일이다.
평소, 코헬렛은 바카라을 쓰는 것을 피곤한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전 12:12). 그런데 그것은 바카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혜자의 고군분투를 바카라에 담는 고충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바카라을 넘어 자기 사유를 글로 남기는 일에 철저했다. 바카라과 글의 차이는 반복을 통한 즉각적인 수정의 여부다. 코헬렛은 같은 주제를 반복하며 주장을 수정하면서 사유를 전진시킨다.
그런 점에서 전도서는 정교한 구성을 유지한다. 또한, 글은 결론을 단정하는 체계가 아니라, 관찰을 거듭하며 결론마저도 수시로 수정한다. 끝없이 교정하고 다듬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지혜를 계단처럼 확정하여 올라가려 하지 않고, 물이 흐르듯 어제의 지식이 오늘의 지식에 밀려가는 것을 그대로 두려 했기 때문이다. 반복하고 수정하는 행위는 공공적 번역의 주요한 행위다. 비슷한 이야기를 끝없이 변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변주의 과정을 자기 안에만 가두지 않고, 타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다시 내어놓는 데에 이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공적 번역은 관찰적 글쓰기와 만난다. 관찰적 글쓰기가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면, 공공적 번역은 오래 바라본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옮겨놓는 미분적 글쓰기다. 관찰적 글쓰기가 사유를 느리게 만드는 일이라면, 공공적 번역은 그 느린 사유가 공동의 삶 안에서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관찰적 글쓰기가 나의 눈을 훈련한다면, 공공적 번역은 그 눈으로 본 세계를 우리의 질문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공공적 번역은 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과거를 현재로 번역하는 일, 개인의 사유를 공동의 질문으로 번역하는 일, 신학을 일상으로 번역하는 일이다. 과거를 현재로 번역하는 일은 치환의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개인의 사유를 공동의 질문으로 번역하는 일은 확장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신학을 일상으로 번역하는 일은 심화의 방식으로 완성된다.
첫째, 과거를 현재로 번역하는 일이다. 코헬렛의 헤벨은 고대의 낡은 탄식이 아니다. 그것은 AI 시대의 정보 과잉, 의미 과잉, 설명 과잉을 찌르는 오래된 지혜다. 공공적 번역은 그 오래된 말을 오늘의 세계 속에서 다시 들리게 한다. 과거는 현재를 떠난 죽은 시간이 아니다. 어떤 과거는 현재가 가장 확신에 차 있는 순간, 그 확신의 심장을 찌르며 돌아온다.
둘째, 개인의 사유를 공동의 질문으로 번역하는 일이다. 헤벨을 깨닫는 일은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그것은 사적인 탄식이 된다. 공공적 번역은 그 탄식을 다른 사람도 함께 물을 수 있는 미시적인 질문으로 바꾼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다. “세계는 무엇을 모르는가”가 아니라 “나는 세계에 대해 무엇을 모르는가?”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을 다시 “우리는 무엇을 너무 빨리 안다고 믿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불안은 시대의 담론 안에서 질문이 되고, 한 사람의 기다림은 공동의 지혜를 위한 자리가 된다.
셋째, 신학을 일상의 철학으로 번역하는 일이다. 야훼는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다는 말은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발을 늦추고, 말을 줄이며, 주어진 삶의 자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활의 윤리이다. 공공적 번역은 이 신학적 거리를 오늘의 식탁, 노동, 글쓰기, 관계, 기다림의 언어로 옮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질문 앞에서 독자를 야훼와 대면하게 한다. 공공적 번역은 독자가 텍스트 뒤에 숨지 않게 한다. 오히려 텍스트를 통과하여 자기 삶의 자리에서 야훼 앞에 서도록 안내한다.
이런 점에서 AI 시대에 대한 공공적 번역은 이 시대를 헤벨 담론으로 사유할 때 주어지는 대안적 글쓰기다. 이 공공적 번역은 텍스트 자체를 현대에 숨 쉬게 만든다. 의미가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머물며 느릿하게 나타나도록 허용한다. 답 이전에 처음 질문을 다시 반추한다. 알다시피 AI는 무수히 많은 자세한 설명을 빠르게 종합적으로 제공한다. 하지만, 공공적 번역은 그 설명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바카라임과 기다림과 희망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고 많은 설명을 버리고 하나만 남긴다.
코헬렛의 글은 명확한 체계 속에 반복과 긴장, 모순과 관찰의 노력이 뚜렷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을 자신의 결론으로 봉인하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는 열린 마무리다. 그저 삶을 미분한 결과만 남겨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의 글 속의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어제와 다른 결을 품고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코헬렛의 글쓰기는 사유를 느리게 흐르게 하고, 대상을 낯설게 하며, 판단을 유예하게 한다. 빠르게 확정하는 언어가 아니라, 오래 머물며 다시 보게 하는 언어가 된다. 이처럼 코헬렛의 공공적 번역은 결론을 미루고, 말을 줄여 글을 늘리며, 판단보다 관찰에 집중하는 글이다. 또한 혼자만의 깨달음을 공동의 언어로 옮기는 글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현재를 찌르고, 낯설게 하기로 익숙한 세계를 흔들며, 서사적 자아로 자기 삶의 자리를 드러내고, 묵시적 현재로 지금 여기를 야훼 앞에서 다시 읽게 하는 글이다. 마침내 야훼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기억하게 하고, 그 거리 안에서 함께 먹고, 함께 기다리고, 함께 질문하게 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내가 제안하는 대안, 공공적 번역과 글쓰기는 거창한 기술적 처방이 아니다. 그것은 더 느리게 사는 일이며, 더 조심스럽게 말하는 일이며, 더 오래 바라보는 일이다. 또한 주어진 삶을 향유하고, 불확실한 세계 앞에서 침묵하며, 그 침묵 속에서 다시 쓰는 일이다. AI 시대의 인간은 더 많은 빛을 얻었지만, 그 빛으로도 다 밝힐 수 없는 어둠 앞에 서 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향유와 침묵과 관찰적 글쓰기는 결론으로 가는 마지막 길을 연다. 그것은 헤벨을 제거하는 길이 아니라, 헤벨 안에서 인간답게 머무는 길이다. 그리고 그 머무름은 이제 결론에서 말하게 될 검은 안식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이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신학이며 철학적 토대이다.
10. AI 시대 헤벨 담론의 철학적 토대 — 검은 안식의 저항
이 글은 AI 시대를 단순한 기술 발전의 시대로 읽지 않고,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다시 시험대에 오른 시대로 읽고자 했다. 처음의 질문은 분명했다. 지식은 이토록 늘어났는데, 인간의 지혜도 그만큼 깊어졌는가. 세계는 더 많이 설명되고, 미래는 더 정교하게 예측되며, 인간의 욕망은 더 세밀하게 배열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증폭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평안해졌는가. 더 지혜로워졌는가. 더 인간다워졌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한 이 글은 AI 시대가 '헤벨'이라면, 이 시대의 삶의 방식을 코헬렛의 헤벨 담론 안에서 다시 읽어보려 했다.
그 결과 하나의 역설을 찾았다. AI는 헤벨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AI가 인간에게 밀어 넣은 무력한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비롯된 능동적인 허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AI를 사용하는 인간의 안이한 지혜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AI의 답변 앞에서 새로운 질문을 성숙시키지 못한 채 다시 답변만을 요구할 때, 헤벨은 깊어진다. 인간이 기다림을 지혜의 시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한 지연이나 비효율로 여길 때, 헤벨은 증폭된다. 인간이 AI의 설명을 사유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론으로만 받아들일 때, 헤벨은 더 견고해진다. 인간이 가능성의 계산을 희망으로 착각하고, 추천된 선택을 바카라임 있는 판단으로 오해하며, 데이터의 축적을 진리의 현현처럼 받아들일 때, 헤벨은 굳어진다. 즉, AI의 헤벨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지혜의 빈곤에서 기인한다.
솔직히 말해, AI는 인간을 파괴하는 장치로만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지혜를 포기하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일 수는 있다. AI는 인간의 욕망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인간 안에 있던 욕망을 더 빠르고 정교하게 비추어준다. 더 빨리 알고 싶은 욕망, 더 많이 통제하고 싶은 욕망, 더 적은 고통으로 더 많은 결론을 얻고 싶은 욕망, 기다림 없이 확신에 이르고 싶은 욕망이 AI라는 장치를 통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AI는 헤벨의 원인이라기보다, 인간 안에 잠복해 있던 헤벨의 조건을 노출하는 장치가 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AI 시대를 단순한 기술 윤리나 사용법의 문제로만 다룰 수 없다. 물론 AI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기준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은 질문은 인간이 AI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이다. 팥죽 하나에 장자권을 팔 수 있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기다릴 수 없음이었다.
인간은 AI를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가, 아니면 지혜의 수고를 회피하는가. 인간은 AI의 답변을 통해 더 깊이 묻는가, 아니면 질문 자체를 끝내버리는가. 인간은 AI가 제공한 가능성 앞에서 바카라임 있게 선택하는가, 아니면 선택의 무게를 계산 결과에 떠넘기는가. 결국 AI 시대의 물음은 기술의 물음이기 전에 인간의 물음이며, 인간의 물음이기 전에 기다림에 관한 지혜의 물음이다.
이제 코헬렛의 헤벨 담론은 중요한 주제로 수렴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 답을 빠른 속도로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할 때 지혜의 자리가 열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모든 정보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고, 모든 시간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주어진 때를 살아낼 수 있으며, 모든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묻고 관찰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지혜가 시작되는 자리이다. AI 시대가 인간에게 다시 가르쳐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무한한 정보 처리자가 아니라, 유한한 지혜 추구자이다. 그 지혜의 핵심에 ‘기다림, 즉 희망하는 인간’이 있다.
이것이 이 글의 토대인 나의 '검은 안식'의 신학이자 철학이다. 검은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정지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밝아지고 빨라지고 설명되는 시대에, 끝내 다 밝힐 수 없는 어둠을 인정하는 안식이다. 그것은 의미를 포기하는 어둠이 아니라, 의미를 소유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는 어둠이다. 그것은 지식의 빛을 거부하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 닿지 않는 자리까지 억지로 점령하려 하지 않는 지혜이다. 검은 안식은 인간이 땅에 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야훼의 감춰진 세계 앞에서 발을 늦추는 저항이다.
이 저항은 거창한 혁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말의 속도를 늦추는 데서 시작된다. 즉각적인 답변 앞에서도 질문을 다시 품는 데서 시작된다. 많은 가능성 앞에서도 자기 삶의 방향을 조용히 묻는 데서 시작된다. 설명을 얻은 뒤에도 침묵을 잃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AI가 제공한 지식을 곧바로 지혜로 착각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은 AI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AI에게 자기 기다림과 바카라임과 희망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
11. 결론 – 스스로 사유하며 희망하는 인간
이 글이 도달한 결론은 분명하다. 그것은 기술의 거부가 아니다. AI를 버려야 한다는 결론도 아니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낭만적 요청도 아니다. AI를 사용하되, 그것이 인간의 지혜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AI의 답변을 받되, 그 답변을 기다림과 관찰과 바카라임의 시간 안으로 다시 데려와야 한다. AI가 가능성을 열어 보일 때, 인간은 그 가능성의 목록 앞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묻고, 그 선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AI가 세계를 설명할수록, 인간은 그 설명 너머에 남아 있는 비가시성과 침묵을 더 깊이 의식해야 한다. 이 논의를 다음 몇 가지 주장으로 정리해 보려 한다.
첫째, AI 시대의 올바른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AI의 상황을 헤벨 담론으로 폭넓게 살펴야 한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AI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는지를 물어야 한다. AI가 어떤 답을 제공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답이 인간의 질문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살펴야 한다. AI가 어떤 미래를 예측하는지뿐만 아니라, 그 예측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다리고 희망하며 바카라임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AI의 상황은 기술적 현상인 동시에 인간학적 사건이며, 신학적 성찰의 자리이다.
둘째, 헤벨 담론은 바로 그 폭넓은 성찰의 언어가 될 수 있다.
헤벨은 허무이지만, 헤벨 담론은 허무 속에 담긴 희망의 씨앗을 찾아낸다. 그것은 AI를 단순히 정죄하지도 않고,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AI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용성 아래 숨어 있는 인간의 조급함을 묻는다. 그것은 정보의 풍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풍요가 지혜의 빈곤을 가릴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것은 설명의 빛을 활용하면서도, 세계가 끝내 투명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므로 AI의 상황을 헤벨 담론으로 살핀다는 것은 AI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자리, 인간의 욕망, 인간의 한계, 인간의 희망을 함께 묻는 일이다.
셋째, 지식의 확장은 지혜의 깊이를 담보하지 않는다.
마침내 이 글의 처음 질문은 이렇게 다시 돌아온다. 지식은 늘었지만 지혜는 깊어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어쩌면 완결될 수 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코헬렛의 헤벨 담론은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 길을 보여준다. 지식이 늘어나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 깊이 기다려야 한다. 설명이 많아지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 정직하게 침묵해야 한다. 가능성이 확장되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더 바카라임 있게 희망해야 한다. 그리고 AI가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은 야훼 앞에서 자기 말을 더 조심스럽게 세워야 한다.
요컨대, 헤벨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고, 그럼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향유하며, 천천히 묻고, 조심스럽게 쓰고, 오래 기다리는 지혜를 배우게 한다. 이것이 AI 시대에 코헬렛의 오래된 지혜가 새롭게 들려주는 결론이다. 더 많은 빛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 빛으로도 다 밝힐 수 없는 어둠이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은 다시 배운다. 안식은 밝음의 소유가 아니라, 어둠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신뢰라는 것을. 그 신뢰가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검은 안식의 저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