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견적을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설명을 듣는 순간 이건 이틀, 이건 아무리 서둘러도 일주일이라는 판단이 섭니다. 계산해서 나오는 것인 능력. 이 능력의 정체는 난이도에 대한 감각입니다. 어떤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감각.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실무의 상당 부분이 이것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일정을 짜는 일, 값을 매기는 일, 무엇을 먼저 할지 정하는 일, 남에게 맡길지 직접 할지 정하는 일. 전부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먼저 알아야 가능합니다.
난이도는 몸에서 왔다
난이도 감각이 어디서 오는지 따져보면 결국 직접 해본 시간입니다. 한 번 해보면 그 일의 저항이 몸에 남습니다. 어디서 막혔고, 무엇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어떤 단계가 의외로 간단했는지. 그 기억이 쌓이면 지도가 됩니다. 해보지 않은 일도 그 지도 위에 대충 올려놓고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예전에 했던 그것과 비슷하니 그 정도 걸리겠구나. 그래서 난이도 감각은 설명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남이 알려준 소요 시간은 숫자로 남을 뿐 감각이 되지 않습니다. 직접 막혀봐야 어디가 막히는 자리인지 알고 직접 쉽게 끝내봐야 그게 쉬운 일이라는 걸 압니다. 몸이 겪은 저항만이 자가 됩니다.
지형이 바뀌었는데 지도는 그대로다
AI가 흔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 지형입니다. 일의 난이도 순서가 통째로 뒤바뀌었습니다. 오래 어렵다고 여겨진 일들이 쉬워졌습니다. 없는 장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일, 스무 가지 변형을 뽑는 일, 낯선 스타일을 흉내 내는 일. 반대로 쉽다고 여겨진 일들이 이상하게 어려워졌습니다. 같은 인물을 여러 컷에서 똑같이 유지하는 일, 글자를 정확히 앉히는 일, 손에 든 물건이 다음 컷에서도 같은 물건이게 하는 일. 사람에게는 당연했던 것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옛 지도를 들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회의실에서 나오는 판단이 대체로 예전 기준입니다. 저건 대단해 보이니 오래 걸리겠고 이건 간단해 보이니 금방 되겠지. 그런데 지형이 바뀌었으니 그 짐작이 자주 틀립니다. 대단해 보이는 것이 십 분 만에 나오고 사소해 보이는 수정이 이틀을 잡아먹습니다. 견적이 무너지고 일정이 무너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게으르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새 지형의 지도를 아직 아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겪지 않으면 그려지지 않는다
더 까다로운 문제는 새 지도를 그리기가 예전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옛 지도는 저절로 그려졌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막혔고 막히는 경험이 곧 측량이었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단계에서 막히지 않습니다. 요청하면 무언가가 나오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요청하면 됩니다. 저항이 거의 없으니 무엇이 어려운 일인지 몸이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옮겼을 뿐입니다. 이제 어려움은 작업 중간이 아니라 끝에 몰려 있습니다. 아흔 장까지는 순조로운데 마지막 한 가지가 끝내 안 되는 식으로. 그 마지막이 얼마나 걸릴지는 겪어본 사람만 압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마지막 한 가지도 앞의 아흔 장처럼 금방 될 것 같습니다.
난이도 감각이 흐려지면 실무에서만 곤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곤란해집니다. 남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존중합니다. 반대로 짐작하지 못하면 존중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그거 금방 되죠, 라는 말이 늘어나는 것은 인심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난이도 감각이 없어서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노동은 가벼워 보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결과물만 보고 소요를 짐작하는 요청, 수정 한 번이 앞 단계를 통째로 무너뜨린다는 걸 모르는 일정, 쉽게 나온 것과 어렵게 나온 것을 같은 값으로 매기는 계산. 전부 지도가 없는 사람이 내리는 판단입니다. 그러니 난이도 감각은 실무 능력이면서 동시에 직업적 예의의 토대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얼마나 걸립니까, 라고 물어주는 사람은 그 일에 시간이 든다는 걸 아는 사람입니다.
예측하고, 재고, 고친다
새 지도를 그리려면 옛날처럼 막히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막힐 일이 줄었으니 일부러 측량해야 합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예측을 먼저 적어두는 것. 이건 몇 번 만에 나올 것 같은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지 그리고 끝난 뒤에 실제와 비교합니다. 틀린 방향과 크기를 몇 번 보고 나면 감각이 조금씩 교정됩니다. 예측 없이 하면 끝나고 나서도 그 일이 어려웠는지 쉬웠는지 남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갑니다. 이건 기록의 문제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저항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저항을 겪는 대신 재야 합니다. 몸이 저절로 배우던 것을 이제는 의식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만드는 일이 쉬워졌다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정확히는 어려움의 자리가 바뀌었고 바뀐 자리를 아무도 아직 다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지도를 먼저 갖는 사람이 앞으로 일정을 지키고 값을 제대로 매기고 남의 일을 함부로 가볍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난이도(難易度) 일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하는 사람과 도구 사이의 관계. 지형이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재야 하며, 재보지 않은 사람에게 모든 일은 금방 되는 일로 보인다.
오래된 지도에는 거대한 산으로 표시된 곳이 실제 풍경에서는 평지가 되어 있고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는 예상하지 못한 절벽이 솟아 있다. 과거에는 많은 시간과 기술이 필요했던 일이 몇 분 만에 가능해지는 반면, 사소해 보이던 일 하나가 마지막까지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지도가 틀린 것이 아니라 지도를 만든 뒤 지형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