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저마다의 속도와 모양새로 삶을 살아낸다

어느 중년 남성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문장

by조인후

따뜻한 기운이 얇은 유리창을 넘어 나른하게 스며드는 오후의 도서관이었다. 자료실 특유의 묵직한 종이 냄새와 정적 사이로, 등산용 배낭만큼이나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짊어진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미지의 영토를 탐색하는 정찰병처럼 자료실과 열람실 구석구석을 느릿하지만 집요하게 활보했다. 주말의 달콤한 휴식을 포기한 이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좌석들 사이에서, 그는 연신 안경테를 고쳐 쓰며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을 살폈다.


결국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한 그가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앉을자리가 하나도 없네요."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약간의 피로,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사서가 위층의 열람 공간을 안내하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미련이 남은 듯 디지털 열람실 주변을 한 번 더 배회했다. 다행히 그의 집요함이 빛을 발했는지, 마침 짐을 싸서 일어나는 이용자 덕분에 내 대각선 방향에 빈자리가 생겼다. 그가 마침내 영토를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옆 사람을 향해 아주 짧고 정중하게 목례를 건넸다. 의자를 빼고 묵직한 짐을 부리는 과정에서 발생할 불가피한 소음에 대한 선제적인 사과이자, 타인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배려였다. 그는 가방에서 족히 15인치는 되어 보이는 빛바랜 노트북을 꺼내더니, 이번에는 검은색 네오프렌 소재의 노트북 케이스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케이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는 결국 자신과 옆 사람 사이의 좁은 경계면에 그것을 놓아두었다. 꽤 두툼한 케이스 탓에 옆 사람의 영역을 살짝 침범한 듯 보였으나, 다행히 옆 사람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화는 잠시였다. 그는 다시 케이스를 집어 들더니 정성스럽게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대신 한 뼘 두께는 족히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를 툭 올려놓았다. 이어서 가슴 포켓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닦고, 필통에서 검은색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정해진 각도대로 배치했다. 본 전치사에 들어가기 전, 자신만의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그의 준비 운동은 길고도 섬세했다.


나는 어느덧 바카라장 넘기는 것도 잊은 채 그의 일련의 루틴을 관찰하며 이 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일었다. 저 치밀하고도 어설픈 준비 과정의 끝은 어디이며, 저토록 공들인 예열 뒤에 터져 나올 집중력의 화력은 어느 정도일까. 도대체 어떤 대단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이토록 분주하게 스스로를 정돈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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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움직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가지 사실만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는 지독하게 부지런한 사람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하루를 일구어 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나른한 주말, 집 소파에 기대어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편하게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무거운 장비와 서류들을 챙겨 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적 공간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노트북 케이스 하나 둘 곳을 몰라 쩔쩔매고 서류를 뒤적이는 그 사소하고 유난스러운 몸짓들은, 사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 보겠다는 한 인간의 숭고한 예비 동작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이유는 그 생경한 모습에서 내 아버지의 굽은 등을, 그리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늘 주저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나의 습성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속도와 모양새로 삶을 살아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안정과 집중의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가속 차선이 필요하다. 그 속도가 타인보다 조금 느리거나 방식이 거칠다고 해서, 그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련되지 못했을지언정 그 안에는 삶을 향한 진심과 치열함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눈에는 의문투성이의 행동을 일삼는 관찰 대상일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 내 대각선에 앉은 그 중년의 남성 역시, 펜을 바삐 끄적이며 자신을 훔쳐보는 나의 무례하고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처럼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 친구도 참 자기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하루를 채워가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모른 채, 그러나 가장 닮은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