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은 출시가 아니라 제품 기획에서 출발한다

'새벽네시'가 말하는 1초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획자의 무기

by조인후

화장품 기획자가 빠지기 가장 쉬운 낭만적 착각이 있다. “제품이 워낙 좋으니, 일단 써보기만 하면 난리가 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매년 수천 개의 ‘좋은 제품’이 소비자의 얼굴에 닿기는커녕 물류창고 구석에서 유통기한을 맞이한다. 기획자가 공들여 만든 제품의 강점이 스마트폰 화면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새벽네시 이은솔 대표는 지난 5월 15일 ‘뷰티 BM 인텔리전스 서밋 2026’에서 이 참혹한 실패의 본질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그는 공급자 중심의 오만한 시선이 마케팅을 망치는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텍스트로 가득한 기획서 속의 '위대한 성분'은 숏폼 화면을 스크롤하는 소비자의 시야에 단 0.1초도 머무르지 못한다.


이 대표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정밀했다. 마케팅은 제품을 다 만든 후 심폐소생술을 하는 도구가 아니라, 기획의 첫 단추부터 뼈대에 심어야 하는 설계도다.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숏폼의 세계에서 1초 안에 직관적인 시각적 충격을 주지 못하는 제품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제품일지도 모른다.


20260515_143428.jpgBeauty BM Intelligence Summit 2026,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인플루언서가 영상 20초 만에 비건 마스크 시트를 증명하는 법은 없다


마케팅 실패의 이면에는 늘 '공급자의 언어'를 고집하는 기획자가 존재한다. 브랜드 팀은 회의실에 모여 '홍조 열감 개선', '해양 심층수 함유', '비건 인증 마스크 시트' 같은 그럴듯한 USP(차별화 포인트)를 정의한다. 하지만 이 화려한 스펙을 넘겨받은 숏폼 인플루언서와 마케터들은 깊은 한숨을 쉰다. 한국인의 홍조는 카메라 조명 아래서 웬만해선 티가 나지 않으며, 20초짜리 전후(B&A) 영상에서 맑고 투명한 해양 심층수를 시각적으로 보여줄 방법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말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비건 마스크 시트 같은 속성은 1초 만에 스크롤을 내리는 쇼츠 세상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된다. 기획자가 의도한 메시지를 충실히 담으려 할수록 마케팅의 난이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 인플루언서에게 제품 가이드라인을 쥐여주고 독촉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영상의 마무리가 번들거려 화면에서 단점이 더 부각된다"거나 "생각만큼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택티컬한 피드백뿐이다.


유명 제약회사가 만들었다는 신뢰성이나 친환경 크룰티 프리(Cruelty-free) 인증도 숏폼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 못한다. 소비자가 제품을 마주하는 순간은 침대에 누워 자기 전 인스타그램 릴스를 무심히 올리는 1초의 찰나이기 때문이다. 캡션에 적힌 디테일한 성분을 읽어줄 만큼 소비자들은 한가하지 않다. 기획자만의 숭고한 의도는 차가운 디지털 알고리즘과 소비자의 무관심 속에서 무참히 쪼개진다.


image.pngBeauty BM Intelligence Summit 2026,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재구매는 제품력이 결정하지만 첫 구매는 철저히 ‘보여지는 효능’의 영역이다


흔히 유통 마케팅에서는 재구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 번 맛을 보거나 써본 고객이 충성 고객이 되어 브랜드를 먹여 살린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은솔 대표는 역으로 마케팅 관점에서는 '첫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지속성이 좋고 바를 때 감촉이 훌륭한 제약회사의 화장품이라도, 일단 소비자의 지갑이 열려 첫 구매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 위대한 재구매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획자와 마케터의 역할이 명확히 갈린다. 제품력과 실제 효능, 바르는 제형의 부드러움 등은 BM이 고민해야 할 재구매 요인이다. 반면 마케팅이 관여하는 첫 구매 요인은 철저히 '흥미', '신기함',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 보여서', '효능이 있어 보여서'라는 시각적 직관성에 기반한다. 틱톡에 콜라겐 젤리를 검색했을 때 쏟아지는 수많은 썸네일 속에서 "아, 이거 그거네!" 하고 단번에 우리 제품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장치가 있느냐의 싸움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글로벌 마케팅에서도 이 법칙은 유효하다. 국내 올리브영 1위를 했다거나 유명 연예인을 앞세운 대규모 지출은 해외 소비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한다. 소비자가 상상할 수 있는 평범한 제형의 사진 네 장을 나란히 놓으면 브랜드 로고를 가렸을 때 어느 회사 제품인지 마케터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결국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제품이 틱톡 썸네일과 구글 이미지에서 어떻게 박힐 것인가'를 미리 시뮬레이션하지 않는다면, 마케터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전무하다.


image.pngBeauty BM Intelligence Summit 2026,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팬시한 보고서 대신 투박한 데이터 포인트를 촘촘하게 설계하라


마케팅의 효율을 높이고 ROI(투자자본수익률)를 극대화하는 비결은 결국 데이터에 있다. 그러나 이 대표가 말하는 데이터는 대기업의 고상한 임원 회의실에 올라가는 번지르르하고 팬시(Fancy)한 보고서 속 숫자가 아니다. 경쟁사가 띄우는 콘텐츠의 리얼한 타율, 제품을 받아본 인플루언서들이 가이드라인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뱉어내는 날것의 피드백이 진짜 정답에 가까운 데이터 포인트다.


효율적인 인플루언서 시딩(Seeding) 마케팅을 위해서는 자사만의 명확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 모바일에 틱톡 앱과 VPN이 깔려 있는지, 우리 제품의 핵심 키워드를 검색했을 때 서로 다른 브랜드의 썸네일이 최소 5개 이상 눈에 밟히는지 체크해야 한다. 만약 이 질문에 고개를 젓는다면, 그 브랜드는 시장의 흐름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자위하는 중일 가능성이 크다.


성공적인 제품을 만드는 워크플로우는 경쟁사 분석, 인플루언서 피드백, 그리고 자사의 성과 데이터를 촘촘하게 조합하는 순환 구조다. 인플루언서에게 단순히 "제품 잘 받으셨냐"는 안부 인사와 손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마케터의 업무가 끝나서는 안 된다. 기획 단계에서 설계했던 제품의 시각적 직관성이 인플루언서의 거친 편집 영상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남아 표현되는지 끝까지 추적하고 모니터링해야 한다.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로 끝나는 수많은 실패 사례를 극복하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이 투박한 데이터들의 연결이다.


image.pngBeauty BM Intelligence Summit 2026,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1초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획자의 무기


헨리 포드는 "내가 고객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더 빠른 말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화장품 기획자들 역시 소비자 설문조사와 성분 트렌드에 갇혀 '더 부드럽고 더 안전한 말'만 만드는 데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소비자는 말이 아니라 테슬라의 사이버트럭처럼 스크롤을 멈추게 만드는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을 원한다.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비즈니스의 기본이자 재구매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그 좋은 제품을 소비자에게 처음 건네주는 것은 철저히 마케팅의 영역이며, 이 마케팅은 기획자의 바카라상 위에서 이미 결정된다. 숏폼 영상의 프레임 속에서 어떻게 구현될지 고민하지 않은 USP는 공급자의 자기만족을 위한 잉여 텍스트에 불과하다.


침대에 누워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전 세계 소비자의 눈길을 1초 만에 사로잡을 직관성이 당신의 제품 기획안에 녹아 있는가? 이 질문에 명쾌하게 시각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마케터를 찾아가도 당신의 제품은 영원히 '써보지 않아서 모르는 좋은 제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image.pngBeauty BM Intelligence Summit 2026,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