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관의 청구서
어느 날 동료가 말했다. 대표이사가 과제를 꺼낼 때마다 내가 너무 쉽게 수긍하고 곧바로 실현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예스맨’이라는 지적이었다. 못하겠다고 말하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하는데, 나는 그 카드를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지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해보지 않고 어떻게 못한다고 단정하는가. 대부분의 일은 착수하기 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으며, 회수 불가능한 손실이 막대한 경우가 아니라면 판단을 미리 닫을 이유가 없다. 해보지 않는 것 역시 기회비용이다. 놓친 기회는 장부에 잡히지 않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 논리를 신뢰했기에 나는 동료의 평가를 내 궤적을 모르는 데서 온 피상적 관찰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장면을 다시 복기하는 지금, 그가 본 것은 나의 과거가 아니라 바로 나의 현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는 데 누구보다 능했다. 누군가 계획을 꺼내놓으면 반사적으로 허점을 골라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논쟁거리를 짚어내며 현자 노릇을 했다. 그 반응 속도를 통찰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가장 값싼 능력을 가장 비싸게 팔고 있었을 뿐이다.
안 될 이유를 나열하는 일은 쉽다. 말에는 바카라임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될 이유를 찾아 실행하는 쪽에는 결과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는다. 비판은 발언으로 휘발되지만 실행은 이름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안 된다고 말하는 쪽은 가능성 하나만 제기해도 충분하지만, 하겠다고 나선 쪽은 방법과 일정과 비용까지 입증해야 한다. 위험을 지적하는 데는 한 줄의 근거면 충분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데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말의 무게가 달라지는 지점이다.
동료가 붙여준 ‘예스맨’이라는 라벨을 다시 반추해 본 것도 이 대목이다. 대개 예스맨이라 하면 맹목적인 동조를 떠올리지만, 진정한 수락은 거절할 능력과 판단력이 전제될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내게 필요했던 것 역시 판단을 건너뛴 무조건적인 동의가 아니라, 실행을 성립시킬 현실적인 셈법과 무게감을 되찾는 일이었다.
회계팀에서 자금을 담당하다 마케팅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한 방향이었다. 왜 굳이 그러느냐는 물음과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반복되었다. 숫자를 다루던 사람이 브랜드를 다루겠다는 선택은 그들에게 이해할 이유가 없는 이동이었다.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사람들이 왜 회계팀을 보수적이라 부르는지 이해되었고, 동시에 마케팅이 왜 위험을 감수하며 예산을 집행하는지도 납득되었다. 두 부서는 서로를 오해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 다른 풍경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자리가 시야를 정하고, 시야가 판단을 정한다.
첫 이직을 결심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말린 사람이 응원한 사람보다 많았고, 나는 인정받고 편안했던 첫 근무지를 잃었다. 지금도 결코 작지 않은 손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을 나왔기에 내가 가진 것들을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조직 안에서는 그 조직의 크기를 가늠할 기준이 없으며,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해진다. 그곳에 머물렀다면 나의 기준만을 최상의 표준으로 삼아 타인에게 요구하며 살았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력에는 일관된 조건이 하나 있었다. 내가 감수한 위험의 청구서가 오롯이 내게로만 돌아왔다는 점이다. 부서를 옮겨 실패했다면 경력의 공백은 내 몫이었고, 이직이 어긋났을 때의 손실 역시 내가 전부 안아야 했다. 그 조건 아래에서라면 무모할 정도의 낙관도 정당화될 수 있었다.
문제는 조직에서의 낙관이 혼자만의 위험 감수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회의실에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발언은 즉시 타인의 일정과 노동으로 환산된다. 가능성은 회의실에서 선언되지만, 그 실제 비용은 회의실 밖에서 타인의 시간과 에너지로 정산된다.
내가 간과한 것은 실행의 가치가 아니라, 그 실행을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물리적 청구서의 크기였다. 안 된다는 이유를 대는 일은 여전히 쉽고 편안하다. 그러나 동료들의 난색과 유보를 단순한 냉소나 소극성으로만 치부해버리면, 정작 실행에 필요한 실제 비용을 계산하는 내 칼날마저 둔해진다.
내가 그 동료의 지적을 다시 짚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유보에 무작정 동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행을 위해 치러야 할 진짜 비용을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을 제대로 계산할 줄 모르는 낙관은 추진력이 아니라 그저 대바카라 없는 맹목일 뿐이다.
비용은 관념이나 숫자가 아니며, 언제나 누군가의 실재하는 시간과 노동으로 지불된다. 그 현실을 누락한 낙관은 선의나 의지만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해보자고 말하는 쪽을 택한다. 안 된다는 말만 오가는 자리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도한 일이 모두 아름답게 풀린 것은 아니다. 내가 속했던 기업이 존폐의 위기에 섰던 적이 있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회사를 생존시키기 위해 그것을 밀어붙였다. 결과적으로 사업을 지속할 시간은 벌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깊은 상처를 입었고 실망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결국 내게로 돌아와, 나 역시 그 조직에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떠나야 했다. 내가 던진 선택의 무게와 바카라임은 결국 나라는 당사자에게까지 되돌아온다. 넘어지고 깨진 뒤에 그 결과를 온전히 끌어안고 다시 서는 일까지가, 내가 말하는 '해보자'는 태도의 진짜 몫이다.
내가 청구서를 먼저 셈하려는 이유 역시 속도를 줄이거나 타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행에 드는 진짜 비용을 정확히 파악해야 그 실행이 도중에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산 없는 낙관은 판을 움직이지 못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시도하는 쪽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택할 것이다. 다만, 내 낙관이 요구하는 진짜 값과 청구서를 내 손으로 먼저 정확히 적어 들고 갈 것이다. 그것까지가 해보자고 말하는 사람이 져야 할 바카라임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