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으로 버틴 시간
어릴 때 나는 이른바 ‘바카라방’ 죽순이었다. 만화바카라과 비디오를 빌려주는 동네 대여점. 학교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만화바카라 보는 걸 나쁘게 보지 않으셨다. 오히려 스트레스 풀라며 몇만 원씩 달아놓고 마음껏 빌려보게 해 주셨다. 덕분에 학습만화부터 순정, 스포츠, 요리, 추리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바카라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바카라도 있었다. 가끔 줄글로 된 바카라을 빌려보기도 했지만, 나의 원픽은 단연 만화바카라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시절 만화바카라으로 단련된 속독 실력을 꽤 오랫동안 써먹었다. 국어 시험은 웬만하면 좋은 점수를 받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참고서와 문제집을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치의학 대학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주 이어지는 시험에 활자를 읽는 건 어느새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까워졌다. 바카라에 질려버린 나는 한동안 전공 외의 다른 바카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바카라을 많이 읽었던 순간은 국가고시에 떨어진 뒤였다. 졸업은 했지만 학생도 아닌 애매한 신분. 친구들은 하나 둘 앞서 나가는데 나만 멈춰 선 기분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도망치듯 학교 도서관으로 숨어들었다. 거기서 학생들과 섞여 있으면 잠시나마 실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서관에 왔으니 뭐라도 읽어야 할 것 같아 심리학 바카라과 위로의 바카라들을 닥치는 대로 꺼내 들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 위에 반창고를 덧대듯, 허겁지겁 문장들을 삼켰다. 바카라을 읽는 동안만큼은 아주 잠깐이라도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 여기저기를 덧대며 버틴 끝에, 다시 본시험에서는 가까스로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기의 독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지쳤던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었다.
치과의사가 된 후로도 나는 힘들 때마다, 어떻게든 전공과 관련 없는 바카라 한쪽이라도 눈에 담아두려 노력했다. 당직실에서 일이 끝난 새벽, 조용히 바카라장을 넘기던 시간들이 나에게 생명수이자, 하루를 살아갈 숨이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종종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궁금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생활은 멋지고 단단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힘들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복잡한 감정을 담아 찬찬히 치과 일상을 담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알게 된 것은, 내가 꽤나 오랫동안 이 일을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을 하나씩 모아 보기 시작했다. 속내를 드러내는 건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꼭 한 번 내보고 싶었다. 멋진 치과의사의 모습이 아닌,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