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친구분들과 여행을 가신 덕분에
아빠와 본의 아니게 하루 종일 붙어 있게 되었다.
아빠는 요즘 참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신가 보다.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길게 마주 앉지 못했던 나에게
아이 이야기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들,
그리고 내가 굳이 궁금해하지도 않은 오빠네 소식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한가득 풀어놓으신다.
그 수많은 말끝에 문득 아이의 학비를 묻는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의 대학교 학비는 감사하게도 아이의 친할아버지께서 대주신다.
요즘 대학 학비가 어디 한두 푼인가.
은퇴 후에도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여유 있게 살아가는 전 시아버지가,
아빠의 눈에는 내심 부러우셨나 보다.
아빠 역시 아쉬울 것 없이 부족함 없이 살아오셨지만,
비싼 등록금을 선뜻 내어주고
언제든 비싸고 맛있는 밥을 대접하며
아이들에게 단위가 다른 용돈을 쥐어주는 그 집의 여유가 왠지 겹쳐 보였던 모양이다.
문득 아빠가 속내를 털어놓는다.
"아빠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차피 남자 힘 빠지는데, 네가 조금 참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아빠는 참 착한 사람이다.
그토록 모진 무시를 당하고 심하게 부딪히며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아빠는 여전히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아빠는 자존심도 없어?"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자부심마저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서 때로는 초라해 보였을 그 백발의 아빠.
스스로의 상처와 수모는 참아낼 수 있었을지언정,
내 자식이 세상 풍파 속에서 남들보다 덜 가지거나 아쉬운 소리를 듣는 것은 차마 견딜 수 없어 삼켰던 눈물들이 있었다.
화려한 타이틀과 넉넉한 조건 뒤에 숨겨진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그 안에서 상처받았을 딸을 향해
"조금만 참고 살지 그랬냐"라고 건네는 아빠의 말은
어쩌면 서투르고 투박해서 더 아픈,
자신만의 방식으로 셈해 본 가장 현실적인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자존심마저 내던진 채 타인의 등 뒤를 우러러보면서도,
오직 내 딸만큼은 모진 바람을 피해 살기를 바랐던 아빠의 그 어지럽고도 눈물겨운 마음.
그 먹먹한 무게를 이제야 어렴풋이 가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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