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by재인

오래간만에 가슴을 묵직하게 치는 영화를 보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


워낙 그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번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뒤에도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지독한 잔상을 남겼다.

영화 속 인물들이 겪어내는 삶의 모순과 상처들이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내 마음 한구석을 툭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 나는 과연 누구의 자리가 되고 싶은가.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으며 선의를 베푼다 믿는 예지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삶의 바닥에서 치열하게 생존하며 온몸으로 상처를 겪어내는 미옥이가 되고 싶은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예지가 되고 싶다.

고결한 척 타인을 관조하는 예지의 세련된 친절과 안락함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여유가 부럽다.

날이 서지 않은 채 "사랑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여유가.


물론 미옥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현명하며,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미옥의 거칠고도 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직접 짊어지기엔

내 안의 두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예지의 그 세련된 선의가

미옥에게는 때로 얼마나 이질적이고 잔인한 거울이 되는지,

영화는 그 지점을 아주 예리하게 파고든다.


둘째, 사람을 너무나 잘 믿었던 호석이는 과연 순수한 것일까. 그리고 그 순수함은 결국 독이 되는가.

공장의 바닥에서 쫓겨나고,

함께 투쟁하던 동료들의 배신을 지켜보아야 했던 호석에게 세상은 이미 거대한 폭력 그 자체였다.

그가 품었던 삶의 신념과 노동자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사람을 향한 믿음은

그에게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가치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 순수함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키려 했던 올곧은 마음들은

현실의 냉혹한 자본 논리와 거대한 권력 앞에서 여지없이 부서지고 독이 되어 돌아왔다.

세상 이치에 영악하게 발맞추지 못해서,

오직 사람 도리와 진심만을 믿었기에 그가 입은 상처는 너무나 깊고 쓰라렸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가 다가와 그들의 상처를 '순수한 예술적 호의'로 포장하려 할 때, 비로소 복잡했던 마음은 눈물과 함께 호석의 입을 통해 정의 내려진다. 호석에게 순수함이란 결국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 미련이자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묻게 된다.

세상이 오염되어 있을 때 오롯이 순수한 마음을 지키려 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먼저 다치는 법이라지만,

그 모든 흉터와 독성 속에서도 끝내 그 온기를 버리지 못하는 호석의 뒷모습은

왜 이토록 아프고 처연할까.

과연 이 험한 세상에서 순수한 것은 정말 독이 되는 걸까,

아니면 끝내 지켜내야 할 마지막 인간의 자존심인 걸까.


셋째, 상우는 미옥에게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는 상우는 참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선을 지키는 인물.

처음에는 미옥이 그를 보는 눈빛이 동경인지 사랑인지,

자칫 둔탁한 시선으로는 흔한 불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상우에게 미옥은 애초에 관심 밖의 존재였지만,

바닷가에서 마주한 미옥은 그에게 일종의 신선한 자극이자 동경이었다.

아내인 예지와의 관계나 자신의 견고한 울타리는 정확하게 지켜내면서도,

자신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미옥의 거친 모습에는 묘한 애정을 느낀다.

다 가질수록 오히려 내가 가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쉽게 닿을 수 없는 것에 도전하고 싶은 심리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깊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건조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다른 삶을 구경하고 맛보고 싶어 하는 이기적이면서도 솔직한 갈망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건 삶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미옥을 향한 상우의 마음은,

안전한 선을 결코 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 속에서 피어난 씁쓸한 동경이자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닳고 닳은 일상의 틈새에서 인물들의 멍한 눈빛과 그 씁쓸한 질문들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과연 우리에게 '가능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태어난 시작점이 다른,

지금 머물고 있는 세계의 결이 다른,

그렇게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사이에 과연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가능한 것일까.


타인의 삶

그리고

나의 삶


그 아늑한 간극사이에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닳고 닳은 일상의 틈새에서 인물들의 멍한 눈빛과 그 씁쓸한 질문들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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