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석에 앉은 아주머니들

by차돌


"또 어떤 아줌마가 앉아있어ㅠㅠ"


출근길 지하철에 올라탄 아내가 어김없이 카톡을 보낸다. 이제 배가 제법 불렀고, 진한 핑크 임산부 배지를 잘 보이게 가방에 달았지만 무용지물이다.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한 아주머니들은 좀처럼 비킬 생각이 없다.


내 경험만으로 슬롯 현상을 일반화하는 건 경계하는 편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커뮤니티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경험을 아예 무시하기도 어렵다. 여기에 직접 겪는 경험까지 반복되면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진다. 내가 경계하던 확증편향과 실제 슬롯의 풍토를 구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남자들은 적어도 창피해서라도 잘 안 앉는 것 같다. 나부터가 그렇다. 노약자석이나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다는 건 나에게는 그 자리가 필요한 이들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서서 가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런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진짜 임산부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면 얄미운 마음이 든다. 특히 연세 있는 아주머니들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면 더욱 그렇다. 본인도 임신과 출산을 경험했을 수 있고, 딸이나 며느리가 비슷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을 텐데. 타인의 불편을 모를 리 없는 사람이 그 불편을 외면한다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기심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슬롯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보게 된다.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오히려 그 배려를 외면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력화되는 사례는 임산부석 말고도 많다. 취약계층을 위해 마련된 지원금을 부정하게 타 가거나, 무인매장을 함부로 이용하거나, 공공장소를 자기 것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위해 마련된 규칙 중에는 모두의 자발적인 배려를 전제로 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이다. 배려가 지켜지지 않을 때, 정작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규칙을 무시한 사람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는다.


선량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슬롯는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슬롯 현상을 단선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믿어온 슬롯질서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 일 자체는 어쩌면 더 나은 슬롯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배가 불러올수록 이런저런 일에서 배려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당연한 마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 역시 내 상황을 앞세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기대이고 어디부터가 지나친 요구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결국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아내가 버젓이 마련된 임산부석에 앉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슬프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가 누구보다 그 상황을 이해할 법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배려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 더욱 그렇다.


약자를 위한 시스템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일부의 이기심과 다수의 침묵이 시스템을 서서히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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