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빌런을 소비하는 시대

by차돌

살다 보면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목격할 때가 있다. 범죄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공권력이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없는 영역에서도,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남에게 불편을 주는 언행을 보이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흔히 '빌런'이라 일컫는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에게나 쓰이던 명칭이 이제는 일상어처럼 통용된다. 과거와 달리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나라 곳곳,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일을 접하기 너무 쉬워져서다. 옛날로 치면 '옆동네에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정도가 간접 경험의 범주였겠지만, 이제는 휴대폰만 켜면 지구 반대편의 일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니 더욱 그렇다.


빌런들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도 단골처럼 등장한다. 요즘 인기를 끄는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다수는 어쩌면 '빌런 특집'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리고 미숙한 금쪽이에서부터, 젊고 서투른 연예 리얼리티 빌런, 가정 불화의 주범인 빌런, 공공장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빌런 등등. 평범한 일상 곳곳에서 마주칠 법한 빌런들의 모습에, 패널은 물론 시청자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난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 스트레스가 올라와서 못 보는 성격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즐겨 보는 사람들이 꽤 된다. 그러다 보니 시청률도 높을 수밖에. 결혼하고 보니 아내도 '나*쏠*', '이*숙*캠*', '한문*의 블랙**' 등을 즐겨본다. 곁에서 따라 보다가 나는 울화통이 터질 지경인데, 아내는 손가락질하면서도 재밌다는 눈치다.


물론 방송을 100% 현실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할 것이다. 콘텐츠의 방향이나 출연자의 목적 등에 따라 방송이 묘사하는 모습은 실제보다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하이라이트만을 보고 그 경기가 내내 흥미진진했을 거라 여기면 안 되듯, 짜여진 프로그램을 보고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종종 놀라울 따름이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육아를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운전을 할까.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관찰형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무서운 건 충분히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라서다. 연예인도, 범죄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을 해하고, 공공질서를 교란하는 걸 보고 있자면 남의 일로만 여기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빌런을 무심코 소비하는 감정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하고, 비웃고, 손가락질하는 동안 잠시나마 안전한 위치에 서 있다는 느낌.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는, 어쩐지 근거는 확실치 않지만 묘하게 든든한 안도감 같은 것.


그래서일까. 그렇게 열심히 욕을 하다가도 채널을 돌리거나 화면을 끄는 순간, 그 감정은 생각보다 빨리 식어버린다. 조금 전까지는 세상에 저런 사람이 우리 주위에 다 있나 싶었는데, 돌아서면 우리는 다시 평소의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어쩌면 그렇게 욕하던 사람과 비슷할 지도 모르는 타인과 함께.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마구 비난하던 장면 속 어딘가에, 조금은 닮은 모습의 내가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다. 물론 방송에 나올 정도의 '레전드'는 아니었겠지만, 과거의 미숙했던 나(대개 미숙한 건 현재가 아니라 과거니까)는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충분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장면 하나쯤은 남기고 살지 않았나 하는.


그래서 요즘은 화면 속 빌런을 보며 조금 다른 생각도 해본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럴까?'를 오래 붙잡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나?'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쪽으로.


빌런이 넘쳐나는 시대라기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쉽게 여기기 쉬운 시대를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많은 빌런들 목록 어딘가에, 아주 작게라도 내 이름은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오늘도 화면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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