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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접속 기록

암흑물질

by마루

접속 기록

장편 과학 미스터리


프롤로그 — 결과가 나오기 전에


아르덴 공화국의 수도 벨루아에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건물이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


서이안 대통령은 바카라상 위에 펼쳐진 서류를 덮었다.


북부 연안 통합관측시설 설치 계획.


국가전략위원회가 제출한 마지막 보고서였다.


시설은 바다와 대기, 통신망의 변화를 동시에 관측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정부는 재난 예측과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보고서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관측 가능한 정보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국가의 미래 대응 능력을 확보한다.


미래 대응 능력.


그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미래를 안다고 믿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서이안은 개인용 태블릿을 켰다.


민간 인공지능 서비스의 대화창이 열렸다.


그는 한동안 빈 화면을 바라보다가 질문을 입력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확인할 방법은 무엇인가?


답변은 곧바로 나타났다.


판단의 결과를 관찰하고, 그 결과를 최초의 목표와 비교해야 합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인할 수는 없나?


이번 답변도 짧았다.


미래를 확정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가능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은 태블릿을 닫았다.


바카라상 위의 검은 볼펜을 집어 들었다.


서류 마지막 장에는 그의 서명만 남아 있었다.


그는 펜을 종이 위에 가져갔다가 멈췄다.


그리고 서명하지 않았다.


볼펜을 바카라상 위에 내려놓았다.


펜은 천천히 굴러가다가 바카라상 끝에서 멈췄다.


대통령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그의 질문은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섯 시간 뒤, 국가통신보안국의 자동 점검 시스템은 이상한 접속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하나의 요청에 두 개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나는 대통령 집무실.


다른 하나는 북위 0도, 동경 0도.


대서양 한가운데였다.


담당 직원은 위치정보 오류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문제는 오류가 발생한 시간이 아니었다.


오류가 기록된 방식이었다.


### 제1부 — 보이지 않는 접속


### 1장. 두 개의 좌표


윤세린은 국가통신보안국에서 십일 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였다.


상관들은 그 말을 싫어했다.


정치인들은 더욱 싫어했다.


그러나 세린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된 것처럼 말하는 순간부터 분석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 아침 그녀의 바카라상에 대통령 관련 보고서가 올라왔다.


제목은 간단했다.


국가 주요 계정의 비정상 위치정보 발생.


세린은 내용을 읽었다.


“영점 좌표?”


옆자리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면 0, 0으로 표시하는 데이터베이스가 있습니다.”


“그럼 오류잖아요.”


“그런데 같은 현상이 열일곱 번 있었습니다.”


“그 서비스 이용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서 접속 기록을 더 확인했습니다.”


직원이 화면을 돌렸다.


열일곱 건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발생했다.


정부기관, 대학, 민간 연구소, 일반 가정.


공통점은 하나였다.


모두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에 접속한 기록이었다.


세린은 보고서를 덮었다.


“서비스 제공업체의 위치정보 처리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요. 우선 원본과 가공 데이터를 구분하세요.”


“이미 했습니다.”


“그럼 결과는?”


“위치정보 오류는 가공 단계에서 발생했습니다.”


“끝났네요.”


직원은 망설였다.


“그런데 시간 정보가 이상합니다.”


화면에는 각 기록의 발생 시각과 보정값이 나란히 표시되어 있었다.


세린은 숫자를 살폈다.


“보정값을 적용하면 간격이 비슷해지네요.”


“정확히는 일정한 주기처럼 보입니다.”


“누가 보정값을 넣었죠?”


“통합 로그 분석 소프트웨어입니다.”


“원본에는 없고요?”


“없습니다.”


세린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럼 그 주기는 소프트웨어가 만든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대통령 보고서까지 올라왔습니까?”


직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국장님이 직접 보자고 하셨습니다.”


세린은 그제야 보고서 오른쪽 위에 찍힌 붉은 표시를 발견했다.


국장 직접 검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기술적인 오류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2장. 의심하는 사람


국가통신보안국장 강태윤은 군 정보기관 출신이었다.


그는 세상이 우연으로 움직인다는 설명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사건에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우연과 의도가 구별되지 않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믿었다.


“대통령의 질문이 해외 서버로 전송됐습니까?”


세린은 대답했다.


“서비스 구조상 요청이 해외 사업자의 시스템에서 처리됐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정확한 처리 경로와 보존 여부는 사업자 확인이 필요합니다.”


“질문 내용은?”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왜죠?”


“접속 위치 오류를 조사하는 데 질문 내용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태윤은 세린을 바라봤다.


“대통령의 질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불필요한 열람을 피해야 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태윤은 다른 서류를 꺼냈다.


북부 연안 통합관측시설의 장비 조달 계약서였다.


“주요 수신 장비 일부가 해외 업체 제품입니다.”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 업체의 계열사가 대통령이 사용한 AI 서비스 제공업체와 공동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동 연구가 정보 수집의 증거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태윤은 계약서를 덮었다.


“그래서 조사하자는 겁니다.”


세린은 국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원본 로그부터 확보하겠습니다.”


“그리고?”


“위치정보 처리 과정과 시간 보정 알고리즘을 검증하겠습니다.”


태윤이 물었다.


“해외 정보기관의 개입 가능성은?”


세린은 잠시 생각했다.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증거가 있다는 말은 다릅니다.”


태윤은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분을 끝까지 지키세요.”


### 3장. 서로 다른 기록


국가통신보안국은 통신 분야의 전문가들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간 보정값이 다른 관측 기록과 닮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은 합동조사팀이 구성됐다.


국가표준연구원의 시간측정 전문가 한도윤.


해양관측원의 음향 분석가 이채원.


국립천문대의 관측물리학자 백시우.


정부 기록원의 역사연구관 오민서.


그리고 조사 바카라임자 윤세린.


첫 회의에서 도윤은 가장 먼저 질문했다.


“비슷하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시우가 대답했다.


“시간에 따른 변화 형태가 닮았습니다.”


“단위가 같습니까?”


“아닙니다.”


“측정 대상은요?”


“다릅니다.”


“그럼 같은 현상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채원이 웃었다.


“아직 아무도 같은 현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윤은 화면에 세 개의 그래프를 띄웠다.


통신 로그의 보정값.


전파망원경의 관측 오차.


해저 수중청음기의 시간 보정 기록.


세 그래프에는 느리게 상승하다가 꺾이는 부분이 있었다.


“눈으로 보면 닮았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하지만 닮은 모양은 얼마든지 나옵니다. 먼저 각 장비가 같은 시간 기준을 사용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양관측원 일부 장비는 위성 시각을 받아 씁니다.”


“그럼 그 자료는 일단 제외하죠.”


시우가 말했다.


“천문대 장비도 일부는 같은 기준을 사용합니다.”


“그것도 제외합니다.”


민서가 물었다.


“그렇게 제외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조사는 끝나는 건가요?”


“그렇죠.”


그는 잠시 멈췄다.


“과학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결과입니다.”


그날 회의는 실망스럽게 끝났다.


하지만 민서는 회의록 마지막에 작은 메모를 남겼다.


서로 다른 현상을 같은 시간에 놓으려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의 기준을 선택한다.


그 문장을 읽은 사람은 없었다.


### 4장. 북부 연안


북부 연안 관측시설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콘크리트 건물 세 동과 통신탑 두 기가 해안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세린과 태윤은 현장을 방문했다.


시설 바카라임자는 그들을 중앙 관제실로 안내했다.


벽에는 바다와 대기, 통신망을 표시하는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무엇을 관측합니까?”


태윤이 물었다.


“해양 저주파, 대기 전파 환경, 통신 장애, 지진 관련 진동을 통합적으로 분석합니다.”


“민간 통신 내용도 수집합니까?”


“아닙니다. 승인된 관측 대상의 물리적 신호와 통신망 상태 정보가 중심입니다.”


“특정 IP를 좌표와 연결할 수 있습니까?”


바카라임자가 고개를 저었다.


“IP 주소는 위치 좌표가 아닙니다. 별도의 통신사 자료나 다른 위치정보가 없으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세린은 관제실 뒤쪽의 장비 목록을 살폈다.


외국산 수신기.


국산 분석 서버.


위성 시각 동기화 장치.


그리고 아직 설치되지 않은 독립형 기준 시계.


“독립형 시계는 왜 필요합니까?”


“위성 시각에 장애가 발생해도 관측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설치 예정일은요?”


“다음 달입니다.”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관측시설은 독립적인 시간 기준을 제공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태윤은 보고서에 적었다.


해외 장비를 통한 정보 유출 정황 확인되지 않음.


그 아래에 별도로 덧붙였다.


독립 시간 관측망 구축 필요성 검토.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은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게 된다.


### 제2부 — 시간의 오차


### 5장. 전송되지 않은 질문


대통령은 보안국의 중간 보고를 받았다.


“외국 정보기관이 제 질문을 읽었습니까?”


태윤이 대답했다.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사 규모가 커졌습니까?”


“접속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다른 관측 자료와 관련된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어떤 의문입니까?”


“아직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대통령은 잠시 태윤을 바라봤다.


“설명할 수 없는데 조사는 계속한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검증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서류를 덮었다.


“좋습니다. 다만 내 질문 내용은 조사하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먼저 이유를 보고하십시오.”


태윤은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대통령은 다시 태블릿을 켰다.


며칠 전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새로운 질문을 입력했다.


인간은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멈췄다.


대통령은 문장을 지웠다.


그리고 화면을 닫았다.


질문은 전송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상한 불쾌감을 느꼈다.


질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이미 누군가에게 물어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 감정을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6장. 같은 시간을 쓰는 세계


한도윤은 세 주 동안 관측 장비의 시간 기준을 조사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단순했다.


통신 로그와 천문대, 해양관측원의 자료 상당수가 같은 위성 시각 체계에 의존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나라에 설치된 장비라도 동일한 기준 시각을 받아 쓰면 비슷한 오차를 보일 수 있었다.


통합 분석 소프트웨어는 그 오차를 보정하면서 일부 자료에 인위적인 주기를 만들어냈다.


도윤은 회의실에서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가 발견했다고 생각했던 공통 패턴의 대부분은 측정 과정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태윤이 물었다.


“외부 조작은 없었습니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는 정상적인 데이터 처리 과정과 설정 오류로 설명됩니다.”


“그럼 끝난 겁니까?”


“대부분은요.”


도윤은 마지막 그래프를 띄웠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오래된 천문 관측 기록이었다.


현재의 위성 시각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수집된 자료였다.


기록에는 당시 사용한 기계식 시계의 교정 과정이 상세히 남아 있었다.


“이 자료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보입니다.”


시우가 말했다.


“작년에 검토한 자료군요.”


“맞습니다. 당시에는 관측 장비 내부 발진기의 온도 변화가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 판단을 누가 했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시우는 숨기지 않았다.


“온도 기록과 오차 변화가 상관관계를 보였고,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었습니다.”


도윤이 물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 설명이 틀렸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그럼 왜 다시 보자는 겁니까?”


시우가 잠시 침묵했다.


“당시 분석에 사용하지 않은 자료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화면을 바꿨다.


같은 밤, 다른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작성된 관측일지였다.


장비도 달랐고, 시계도 달랐다.


두 기록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 구간에서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다.


도윤은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이건 다시 계산해야겠습니다.”


### 7장. 고래가 지나간 자리


이채원은 해양관측원에서 수십 년치 수중음향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돌고래의 반향정위와 고래의 저주파 소리를 연구한 경험이 있었다.


돌고래는 자신이 내보낸 소리가 물체에 부딪혀 돌아오는 시간을 이용해 주변을 파악한다.


고래의 저주파 소리는 조건에 따라 먼 거리까지 전달된다.


잠수함의 소나 역시 소리의 전파와 반사를 이용한다.


그러나 채원은 이런 현상들을 하나의 신비한 힘으로 묶는 설명을 경계했다.


소리는 물이나 공기 같은 매질이 있어야 전달된다.


전자기파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서로 다른 현상을 모두 파장이라는 말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신호 자체보다 신호가 기록된 시간이었다.


오래된 해양관측 자료 가운데 일부는 위성 시각을 사용하지 않았다.


관측원들은 독립된 시계로 시간을 기록하고, 정기적으로 교정했다.


채원은 그 자료를 천문대 기록과 비교했다.


수십 년 전의 특정 시기에 두 관측망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오차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이 같은 현상 때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녀는 자료를 몇 번이나 다시 계산했다.


그날 밤 채원은 해안 관측소에 혼자 남아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낮고 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래의 울음이었다.


그녀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은 고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고래의 소리가 어디에서 왔고, 얼마나 이동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소리가 의미를 전달하는 것과, 소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녀는 스피커를 껐다.


그리고 보고서에 적었다.


공통 신호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음. 다만 독립 관측망의 시간 오차 비교는 계속할 가치가 있음.


그 문장은 신중했다.


하지만 조사팀을 다음 단계로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 8장. 정오가 두 번 온 날


오민서는 오래된 항해일지를 조사하고 있었다.


백 년 전, 아르덴 북부 해역을 항해하던 조사선의 기록이었다.


일지에는 이상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정오의 태양을 두 번 보았다.


당시 선장은 항해사의 계산 실수를 의심했다.


기록을 검토한 해군 조사관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경도 계산과 날짜 변경, 시계 교정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민서 역시 그 설명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지 마지막 장에 다른 필체로 쓰인 문장이 있었다.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다.


민서는 그 문장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조사했다.


며칠 뒤 오래된 인사 기록에서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항해사 류하진.


그는 조사선에 탑승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해가 끝난 뒤 기록을 검토한 해군 천문관이었다.


민서는 그의 다른 기록도 찾았다.


그는 매우 꼼꼼한 사람이었다.


장비의 오차를 기록할 때마다 사용한 시계와 관측 조건을 빠짐없이 적었다.


그가 남긴 별도 보고서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항해사의 계산은 틀렸으나, 시계의 오차는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민서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정오가 두 번 온 것은 착오였다.


그러나 그 착오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별개의 문제가 발견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래된 기록을 하나 찾았습니다.”


“또 이상한 항해일지입니까?”


“네.”


“이번에도 시간이 거꾸로 흘렀다고 적혀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민서는 웃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당시 조사관이 시간여행 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런데요?”


“그 사람이 계산 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시계의 문제를 따로 남겼습니다.”


도윤은 잠시 조용했다.


“원본을 보내주세요.”


민서는 문서를 전송했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오래된 기록은 과거의 사실만 담고 있지 않았다.


과거 사람들이 무엇을 의심했고, 무엇을 확신했는지도 담고 있었다.


### 9장. 사라진 주기


조사팀은 독립적인 시간 기준을 사용한 자료만 남겼다.


대부분의 공통 패턴이 사라졌다.


통신 기록의 주기는 분석 소프트웨어가 만든 것이었다.


해양관측 자료 일부는 위성 시각의 영향을 받았다.


천문대 자료 가운데 상당수는 온도와 장비 특성으로 설명됐다.


태윤은 회의를 소집했다.


“이 정도면 조사를 종료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보안 사고 조사는 종료해도 됩니다.”


“과학적 조사는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도윤은 세 개의 자료를 띄웠다.


백 년 전의 천문 관측 기록.


수십 년 전의 해양 관측 기록.


그리고 최근 독립형 기준 시계의 시험 기록.


“이 세 자료에는 비슷한 오차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통계적으로 충분한지 아직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우연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계속 조사하겠다고요?”


“우연인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태윤은 잠시 생각했다.


“좋습니다. 다만 국가안보 조사와는 분리하세요.”


그 결정으로 대통령의 AI 접속 기록 조사는 사실상 끝났다.


해외 정보기관의 개입을 입증할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북부 연안 관측시설의 외국산 장비도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영점 좌표는 위치정보 처리 오류였다.


모든 것이 설명됐다.


적어도 처음 조사가 시작된 이유는 그랬다.


그러나 세린은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대통령의 질문에서 출발한 조사가, 대통령의 질문과 아무 관계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그녀는 보고서 마지막에 적었다.


보안상 특이사항 없음.


그리고 개인 수첩에는 다른 문장을 남겼다.


우리가 찾던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찾지 않던 문제가 남았다.


### 제3부 — 퇴적층


### 10장. 보이지 않는 물질


백시우는 국립천문대의 지하 연구실로 조사팀을 초대했다.


그곳에서는 은하의 회전과 중력렌즈 관측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시우는 화면에 은하 사진을 띄웠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별과 가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중력 효과가 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암흑물질 이야기군요.”


“그렇습니다.”


채원이 물었다.


“그것과 시간 오차가 무슨 관계입니까?”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그래프를 띄웠다.


“다만 중력은 시간의 흐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력 환경이 시간 측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윤이 화면을 살폈다.


“지구에서 우리가 측정하는 수준의 작은 오차를 암흑물질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 자료를 보여주는 겁니까?”


시우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연구하는지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은하 사진을 가리켰다.


“암흑물질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남기는 중력적 효과를 관측하고, 가능한 설명을 검증합니다.”


민서가 물었다.


“그럼 존재를 추정하는 것과 정체를 아는 것은 다르겠군요.”


“전혀 다릅니다.”


“시간도 그렇습니까?”


도윤이 대답했다.


“시간은 암흑물질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대상이 아닙니다.”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시우는 그 질문을 오래 기억했다.


### 11장. 층을 읽는 사람


민서는 오래된 지질 조사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린 해의 퇴적층.


화산재가 쌓인 층.


화재의 흔적이 남은 흙.


과거의 사건은 사라졌지만, 물질에는 흔적이 남았다.


그녀는 문득 조사팀이 모아 놓은 기록들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시대에 남은 시간 오차.


서로 다른 장비가 기록한 미세한 변화.


그녀는 그것들이 실제로 하나의 현상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


다만 비유 하나가 떠올랐다.


시간의 퇴적층.


민서는 그 표현을 시우에게 말했다.


시우는 웃었다.


“문학적인 표현이네요.”


“과학적으로는 틀렸습니까?”


“시간이 지층처럼 쌓인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표현을 쓰셨습니까?”


민서는 잠시 생각했다.


“역사가의 직업병일 겁니다. 우리는 지나간 사건을 직접 볼 수 없어요. 남아 있는 흔적을 모아 과거를 재구성하죠.”


“과학도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차이가 뭡니까?”


시우는 대답을 고르다가 말했다.


“우리는 재구성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검증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민서는 미소 지었다.


“역사가도 그러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잠시 웃었다.


그 대화는 그날의 회의록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시우는 나중에 연구 제안서의 첫 페이지에 한 문장을 적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독립 관측 기록에 남은 공통 오차의 존재 여부를 검증한다.


그 문장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시간의 퇴적층 가설.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연구실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별명이었다.


### 12장. 연결


독립 관측망의 추가 실험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연구진은 서로 다른 장소에 기준 시계를 설치했다.


일부는 위성 시각을 사용했고, 일부는 독립적으로 작동했다.


측정 결과를 서로 비교할 때는 원본 자료를 보존하고, 보정 과정과 알고리즘을 모두 기록했다.


그들은 이전처럼 눈으로 닮은 그래프를 찾아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형 시계 두 대에서 미세한 오차 변화가 발견됐다.


도윤은 먼저 장비 이상을 의심했다.


온도.


전원.


진동.


자기장.


소프트웨어.


모든 항목을 점검했다.


오차는 재현되지 않았다.


그는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실험을 반복했다.


다시 몇 달이 지났다.


그사이 정부는 북부 연안 관측시설을 완공했다.


대통령은 사업 승인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시설은 정상적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특별한 신호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태윤은 오히려 안도했다.


그는 연구팀에 말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사업은 아닙니다.”


도윤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날 밤 시우는 독립 관측 자료를 정리하다가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 설치된 기준 시계의 기록과 오래된 천문 관측 자료를 비교했을 때, 아주 짧은 구간에서 유사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는 즉시 도윤에게 연락했다.


도윤은 자료를 검토하고 말했다.


“통계적으로 우연일 가능성을 먼저 계산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패턴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졌는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흥분하십니까?”


시우가 대답했다.


“처음으로 원본 자료를 보정하지 않고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파일을 보내세요.”


그날 이후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 13장. 잘못된 발견


연구팀은 국제 학술회의에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반응은 냉담했다.


일부 과학자는 통계적 우연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과학자는 서로 다른 장비의 오차를 비교하는 방법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도윤은 그 비판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회의에서 말했다.


시우는 실망했다.


채원은 오히려 안심했다.


민서는 조용히 기록을 정리했다.


몇 주 뒤 외부 검증팀이 중요한 문제를 발견했다.


연구진이 사용한 비교 알고리즘은 서로 다른 길이의 자료를 정렬하는 과정에서 일부 패턴을 과장하고 있었다.


시우는 결과를 확인하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도윤이 말했다.


“이건 수정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논문도 철회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들은 연구 결과를 정정했다.


국제 학술지는 짧은 기사를 실었다.


아르덴 연구팀, 시간 오차의 공통 패턴에 관한 기존 해석 수정.


언론은 더 간단하게 보도했다.


정부 비밀 연구, 결국 착각이었다.


태윤은 조사 종료를 지시했다.


대통령도 보고를 받았다.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겁니까?”


태윤은 대답했다.


“확인된 새로운 물리 현상은 없습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오민서는 연구팀의 최종 보고서를 읽다가 한 문장을 발견했다.


비교 알고리즘의 오류를 제거한 후에도 일부 원본 기록 간의 불일치는 남아 있으나,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것은 발견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명도 아니었다.


### 제4부 — 관측자


### 14장. 아무도 오지 않는 우주


연구가 종료된 뒤에도 백시우는 천문대에 남았다.


그는 본래의 연구로 돌아갔다.


은하의 회전.


중력렌즈.


암흑물질의 분포.


어느 날 밤 민서가 천문대를 찾아왔다.


“아직도 그 자료를 보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시우는 화면을 가리켰다.


“원래 하던 연구입니다.”


민서는 의자에 앉았다.


창밖에는 별이 보였다.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우주에는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우가 웃었다.


“정확한 수는 모릅니다.”


“그렇게 많은 별이 있는데, 왜 우리는 아직 다른 문명의 확실한 신호를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페르미 역설이군요.”


“네.”


“가능한 설명은 많습니다. 생명 자체가 드물 수도 있고, 문명의 지속 기간이 짧을 수도 있고,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했을 수도 있죠.”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 가능성은 왜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가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요.”


시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관측 가능한 우주 너머가 있다는 뜻입니까?”


“그보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민서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가 어떤 거대한 체계 안에 있고, 그 체계가 허용하는 범위만 관측할 수 있다면요?”


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게임 속 인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 안에서는 모든 자연법칙이 완벽하게 작동합니다. 별도 있고, 중력도 있고, 시간도 흐릅니다.”


“시뮬레이션 가설이군요.”


“그렇습니다.”


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흥미로운 철학적 가설이지만, 현재로서는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민서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몇 달 동안 한 일이 이상해서요.”


“무엇이요?”


“우리는 시간의 오류를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오류를 제거할수록 우리가 사용한 기준 자체를 더 많이 의심하게 됐습니다.”


시우는 웃었다.


“그건 과학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렇겠죠.”


민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궁금했습니다.”


시우가 물었다.


“무엇이 가장 궁금합니까?”


민서는 잠시 멈췄다.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 법칙이 자연의 법칙인지 누군가 정해 놓은 규칙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시우는 한참 생각했다.


“구별할 수 있는 관측 결과가 없다면, 과학적으로는 두 설명을 나눌 이유가 없겠죠.”


민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날 밤의 대화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 15장. 남겨진 문장


몇 달 뒤, 윤세린은 국가통신보안국의 기록 보존 정바카라을 검토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AI 접속 기록 조사도 보존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


그녀는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위치정보 오류.


시간 보정 알고리즘.


해외 장비 계약.


북부 연안 시설.


모두 결론이 나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출발점이 된 대통령의 질문 내용은 여전히 열람하지 않은 상태였다.


세린은 보존 담당자에게 물었다.


“질문 내용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대통령실 승인 없이는 열람하지 않습니다. 원본은 별도 보존 절차에 따릅니다.”


“그럼 조사 기록에는 내용이 없겠네요.”


“네.”


세린은 잠시 생각했다.


“그게 맞습니다.”


그녀는 파일을 닫았다.


그때 보존 담당자가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습니다.”


세린은 다시 화면을 봤다.


“뭔데요?”


“조사 기록의 최초 생성 시각이 원본 접속 시각보다 빠릅니다.”


“얼마나요?”


“아주 조금입니다.”


“시계 오차겠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


서로 다른 시스템의 시간 기준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기록의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그녀는 해당 항목에 주석을 달았다.


시스템 간 시각 동기화 차이로 추정.


그리고 파일을 보존 처리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사건에 관해 마지막으로 작성한 문장이었다.


### 16장. 서명


대통령 서이안은 임기 마지막 해를 맞고 있었다.


북부 연안 관측시설은 이제 평범한 국가 연구시설이 됐다.


재난 예측 자료를 제공했고, 해양 통신 장애를 감시했으며, 국제 공동연구에도 참여했다.


처음 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거의 잊혔다.


어느 오후 대통령은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다가 북부 연안 관측시설 설치 계획서를 발견했다.


첫 장에는 승인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는 문서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 자신의 서명이 있었다.


서이안은 잠시 그 서명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 보고서를 받았던 새벽을 기억했다.


AI에게 질문을 했던 일도 기억했다.


그리고 서명하지 않았던 일도 기억했다.


하지만 그 뒤에 다시 보고서를 받아 서명했으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대통령은 서류를 덮었다.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대통령님, 기록관에서 퇴임 후 이관할 자료 목록을 보내왔습니다.”


“놓고 가세요.”


비서실장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대통령은 바카라상 위의 검은 볼펜을 집어 들었다.


오래 사용한 펜이었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이 펜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죠?”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취임 초기부터 사용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웃었다.


“그렇겠죠.”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날 밤 대통령은 오래된 AI 대화를 다시 열었다.


처음 두 개의 질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확인할 방법은 무엇인가?


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인할 수는 없나?


그는 대화를 읽다가 잠시 미소 지었다.


젊었을 때의 자신이 얼마나 조급했는지 떠올랐다.


그는 화면을 닫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태블릿을 서랍에 넣었다.


볼펜은 바카라상 끝에 놓여 있었다.


### 17장. 마지막 검토


오민서는 정부 기록원에서 연구팀의 자료를 최종 정리하고 있었다.


공식 연구는 종료됐지만 자료는 남았다.


그녀는 모든 문서를 시간순으로 배열했다.


대통령의 접속 기록.


국가통신보안국의 조사.


해양관측원의 자료.


천문대의 기록.


오래된 항해일지.


독립형 시계의 실험.


그리고 국제 학술지의 정정 논문.


처음에는 서로 관계없는 기록이었다.


조사팀은 그 안에서 하나의 공통 현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서로 다른 원인으로 설명됐다.


민서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는 닮았지만 서로 관계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을 구분하는 일이야말로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녀는 오래된 항해일지를 마지막으로 펼쳤다.


정오의 태양을 두 번 보았다.


그 아래에 적힌 문장.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다.


민서는 류하진의 별도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그는 항해사의 계산 착오를 인정하면서도, 시계의 오차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서는 문득 웃었다.


백 년 전의 조사관도 지금의 연구팀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하나의 오류를 설명했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문서를 덮었다.


그때 바카라상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툭.


민서는 고개를 숙였다.


볼펜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펜을 주워 바카라상 위에 올려놓았다.


검은색의 평범한 볼펜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펜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서류가 너무 많았다.


민서는 컴퓨터를 끄고 퇴근했다.


### 에필로그 — 관측되지 않은 것


아르덴 공화국의 대통령 기록관은 퇴임 대통령의 공식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기록관리사 한 명이 오래된 영상 파일을 확인했다.


대통령 집무실의 보안 카메라 영상이었다.


카메라는 출입문과 서류 보관 구역을 촬영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개인용 태블릿 화면은 보이지 않았다.


기록관리사는 영상의 날짜를 확인했다.


북부 연안 관측시설 설치 계획서가 처음 제출된 날이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


대통령은 바카라상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그는 검은 볼펜을 집어 들었다.


서류 위에 가져갔다가 멈췄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펜은 천천히 굴러갔다.


바카라상 끝에서 멈췄다.


기록관리사는 영상을 정지했다.


그는 서류 목록과 영상의 시간을 대조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화면 한쪽에 놓인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였다.


시계는 두 시 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록관리사는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초침이 움직였다.


한 바퀴.


그리고 또 한 바퀴.


그는 영상의 재생 시간을 확인했다.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벽시계의 분침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관리사는 웃었다.


오래된 시계가 고장 난 모양이었다.


그는 영상을 닫으려다가 잠시 멈췄다.


화면 속 대통령이 다시 볼펜을 집어 들고 있었다.


기록관리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에도 같은 장면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재생 위치를 확인했다.


분명히 앞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볼펜을 서류 위에 가져갔다.


잠시 멈췄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볼펜이 굴러갔다.


바카라상 끝에서 멈췄다.


기록관리사는 영상을 되감았다.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그는 파일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상 인코딩 과정에서 일부 구간이 중복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원본 파일을 요청했다.


원본도 같았다.


기록관리사는 기술 담당자에게 연락했다.


“영상이 이상합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같은 행동이 반복됩니다.”


“반복 녹화된 겁니까?”


“아니요. 시간이 앞으로 가는데 행동이 반복됩니다.”


담당자는 잠시 침묵했다.


“파일을 보내주세요.”


기록관리사는 파일을 전송했다.


그리고 다시 영상을 보았다.


대통령이 볼펜을 집어 들었다.


서류 위에 가져갔다.


멈췄다.


내려놓았다.


펜이 굴러갔다.


바카라상 끝에서 멈췄다.


그 순간 화면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툭.


기록관리사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바카라상 아래에 볼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는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웃으며 주웠다.


그런 우연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 속 대통령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대통령의 손에 검은 볼펜이 들려 있었다.


바카라상 끝에도 같은 볼펜이 놓여 있었다.


기록관리사는 영상을 멈췄다.


두 개의 볼펜.


그는 화면을 확대했다.


바카라상 끝의 펜은 분명했다.


대통령 손에 들린 것도 펜처럼 보였다.


하지만 화질이 좋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파일을 닫았다.


영상 오류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기술 담당자에게 보낸 메일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영상의 시간 순서와 물체의 위치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메일을 전송한 뒤 기록관리사는 퇴근했다.


건물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날 밤, 대통령 기록관의 자동 보존 시스템은 새로 등록된 영상 파일을 검사했다.


파일의 무결성은 정상이었다.


재생 시간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메타데이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항목 하나가 남아 있었다.


파일의 최초 생성 시각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AI 질문이 전송된 시각보다 조금 빨랐다.


시스템은 이를 시각 동기화 오류로 분류했다.


그리고 자동으로 보정했다.


그 순간 파일의 생성 시각이 바뀌었다.


대통령의 질문 이후로.


모든 기록이 정상적인 순서로 정렬됐다.


보존 시스템은 작업 완료를 표시했다.


아무도 그 변화를 보지 못했다.


몇 년 뒤.


국립천문대의 백시우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오래된 연구 자료를 정리하다가 오민서가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우리가 어떤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지 누군가 정해 놓은 규칙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시우는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그는 여전히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창밖에는 별이 떠 있었다.


우주는 조용했다.


시우는 문득 오래전 민서가 했던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왜 아무도 우리에게 오지 않는가.


그는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일 것이다.


어쩌면 우주는 너무 넓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생명은 생각보다 드문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그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바카라상 위에 놓인 작은 라디오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시우는 전원을 끄려다가 멈췄다.


잡음 사이에 아주 짧은 간격이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라디오를 껐다.


방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바카라상 위의 볼펜 하나가 천천히 굴러갔다.


시우는 그것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는 잠시 펜을 바라봤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바카라상은 평평했다.


그러나 오래된 건물에서는 작은 진동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는 웃었다.


그리고 펜을 서랍에 넣었다.


그 순간, 서랍 안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딸깍.


시우는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똑같은 검은 볼펜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두 개의 펜을 꺼내 나란히 놓았다.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 넣어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는 불을 끄고 연구실을 나갔다.


바카라상 위에는 두 개의 볼펜이 남았다.


잠시 후, 아무도 없는 방에서 라디오가 켜졌다.


잡음이 흘렀다.


그리고 아주 짧은 음성이 들렸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확인할 수는 없나?”


라디오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음성이 대통령의 목소리였는지, 누군가의 녹음이었는지, 우연히 잡힌 방송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질문은 오래전 대통령이 인공지능에게 입력했던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라디오의 작은 표시등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멈췄다.


다음 순간, 바카라상 위의 볼펜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아무도 듣지 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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