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을 보는 당신의 마음

by정용우

젊었을 적, 나는 산을 오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했고, 국내 명산은 물론, 다른 나라 명산도 두루 걸었다. 특히 중국의 명산은 여러 차례 다녀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무엇보다 건강상의 이유로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몸이 허락하지 않으니, 산행은 점점 더 그리운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내게 요즘 위로가 되는 것이 바로 ‘대리여행’이다. 유튜브 영상이나 여행 블로그,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른 사람의 여행을 대신 경험하는 것인데, 물론 실제로 그곳을 걷는 것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감동과 기쁨이 있다. 특히 자연 풍광을 다룬 프로그램은 화면만으로도 공기, 소리, 분위기가 생생히 전해진다. 잠시 동안이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을 경험하는 느낌은 여전히 내 안에 여행의 불씨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직접 걷기보다는, EBS <세계테마기행>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명산의 정취를 간접적으로 즐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음은 여전히 산에 있고, 눈은 화면을 좇는다. TV 앞에 앉아 있지만, 영혼은 어느새 능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중국 명산을 소개하는 편을 시청하게 되었다. 익숙한 산이 많았지만, 낯선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신선거(神仙居)’라는 산이다.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명소라고 했다. 중국 저장성 타이저우시 셴쥐 현에 위치한 이 산은 이름부터 남다르다. 한자 그대로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 산은 실제로 천상의 풍경을 자랑한다. 기기묘묘한 암벽과 탁 트인 조망,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놓인 다리들은 자연이 빚은 예술이었다.


산행 중 만난 가족을 통해, 진행자는 정자에서 쉬고 있던 한 할아버지를 소개받았다. 무려 85세의 연세에도 가족들과 함께 신선거를 오른다는 사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신선이 사는 산에 오르시니 기분이 어떠세요?” 했더니,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다. “나는 신선 따위는 믿지 않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다 신선이지.”


짧은 한마디에 큰 울림이 있었다. 육신을 이끌고 험한 산을 오르는 일도 대단하지만, 그 연세에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그의 인생이 담긴 철학이자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산의 이름보다 그 이름에 담긴 속뜻을 더 깊이 새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신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신선봉, 신선대, 신선암 등 그 이름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의 풍경이 너무도 빼어나 신선이 노닐었을 것 같다는 이미지다. 대부분은 단하절경이나 암릉이 수려한 곳이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신선’은 그 풍경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있는 건 아닐까.


산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욕심을 내려놓게 된다. 처음엔 정상에 오르겠다는 목표로 시작하지만, 이내 숨을 고르며 자연의 소리와 빛, 공기에 젖어든다. 나 자신이 자연 속의 한 조각이 되어감을 느낀다. 그 순간, 사람은 선해진다. 조바심도, 아집도 흘러내린다. 그렇게 마음이 맑아지고 선해질 때,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봉우리와 바위가 곧 신선대가 되고 신선봉이 된다.


‘신선거’의 할아버지 말처럼, 신선은 어디 하늘 높은 곳에 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욕심을 덜고, 선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선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 바로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이 신선이 머무는 곳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다. 산이 높고 경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풍경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비워낼 수 있기에 명산은 명산인 것이다. 산행을 통해 우리가 닿는 곳은 단지 정상만이 아니다. 그것은 선한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고지에 오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면, 굳이 높은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우리 삶의 자리가 곧 신선이 머무는 곳이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흙길을 걷는 촉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그런 작은 자연의 요소들이 내 마음을 정화시키는 곳, 그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 우리가 바로 신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미 그 고귀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끝)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귀향, 자기 자신이라는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