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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의 아키텍처

by김경훈

얼마 전 주말 보보와 부엌 찬장과 약상자를 정리했다.


방식은 단순했다.

보보가 물건을 하나씩 꺼내 이름과 날짜를 읽어 주고

나는 그걸 손으로 받아 자리를 정했다.

버릴 것과 남길 것과 먼저 먹을 것.


그런데 하다 보니 나는 보보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과

반드시 물어야 하는 것을 나누고 있었다.


보보는 처음엔 재밌어했다.

30분쯤 지나자 목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작은 글씨를 계속 소리 내어 읽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날 보보가 읽은 글자 수를 다 더하면 짧은 논문 한 편쯤은 됐을 것이다.


나는 그게 미안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드는 구조가 조금 억울했다.

포장에 적힌 정보는 원래 나에게도 적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글은 그날 내 손을 거쳐 간 물건들의 목록이다.

물건마다 내가 혼자 알 수 있었던 정보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적었다.





캔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건 캔 음료였다.


뚜껑 근처를 손끝으로 훑으면 점자가 있다.

음료.


많은 캔이 그렇다.

음료나 탄산 같은 두 글자에서 멈춘다.


그러니까 나는 이게 마실 것이라는 건 안다.

콜라인지 사이다인지 커피인지는 모른다.

설탕이 들었는지 카페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걸 처음 알았을 때 나는 조금 웃었다.

캔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이건 음료입니다라고 알려 주는 건

바카라을 펼친 사람에게 이건 글자입니다라고 알려 주는 것과 비슷하다.


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이건 꽤 실제적인 문제가 된다.

같은 크기의 캔이 줄지어 있고 손끝에는 모두 같은 두 글자가 만져진다.

나는 콜라를 사려다 커피를 마신 적이 있고

탄산수를 사려다 단 음료를 마신 적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맛으로 그 캔의 이름을 알게 된다.

뜯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정보는 선택이 아니라 확인이다.


물론 그 두 글자도 없던 시절보다는 낫다.

다만 그 두 글자가 해 주는 일은 구별이다.

판단이 아니다.


점자는 원래 두 글자에 머무는 문자가 아니다.

소설 한 권을 다 담을 수 있는 문자 체계다.

문제는 점자가 아니라 포장이 점자에게 내어 준 자리의 크기다.





즉석식품



다음은 컵라면과 즉석 국 몇 개였다.


어떤 컵라면 뚜껑에는 제품 이름이 점자로 찍혀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 이름으로 나는 매운 것과 순한 것을 고를 수 있다.


그런데 먹으려면 이름 다음이 필요하다.

물을 어디까지 부어야 하는지.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전자레인지에 넣어도 되는 용기인지.

분말 수프를 먼저 넣는지 나중에 넣는지.


이건 포장 옆면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나는 보통 휴대폰 카메라로 그 면을 찍어 AI에게 읽게 한다.

대체로 잘 읽는다.

다만 가끔 틀린다.


조리법의 물 양을 다른 숫자로 읽은 적이 있다.

글자가 구겨진 면에 있었고 AI는 망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틀렸다.

나는 국물이 이상하게 싱거워서야 알았다.


라면이 싱거운 건 웃고 넘길 수 있다.

같은 일이 약 상자에서 일어나면 이야기가 다르다.





약상자



약상자를 열자 종이 상자 몇 개와 낱알 포장 몇 장이 나왔다.


어떤 상자에는 제품명이 점자로 있었다.

감기약인지 소화제인지 정도는 혼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약은 이름만으로 먹을 수 없다.

성분과 함량.

한 번에 몇 알인지.

하루에 몇 번인지.

식전인지 식후인지.

같이 먹으면 안 되는 것.

보관 방법.

사용기한.


약국에서 받은 조제약 봉투도 마찬가지다.

봉투에는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인쇄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그걸 구별하려고 봉투마다 고무줄을 하나 둘 셋 감아 둔다.

내가 만든 점자인 셈이다.


이 정보는 상자 안에 접혀 들어 있는 설명서에 있다.

설명서는 대개 아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접혀 있고

펼치면 바스락 소리가 길게 난다.

그 소리만큼 정보가 많다는 뜻이지만 나에게는 소리로만 남는다.


인도의 Shetty 등은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성인 시각장애인과 저시력인 100명에게 맞춤형 점자 처방을 제공하고 전후를 조사했다.

처방에는 약 이름뿐 아니라 용량과 사용 지침과 사용기한과 주요 부작용이 들어 있었다.

잘못된 용량을 먹었다고 답한 비율이 46.2%에서 5%로 낮아졌다.


설문 기반 관찰 연구라서 이 차이를 모두 점자 처방 덕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하다.

이름 다음의 정보가 손에 닿으면 사람은 덜 틀린다.


그날 보보가 진통제 상자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이거 사용기한 지났다.


나는 그 상자를 지난달에도 열어 봤다.

그때는 몰랐다.

상자 어디에도 손으로 읽을 수 있는 날짜는 없었다.


사실 그날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그 상자를 AI로 한 번 찍어 봤다.

AI는 날짜 하나를 또박또박 읽어 주었다.

나는 아직 괜찮다고 생각했다.


보보가 상자를 받아 들고 다시 보더니 말했다.

그건 제조일자야.

사용기한은 그 아래 있어.


AI는 숫자를 정확히 읽었다.

그 숫자가 무엇의 숫자인지를 틀렸다.

글자를 읽는 일과 정보를 이해하는 일은 다르다.





우유



냉장고 정리는 우유에서 시작됐다.


우유팩 윗부분에는 손으로 구별할 수 있는 작은 홈이 있는 경우가 있다.

우유라는 걸 알려 주는 표시다.


그런데 냉장고 안의 우유 두 팩 중 어느 게 먼저 산 건지는 모른다.

소비기한은 팩마다 다르게 찍혀 있다.


여기서 하나 짚을 것이 있다.


같은 제품이라도 생산 시기와 제조 단위에 따라 사용기한과 일부 정보가 다르다.

제품 홈페이지에 있는 일반 소개는 모든 우유에게 같은 말을 하지만

내 손에 들린 이 팩의 날짜는 이 팩에만 있다.


그래서 포장의 코드가 어떤 정보를 불러오는지가 중요하다.

코드가 이 우유 제품 전체의 소개를 불러오는지

지금 내 손에 있는 바로 이 팩의 정보를 불러오는지.


문헌정보학으로 말하면 이건 저작과 개별 자료의 차이다.

같은 바카라이라도 판과 쇄가 다르면 다른 기록이 된다.

접근성 서비스가 믿을 만하려면 눈앞의 그 물건과 정확히 맞는 기록을 불러와야 한다.





하나만 고른다면



정리가 거의 끝났을 때 보보가 물었다.


자기는 포장에서 딱 하나만 혼자 읽을 수 있다면 뭘 고를 거야.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날짜.


이름은 모양이나 냄새나 무게로 짐작할 수 있다.

맛은 뜯어 보면 안다.

그런데 날짜는 어떤 감각으로도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날짜는 틀리면 몸이 먼저 안다.


보보가 그럼 날짜는 왜 늘 제일 작게 찍혀 있냐고 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몇 해 전 우리나라 식품 표시는 유통기한에서 소비기한으로 바뀌었다.

파는 사람 기준의 날짜에서 먹는 사람 기준의 날짜로 바꾼 것이다.

좋은 변화다.

다만 그 날짜를 읽을 수 있는 먹는 사람의 범위는 그대로다.


먹는 사람 기준이라는 말이 정말 먹는 사람 모두를 기준으로 하려면

그 날짜가 손끝이나 귀에도 닿아야 한다.

작게 찍힌 숫자 몇 개가 사실은 그 포장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라는 걸

포장을 만드는 사람들이 한 번쯤 눈을 감고 손끝으로만 확인해 봤으면 좋겠다.





코드는 어디에



스마트폰 카메라와 큐알코드와 AI는 분명히 길을 넓힌다.


포장의 코드를 읽어 공식 제품 정보를 불러오고

그걸 음성이나 큰 글씨로 듣거나 보고

궁금한 걸 다시 물을 수 있다.

점자를 읽는 사람에게는 정보의 길이 하나 더 생기고

점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생긴다.


그런데 지난번 글에서 쓴 테이블 위 큐알코드처럼

코드는 먼저 찾아야 쓸 수 있다.


나는 그날 우유팩을 손에 들고 코드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카메라를 팩의 네 면에 차례로 대 보았다.

그건 보물찾기와 비슷했다.

보물이 사용기한이라는 점만 빼면.

보보는 옆에서 보물 지도라도 그려 줄까 하며 웃었다.

지도가 필요한 포장이라면 그 포장은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그리스의 Terzopoulos 등은 포장에 손으로 만져지는 양각 큐알코드를 넣고 모바일 앱과 연결하는 방안을 연구했다.

시범 평가에서 이용자들은 앱의 유용성과 사용 편의성을 좋게 평가했다.

작은 시범이라 큰 효과를 말하기는 이르지만

손으로 찾을 수 있는 표시와 디지털 정보를 잇는다는 발상은 정확하다.


정보의 양만이 아니라 정보에 들어가는 문의 위치까지 설계해야 한다.


시장에서도 시도가 있다.

한 글로벌 시리얼 회사는 영국의 시각장애인 단체와 함께

멀리서도 카메라가 알아보는 색상 인식 코드를 포장에 넣었다.

태국에서는 한 식품 브랜드가 시각장애인 지원 앱과 손잡고

컵죽 포장의 코드로 원재료와 영양 정보와 조리법을 음성으로 안내하고 질문까지 받게 했다.

알아보는 단계에서 끓여 먹는 단계까지 이어 준 것이다.


다만 기업의 도입 사례와 학술적으로 확인된 효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바르셀로나의 대중교통은 같은 종류의 코드로 정류장과 노선과 도착 예정 시간과 지하철 시설 정보를 알려 준다.

2011년 López-de-Ipiña 등은 진열대의 큐알코드와 스마트폰 카메라로 시각장애인의 장보기를 돕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물건에서 진열대로 진열대에서 정류장으로.

정보가 이어지면 장보기는 집 앞에서 시작해 부엌에서 끝난다.





AI의 말투



AI는 이 연결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자리를 정해야 한다.


Xie 등은 시각장애인용 AI 이미지 설명 서비스 이용자 14명을 인터뷰하고 설명 자료를 분석해

환각과 맥락 오해와 사용자 의도 파악의 한계를 확인했다.

Alharbi 등이 시각장애인 26명과 한 연구에서도

이용자들은 자기 감각과 다른 서비스와 주변 사람의 도움을 섞어 AI의 답을 검증했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그날의 찬장 정리를 떠올렸다.


나도 그렇게 한다.

AI가 읽어 준 걸 손끝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다른 앱으로 한 번 더 찍어 보고

그래도 애매하면 보보를 부른다.


보보는 나의 검증 단계다.


AI의 문제는 틀린다는 게 아니다.

사람도 틀린다.

문제는 틀릴 때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능력과 정확한 정보를 보장하는 능력은 같은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약과 식품의 필수 정보에서는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먼저 제조사와 약국이 확인한 공식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체계가 있고

AI는 그 정보를 찾아 읽어 주고 쉽게 풀어 주는 역할을 맡는다.


복용량과 금기와 알레르기 유발 물질처럼 안전에 걸린 항목은 요약에서도 빠지면 안 된다.

개인에게 맞는 복약 지침은 처방과 조제 정보에 이어져야 하고

판단이 필요한 질문은 약사에게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 듣는 말이 AI가 사진을 보고 짐작한 말인지

제조사나 약국이 확인한 말인지를 이용자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목소리로 읽어 주면 나는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보를 만드는 사람



결국 이건 포장 디자인보다 앞의 이야기다.


제조사는 약과 식품과 생활용품의 필수 정보를

기계가 읽고 서비스가 일관되게 쓸 수 있는 형태로 내놓고

제품이 바뀌면 그 정보도 바꿔야 한다.


포장에는 점자와 촉각 표시와 큰 글씨와 높은 명도 대비와 접근성 코드가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코드는 늘 같은 자리에 두어 찾기 쉽게 하고

연결된 화면은 보이스오버와 글자 확대와 단계별 안내를 지원해야 한다.

스마트폰이나 통신이 어려운 상황을 생각해 포장 자체의 정보와 다른 안내 수단도 남겨 두어야 한다.


가전도 마찬가지다.

지난번 에어컨 이야기에서 썼듯이

디지털 설명과 함께 손으로 구별되는 조작부와 분명한 작동 상태 피드백이 있어야 한다.


유통업체는 그 정보를 구매와 사후 서비스로 이어야 한다.

진열 정보와 실제 상품이 맞는지.

온라인과 매장의 가격과 제품 정보가 같은지.

성분이나 보관 조건을 물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약국에서는 조제된 약과 복약 안내가 정확히 이어지는지.

그리고 상담과 교환과 반품 절차까지 접근 가능한지.


물건을 산다는 건 계산대를 통과하는 순간이 아니다.

고르고 쓰고 관리하고 고치고 돌려보내는 긴 과정이다.


나는 반품할 때가 제일 막막하다.

상자에 붙은 송장 번호를 읽어야 하고

반품 신청 화면에서 사유를 고르고 사진을 올려야 한다.

물건을 고르는 일보다 돌려보내는 일이 더 많은 눈을 요구한다.

접근성이 구매 버튼에서 멈추면 소비자는 사는 순간까지만 소비자다.





다른 손



한 가지를 더 적어 둔다.


내가 쓴 이야기는 대부분 시각장애인의 이야기이고

앞에 소개한 연구들도 주로 시각장애인과 저시력 이용자를 대상으로 했다.


그런데 뇌병변장애나 상지 운동장애가 있는 소비자에게는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 방향을 맞추는 일 자체가 어렵다.

음성 입력도 모두에게 맞지는 않는다.


자동 인식과 넉넉한 대기 시간과 스위치 입력과 거치대와

휴대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 근거리 무선 통신과 제품명 검색 같은 대안이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실제 당사자가 직접 써 보는 방식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점자를 읽는지와 얼마나 보이는지와 손을 어떻게 쓰는지와 어떻게 의사소통하는지.

그 차이를 많이 반영할수록 하나의 서비스가 닿을 수 있는 소비자의 범위도 넓어진다.





제목: 포장의 아키텍처 혹은 이름 다음의 정보.


그날 찬장 정리에서 내가 혼자 알 수 있었던 건 대부분 이름이었다.

음료.

제품명.

감기약.

우유.


내가 보보에게 물어야 했던 건 대부분 이름 다음이었다.

무슨 맛인지.

물을 얼마나 붓는지.

몇 알을 언제 먹는지.

언제까지 먹어도 되는지.


구별할 수 있다는 것과 선택하고 쓸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결론: 상품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상품을 동등하게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소비자 주권은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자기 뜻대로 고르고 쓸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성과의 기준도 표시를 몇 개 붙였느냐가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한 정보를 정확히 얻고 실제로 썼느냐여야 한다.


정확하고 접근 가능한 정보가 고르는 순간부터 버리는 순간까지 이어질 때

접근성은 배려가 아니라 제품의 기본 품질이 된다.


그나저나 그날 찬장 맨 아래 칸에서 탱고 사료 봉지가 나왔다.

그 봉지에는 점자도 코드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봉지 입구를 여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탱고가 부엌으로 걸어왔다.

녀석은 이름도 성분도 소비기한도 필요 없다.

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로 모든 정보를 얻는다.

그날 우리 집에서 포장 접근성이 가장 완벽한 물건은 탱고 사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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