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랑 지키

by김경훈

향수에게 무엇을 그렸느냐고 물으면 대개 대답이 돌아온다.


라 튤립은 꽃집 냉장고를 그렸고 플라워 마켓은 꽃시장 바닥을 그렸다. 웬 더 레인 스탑스는 비가 그치는 순간을 그렸고 비블리오테크는 서재를 그렸다. 이 연재가 27편 동안 만난 향수들은 거의 다 무언가를 가리켰다. 장소든 계절이든 꽃 한 송이든.


오늘의 면담 상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저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1889년 에메 겔랑이 만든 지키다. 지난 호에서 샬리마의 몸 대부분을 이루는 문장이라고 소개한 향수다. 오늘은 한 줄이 더해지기 전의 원고를 읽으러 왔다.


장소는 약령시다. 대구 남성로 약전골목. 1658년 조선 효종 때 봄가을 두 번 서던 약재 장에서 시작했으니 올해로 368년째다. 골목에 들어서면 소리보다 냄새가 먼저 온다. 감초의 단내와 당귀의 쌉쌀한 흙내와 계피의 매운 단내가 가게마다 다른 비율로 섞여 흘러나온다. 어느 가게에서는 약재 써는 칼날이 도마를 규칙적으로 두드렸고 어느 가게 앞에서는 저울 접시에 마른 뿌리가 떨어지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탱고는 골목 초입부터 코를 낮췄다. 한 걸음마다 정보가 너무 많은 길이다.


지키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에메 겔랑의 조카 자크 겔랑의 어릴 적 별명이라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에메가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사귄 연인의 애칭이라는 설이다.


첫 번째 설이 맞다면 재미있는 고리가 생긴다. 30여 년 뒤 그 조카가 이 향수에 에틸 바닐린을 부어 샬리마를 만들었다. 자기 어릴 적 별명이 붙은 병에 한 줄을 보태 자기 대표작을 쓴 셈이다. 헌사를 받은 사람이 그 헌사를 원고 삼아 다음 바카라을 쓴 것과 같다.


두 설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헌정 대상이 불분명한 헌사.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편지가 137년째 같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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