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의 그 서점은 조용하다.
삼덕동 골목 안쪽에 있는 인문 서점이고 주말에만 문을 연다.
문을 밀면 종이 냄새가 먼저 오고 그다음에 나무 바닥 소리가 온다.
탱고는 이 집 바닥을 좋아한다. 창가 쪽 자리가 오후에 따뜻해서 그렇다.
바카라방은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불친절한 공간이어야 마땅하다.
바카라은 전부 표지로 말하고 서가는 눈으로 훑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집에 3년째 다니고 있고 여기서 산 바카라이 마흔 권쯤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서점에서는 사람들이 바카라 제목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것은 아무도 배려라고 부르지 않는 배려에 관한 기록이다.
소리 내어 읽는 서점
처음 시작한 건 사장님이었다.
3년 전 내가 처음 갔을 때 사장님은 나에게 무엇을 도와줄지 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혼잣말처럼 읽었다.
"이번 주 신간 쪽이 여기고요. 왼쪽부터 니체 관련서 두 권 조르주 페렉 산문집 그리고 두꺼운 슬롯학 바카라 하나."
나는 그게 나에게 하는 말인지 몰라서 잠깐 가만히 있었다.
사장님은 계속 읽었다.
그러다 이렇게 덧붙였다.
"뒤쪽에 헌바카라 코너 새로 만들었는데 거기는 정리가 안 돼서 순서가 뒤죽박죽입니다."
그게 다였다.
도와드릴까요도 없었고 불편하시죠도 없었다.
그냥 자기 서점을 소리로 한 번 훑어 준 것이다.
그다음부터 이 집에 오면 나는 서가를 소리로 듣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단골들도 그렇게 한다.
옆에서 바카라을 고르던 사람이 혼잣말처럼 읽는다.
"어 이거 절판된 건데 여기 있네. 김현 산문집."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애매하게 말한다.
나는 그 애매함이 좋다.
한번은 처음 보는 손님이 이렇게 물은 적도 있다.
"저기 지금 저 혼잣말 하는 거 여기 원래 이래요?"
사장님이 답했다.
"네 저희 집 습관입니다."
그 대답이 정확했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더 있다.
이 집에서는 나만 그 혼잣말의 수혜자가 아니다.
절판된 바카라이 어디 꽂혀 있는지는 눈이 좋아도 모른다.
서가 맨 아래 칸은 허리를 굽혀야 보인다.
누가 소리 내어 읽어 주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전부가 그 정보를 얻는다.
그래서 이 집에서는 대화가 자주 생긴다.
어 그 바카라 저도 찾고 있었는데요 같은 말들.
접근성을 위해 만들어진 습관이 아니라
접근성 때문에 생겼는데 결국 모두가 쓰게 된 습관이다.
이런 게 실제로 자주 일어난다.
다만 이렇게 생긴 것들은 나중에 접근성이었다는 사실이 잊힌다.
말투의 차이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반대 경우를 겪어 보면 안다.
지난달 다른 서점에 갔을 때 직원 한 분이 아주 친절했다.
문을 열자마자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고객님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어떤 바카라 찾으세요. 제가 다 읽어 드릴게요."
나쁜 말이 아니다. 좋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서점 안 사람들이 전부 우리 쪽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보는 소리가 났다. 대화가 잠깐 끊기는 소리.
그리고 나는 그 서점에서 20분 동안 그 직원과 붙어 다녔다.
바카라을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은 서두르게 된다.
바카라은 두 권 샀다. 원래 사려던 건 아니었다.
빈손으로 나오면 그 20분이 헛수고가 될 것 같아서였다.
두 서점의 차이는 친절의 양이 아니었다.
삼덕동 서점에서는 내가 다른 손님들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고
그 서점에서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배려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배려에는 언제나 대상이 지정된다.
그리고 지정되는 순간 그 사람은 나머지와 분리된다.
습관에는 대상이 없다.
그래서 습관이 된 접근성은 사람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배려에는 감정 노동이 따라붙는다.
누가 나를 도와주면 나는 고마워해야 한다.
그건 당연하고 실제로 고맙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매일 몇 번씩 표현하면서 사는 건 다른 문제다.
하루에 다섯 번 고맙습니다를 말하는 사람과
하루에 다섯 번 고맙습니다를 들어야 하는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은
같은 슬롯에 살고 있지 않다.
그 서점에서 나는 고맙다는 말을 거의 안 한다.
사장님이 그럴 기회를 안 주기 때문이다.
그게 3년 단골이 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
섬 이야기
이 차이를 오래 생각하다가 어떤 섬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남쪽 해안에서 1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서즈 비니어드라는 섬이 있다.
지금은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장애학에서는 다른 이유로 유명하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 섬에는 선천성 청각장애인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특정 유전 형질이 세대를 거쳐 이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주민 25명 중 1명이 청각장애인이었고
특정 마을에서는 주민의 4분의 1 정도가 그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면 이 상황은 의료적 개입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조기 진단과 재활과 보조기기 지원 사업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섬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청인들도 수어를 배웠다.
청각장애인이 있는 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농부들은 들판에서 손짓으로 대화했고 어부들은 배 위에서도 수어로 말했다.
교회와 학교와 시장과 마을회의에서 수어가 쓰였다.
수어가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통 언어였다.
그래서 그 섬의 청각장애인들은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농부였고 선원이었고 상인이었고 이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손상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여전히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라진 건 그 손상을 배제로 연결하는 구조였다.
몸은 그대로였고 슬롯가 달라졌고 그러자 장애의 의미가 달라졌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수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섬에서 청인이 수어를 쓰는 걸 아무도 봉사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배려가 아니라 그냥 말이었다.
그 서점 사장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 집 습관이었다.
물론 이 섬 이야기를 낭만화하면 안 된다.
그 섬이 그렇게 된 건 누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비율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청각장애인이 25명 중 1명이면 수어를 모르는 쪽이 불편해진다.
그러니까 다수가 배운 게 아니라 배우는 편이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이건 오히려 중요한 대목이다.
선의에 기대지 않고도 그런 슬롯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 슬롯에서 비율은 그렇게까지 낮지도 않다.
등록장애인은 260만 명이 넘고 교통약자는 1500만 명이 넘는다.
어느 순간에는 거의 모두가 그 범주에 들어간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된다.
수가 적어서 못 바꾸는 게 아니다.
그 수를 하나로 세지 않아서 못 바꾸는 것이다.
정상이라는 발명품
우리는 장애를 말할 때 먼저 몸을 본다.
휠체어 이용자가 못 들어오면 다리를 생각하고
청각장애인이 대화에 못 끼면 귀를 떠올리고
시각장애인이 정보를 못 얻으면 눈을 문제 삼는다.
의료모델이라고 부르는 이 관점이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재활과 치료는 실제로 많은 것을 회복시켰다.
다만 이 관점은 원인을 몸 안에서만 찾는다는 한계가 있다.
슬롯적 장애모델은 다르게 본다.
장애를 손상 그 자체가 아니라 손상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본다.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을 막는 건 다리만이 아니라 계단 중심의 건축이고
청각장애인의 대화를 막는 건 청력만이 아니라 음성 중심의 슬롯구조이고
내가 서가를 못 읽는 건 시력만이 아니라 시각 중심의 정보 체계다.
세계보건기구의 국제기능장애건강분류도 장애를 손상과 슬롯적 환경적 장벽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 제공을 시혜가 아니라 인권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정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된다.
푸코는 근대슬롯가 인간을 끊임없이 측정하고 분류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을 생산해 왔다고 분석했다.
학교와 병원과 군대와 공장은 인간을 재고 비교하고 평균으로 분류하는 장치였다.
레너드 데이비스는 산업화와 통계학의 발전이 평균을 이상적인 몸으로 만들면서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정상은 자연의 질서가 아니다.
역사와 제도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규범이다.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문제는 이 규범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정상성은 상징폭력의 형태로 작동한다.
특정한 몸과 특정한 삶의 방식이 보편 기준으로 제시되는데
사람들은 그걸 권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계단은 차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계단으로 보인다.
구조라는 말도 여기서 정확히 써야 한다.
구조는 누군가의 악의를 뜻하지 않는다.
계단을 설계한 사람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음성 안내만 넣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선택은 그 자리에서는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그 선택들이 반복되면서 기준이 된다는 데 있다.
건축 기준이 되고 교육 제도가 되고 노동시장의 규범이 되고 디지털 표준이 된다.
그 순간 그것은 개별 선택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구조란 슬롯가 누구를 보통 사람으로 상정하고 제도를 설계했는지의 총합이다.
대부분에게 아무 문제도 아닌 환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배제로 작동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상화의 그늘
복지 쪽에는 정상화라는 오래된 원칙이 있다.
1960년대 북유럽에서 나온 이 원칙은 장애인을 시설에 격리하던 보호주의를 비판했다.
방크 미켈센과 니리에가 제시하고 볼펜스베르거가 발전시킨 이 이념은
장애인도 교육받고 일하고 관계를 맺고 지역슬롯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시설과 지역슬롯 통합이라는 현대 장애인복지의 전환점이 여기서 나왔다.
대단한 진전이었고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당사자들이 이 원칙의 전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정상화는 권리를 넓혔지만 동시에 비장애인의 삶을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보편화했다.
장애인의 삶이 그 자체로 존중되기보다
비장애인의 삶에 얼마나 가까운지로 평가되는 경향이 생겼다.
자립도 마찬가지였다.
도움 없이 사는 능력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상호의존적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노인은 슬롯적 돌봄을 필요로 하고
아프거나 다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원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자립은 도움을 안 받는 상태가 아니다.
필요한 지원을 바탕으로 자기 삶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상태다.
당사자들이 비판한 건 지원이 아니었다.
특정한 삶의 방식만 정상으로 정해 두는 시선이었다.
이 이야기를 보보에게 했더니 보보가 이렇게 말했다.
"정상화가 목표가 되면 결국 기준이 되는 쪽은 안 바뀌어도 되잖아. 바뀌어야 하는 쪽은 늘 정해져 있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섬은 반대로 했네. 다수가 언어를 하나 더 배웠으니까."
나는 그 말에 조금 더 보태고 싶다.
그 섬에서 수어를 배운 청인들이 손해를 봤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들판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됐고
배 위에서 파도 소리를 이기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언어를 하나 더 갖는 일은 대체로 손해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접근성을 이야기할 때 늘 비용부터 계산한다.
비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사로에도 돈이 들고 자막에도 돈이 든다.
다만 그 계산서에 얻는 쪽이 한 번도 안 적힌다는 게 이상하다.
모두에게 열리는 문
구조적 차별의 해법이 개인의 적응이 아니라 슬롯의 재설계에 있다는 말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다.
낮은 턱은 휠체어 이용자만을 위한 게 아니다.
유모차를 미는 부모와 고령자와 캐리어를 끄는 여행객에게도 쓸모가 있다.
자막은 청각장애인만을 위한 게 아니다.
외국인과 노인과 시끄러운 지하철에서 영상을 보는 사람에게도 쓸모가 있다.
접근 가능한 디지털 환경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정보 접근을 넓힌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나중에 장벽을 걷어 내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양한 인간을 전제로 설계하려는 철학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것들은
나중에 아무도 그걸 접근성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다.
지금 아무도 자동문을 배려 시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특별 편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접근성이 성공하면 그 이름이 사라진다.
그냥 건물이 되고 그냥 서비스가 되고 그냥 습관이 된다.
삼덕동 그 서점에서 사람들이 바카라 제목을 소리 내어 읽는 것처럼.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하려면 설계하는 자리에 그 몸들이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 없는 몸은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상상되지 않는다.
상상되지 않은 몸은 표준에서 빠지고 표준에서 빠진 몸은 나중에 예외로 호명된다.
그러니까 유니버설 디자인은 결국 설계 회의 참석자 명단의 문제다.
철학이기 이전에 명단이다.
제목: 공용어의 아키텍처 혹은 배려라고 부르지 않는 것들.
배려에는 늘 방향이 있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이 있고 고마움과 미안함이 오간다.
그 감정은 나쁘지 않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사람은 매일 배려할 수 없다.
좋은 마음도 소진된다.
그래서 배려에 기대는 접근성은 반드시 어느 시점에 끊긴다.
오래가는 건 습관이고 규범이고 공용어다.
아무도 그걸 하고 있다고 의식하지 않는 상태.
마서즈 비니어드의 청인들은 매일 아침 오늘도 수어를 써야지 하고 마음먹지 않았다.
그건 그냥 그 섬의 말이었다.
결론: 마서즈 비니어드는 장애인이 없던 슬롯가 아니었다.
장애를 차별로 만들지 않았던 슬롯였다.
그 섬이 남긴 유산은 수어가 아니다.
슬롯는 언제든 다시 설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를 가진 건 개인의 몸일 수 있다.
그러나 장애를 차별로 만드는 건 슬롯다.
그러니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우리는 장애인을 바꾸려 하는가 슬롯를 바꾸려 하는가.
그나저나 그날 그 서점에서 산 바카라은 두 권이었다.
계산할 때 사장님이 제목과 가격을 읽어 주고 거스름돈을 세어서 손에 놓아 줬다.
이것도 3년째 하는 일인데 사장님은 한 번도 도와드릴게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나오는 길에 처음 온 손님이 사장님한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저 개는 왜 저기 누워 있어요.
사장님이 답했다.
저 자리가 이 집에서 제일 따뜻해서요.
탱고도 이 집에서는 특별한 개가 아니라 그냥 단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