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장갑의 무게

by김경훈

대구 중구의 이십사시간 편의점은 새벽 두 시가 넘으면 형광등만 성실하다.


수아는 냉장 진열대 앞에서 삼각김밥 박스를 뜯다가 잠깐 멈췄다.

면장갑이 제대로 끼워져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출근 후 손 씻기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수아의 초능력은 이 하향 평준화 슬롯가 유통업 종사자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사소하고 지독한 형벌이었다.

피부가 물건에 닿는 순간, 그것을 마지막으로 만진 사람의 감정이 전류처럼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것.


처음에는 그나마 쓸 만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편의점의 모든 물건은 인간 감정의 압축 파일이었다.

맥주 캔을 집으면 금요일 퇴근길 온라인 게임인의 '오늘만큼은 나한테 잘해줘야지'하는 처연한 결심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복권 진열대 옆을 스치면 오십 대 아저씨의 '이번엔 진짜인 것 같은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손가락 마디를 달궜다.

에너지 음료를 집으면 어느 대학생의 '이걸 마시면 진짜 공부가 될 것 같다'는 자기 최면이 손바닥에 차갑게 스며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하지만 가장 최악은 화장실 열쇠를 건네받을 때였다.


오늘 새벽에도 한 번 당했다.

손님이 건넨 화장실 열쇠를 받아 드는 순간, 이십 분 전 그 열쇠를 쥐고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간 누군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수아의 손바닥으로 흘러들어왔다.

해서는 안 되는 다이어트 음식을 먹고 속이 뒤집혀서 편의점 화장실까지 뛰어온 사람의 수치심과 후회와 자기혐오가 뒤엉킨 그 감정을.

수아는 장갑을 낀 채로 열쇠를 소독제 통에 담갔다.

소독제가 감정도 지워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수아는 면장갑 두 켤레를 겹쳐 끼고 야간 알바를 버텼다.



새벽 세 시가 가까울 무렵, 유리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비틀비틀.

오십 줄의 아저씨가 들어왔다.

구겨진 와이셔츠에 넥타이는 목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고 눈빛은 대기권 밖을 유영하고 있었다.


수아는 계산대에서 그를 조용히 주시했다.

술 취한 아저씨는 새벽 편의점의 기본 풍경이었다.

주임 박은 창고에서 재고 파악 중이었다.


아저씨가 과자 코너로 들어갔다.

비틀거리며 진열대 옆 모서리를 손으로 잡았다.

잠깐 멈춰 서서 과자들을 멍하니 둘러봤다.

그리고 허니버터칩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꼬깔콘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포카칩을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수아는 진열대 정리를 핑계로 과자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아저씨가 잡았다 놓은 허니버터칩 봉지 옆 선반에 손을 얹었다.


찌릿.


뭔가 왔다.


기쁨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졌다.

구체적으로는, '아내가 이거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라는 희미한 기억과 '근데 이거였나 저거였나'라는 완벽한 혼돈이었다.

그 밑에 은은하게 깔린 배경 감정: 오늘 배드민턴 시합에서 동네 주민한테 졌다는 굴욕감.


수아는 손을 천천히 거뒀다.

아, 이 아저씨 아내 심부름 왔구나.


아저씨는 이번엔 초코파이로 이동했다.

역시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수아가 초코파이 박스 옆에 손을 댔다.


찌릿.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달달한 거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였나.'


아저씨의 기억력이 알코올에 전면 잠식당한 상태였다.



아저씨가 음료수 코너로 이동했다.

콜라를 집었다가 내려놨다.

수아가 콜라 옆 선반에 손을 댔다.


찌릿.


'콜라는 아니야, 분명히 탄산은 싫다고 했어, 그럼 뭐였지.'


음료수 코너를 세 바퀴 돌던 아저씨가 결국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거였나, 저거였나."


독백이 새어 나왔다.

완전히 길을 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수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계산대를 나왔다.


"손님, 혹시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아저씨가 수아를 돌아봤다.

눈이 풀려 있었다.


"어, 우리 마누라가 뭐 사오라고 했는데. 과자인가, 음료수인가."


"달달한 거요, 짭짤한 거요."


"그거 모르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수아는 잠깐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채취한 감정들을 정리했다.

허니버터칩에서 느낀 희미한 맞는 것 같다는 감각.

초코파이에서 느낀 나는 단 거 좋아하는 사람 기억인데.

음료수 코너에서 느낀 탄산은 싫다는 확신.


수아는 과자 코너로 걸어가서 허니버터칩을 하나 집어 들었다.

면장갑 낀 손으로.


"이거 아니에요?"


아저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멍하니 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딱 튀겼다.


"맞아, 이거야! 허니버터칩! 고소한 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우리 마누라!"


아저씨가 허니버터칩을 낚아채며 활짝 웃었다.

앞니 하나가 빠져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가씨?"


"그냥요. 눈치요."


수아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며 계산대로 돌아갔다.

아저씨는 허니버터칩을 가슴에 꼭 안고 카드를 내밀며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덕분에 오늘 집에서 안 쫓겨나게 생겼어. 배드민턴도 졌는데 이것까지 못 사오면 진짜 베란다에서 자는 거였거든."


"네, 어서 들어가세요."


아저씨가 비틀비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대구의 새벽 열기가 훅 들어왔다가 문이 닫혔다.


주임 박이 창고에서 나왔다.


"야, 방금 뭐 하는 거야."


"손님 응대요."


"아니, 네가 왜 과자를 골라줘."


"직원 서비스요."


"무슨 편의점에 그런 서비스가 있어."


수아는 면장갑을 고쳐 끼며 냉장 진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한테는 있어요."


형광등 불빛이 쏟아지는 새벽 편의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가장 예민한 초능력을 가진 야간 알바생이 면장갑 두 켤레를 겹쳐 끼고 삼각김밥 박스를 뜯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취한 아저씨가 허니버터칩을 손에 들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배드민턴에서 지고, 술에 취하고, 편의점에서 길을 잃은 오늘 하루가 허니버터칩 하나로 마무리되는 셈이었다.

수아는 다음 손님이 화장실 열쇠를 돌려주러 오기 전에 장갑을 한 겹 더 끼기로 했다.

오늘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의 감정을 소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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