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익어가는 길을 따라, 당진 성북 1리 아미샘꽃길을 걷다
대도시에서는 골목이 점차로 사라지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대단지 아파트들이 오래된 골목길을 사라지게 하고 사람과 풍경을 만나는 일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시골마을로 떠나는 것은 감성이 있는 여행이 되어준다. 마을을 여행하는 일은 유명한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정답도 없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일 필요도 없다.
누군가 기다릴지 모르는 버스정류장 하나와 논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 길, 마을회관 앞에 피어난 꽃처럼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풍경에 눈길을 주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9월의 햇살이 아직 여름의 기운을 품고 있던 날, 당진시 순성면 성북 1리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성북 1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게 펼쳐진 논이다. 아미산과 잣산, 구절산, 태봉산 등 크고 작은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그 사이의 낮은 땅을 따라 논과 밭, 집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높은 건물이 시야를 가리는 도시와 달리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넓게 펼쳐지고 산 아래까지 이어지는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모습이다.
마을 입구에는 성북 1리를 알리는 안내판과 버스정류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는 ‘꽃길 갤러리’라는 글씨가 적힌 안내판도 보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북 1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마을 곳곳에는 탐방로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자동차로 빠르게 지나가면 발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이런 마을은 차에서 내려걸어보아야 한다. 마을의 표정은 언제나 큰 풍경보다 작은 것들 사이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북 1리는 그동안 마을 진입도로와 안길 이 좁아 차량이 서로 지나가기 쉽지 않았고 주민들이 걸어서 이동하는 데에도 불편함이 있었다고 한다. 농촌의 좁은 길은 오래전 사람과 농기계가 오가던 생활의 길이지만 자동차가 많아진 지금은 주민들에게 적지 않은 불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기다리기보다 직접 길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조성된 길이 ‘아미샘꽃길’이다. 성북 1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잣대천 일원에 길이 약 1.2km, 폭 2.5m 규모의 보행로를 만들었다. 당진시 ‘희망마을 만들기 선행 사업’의 ‘벚꽃길 이어 붙이기, 생태하천 조성’ 사업에 선정돼 3천만 원의 사업비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6월부터 7월 초까지 보행로 조성을 마무리했다.
꽃길 만들기는 단순히 걷기 좋은 길 하나가 생긴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을 조금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이 담긴 길인 셈이다. 길을 걷다 보면 꽃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강렬한 자줏빛을 품은 맨드라미가 피어 있고 주황빛 꽃들이 밭 가장자리를 채운다. 마을집 앞에는 작고 하얀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장독대와 작은 정자가 어우러진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어느 한 곳을 화려하게 꾸민 정원이라기보다 주민들의 생활 속에 꽃이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꽃길’이라는 이름 때문에 화려한 꽃밭을 먼저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풍경처럼 이어진다는 데 있다. 꽃을 보며 걷다가 고개를 돌리면 논이 펼쳐지고, 조금 더 걸으면 옥수수밭 사이로 난 길이 나온다. 다시 산을 바라보다 보면 작은 집과 농경지가 눈에 들어온다. 탐방로 표지판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결국 이 마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9월의 성북 1리에서 가장 오래 눈길을 붙잡는 것은 벼다. 여름 내내 짙은 초록빛을 품었던 벼는 조금씩 빛깔을 바꾸고 있었다. 아직 들판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 것은 아니지만 벼이삭은 점점 무게를 더해가고 초록 사이사이로 노란 기운이 스며든다.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들판에서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벼가 익는다는 것은 단순히 색이 바뀐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봄에 논을 갈고 모를 심었던 시간, 여름의 뜨거운 햇살과 비를 견딘 시간이 한 알의 쌀 속으로 모여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계절의 들판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람의 삶도 떠올리게 된다. 충분한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농촌의 풍경은 매년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해 준다.
성북 1리의 탐방로를 따라 걷다 옥수수밭 옆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키를 훌쩍 넘긴 옥수수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흰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논에서는 벼가 익어가고 밭에서는 가을 수확을 준비하고 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옥수수 잎이 서로 부딪치고 벼가 한 방향으로 흔들리는 모습까지도 이곳에서는 하나의 여행 풍경이 되어준다.
아미샘꽃길이 가진 의미도 이런 풍경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해진다. 이 길은 외지인을 위한 관광시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매일 이용하는 생활의 길에서 시작됐다. 좁은 길 때문에 겪던 불편을 줄이고 걷기 좋은 공간을 만들고, 여기에 꽃과 생태적인 풍경을 더했다. 주민에게 필요한 길이 여행자에게는 마을을 이해하는 산바카라길이 된 것이다.
화려한 조형물이나 거대한 관광시설이 없어도 오래 기억되는 여행지가 있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는가 보다 얼마나 천천히 바라보았는가가 중요하다. 당진 순성면 성북 1리를 걷는 시간도 그랬다.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해 마을회관을 지나 꽃을 보고, 탐방로를 따라 옥수수밭과 논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한 마을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게 된다.
아직 완전히 황금빛은 아니지만 벼는 분명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익으면서 며칠이 지나면 들판의 색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의 손으로 새롭게 이어진 아미샘꽃길 역시 그렇게 조금씩 마을의 시간이 되어갈 것이다. 길이 만들어지면 사람이 걷고, 사람이 걷기 시작하면 평범했던 마을의 풍경에도 이야기가 생긴다. 벼가 천천히 익어가는 9월의 성북 1리는 지금 꽃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