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 사이로 가을이 흐른다, 제천 청풍호 여행
가을을 여행하기 좋은 이유는 풍경이 다채로워지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짙은 초록으로 하나의 색처럼 보였던 산도 9월에 들어서면 빛의 방향에 따라 조금씩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하늘은 높아지고 구름은 자신만의 모습을 뽐내고 물 위에 내려앉는 햇빛도 여름과는 다른 느낌을 만든다. 아직 단풍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도 계절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풍경이 먼저 알려주기에 더 매력적이다.
그런 초가을의 변화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싶을 때 생각나는 여행지가 충북 제천의 청풍호라는 곳이다. 청풍호를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호숫가 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려도 좋고, 가까운 여행지를 함께 돌아보아도 좋다. 그러나 청풍호가 품고 있는 산과 물의 크기를 한눈에 보고 싶다면 청풍호반 케이블카를 타고 비봉산으로 올라가 보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청풍호반 케이블카 물태리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커다란 초록색 사과 조형물이다. 제천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싱그러운 색이 눈에 뜨인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케이블카가 산 위를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직 땅 위에 서 있으면서도 여행은 이미 하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느껴진다.
청풍호는 충주댐 건설로 만들어진 호수다. 지금은 ‘내륙의 바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만큼 넓은 수면과 산세가 어우러지며 제천을 대표하는 풍경을 만들고 있다. 주변에는 청풍문화유산단지와 금수산, 비봉산 등이 이어져 있어 자연과 역사, 여행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청풍호반 케이블카는 청풍면 물태리에서 해발 531m 비봉산 정상까지 약 2.3km를 연결한다. 편도 운행시간은 약 9분이다.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 9분 동안 여행자의 시선은 상당히 많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역 주변의 건물과 주차장, 도로가 보인다. 케이블카가 조금씩 높아지자 자동차가 작아지고 건물의 지붕이 눈 아래로 내려간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도로도 나무 사이로 가느다란 선처럼 이어진다.
케이블카 여행의 매력은 높은 곳에 빨리 올라간다는 것만은 아니다. 땅에서 하늘로 시선이 이동하는 과정 자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산길을 달릴 때는 나무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지형이 케이블카에서는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 산을 품고 있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다.
비봉산 정상에 도착하면 풍경의 크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케이블카 안에서 조각조각 보이던 청풍호가 한꺼번에 펼쳐진다. 산과 산 사이를 파고든 물줄기는 어떤 곳에서는 넓은 호수가 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강처럼 가늘어져 멀리 사라진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마을과 농경지, 산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까지 모두 하나의 거대한 풍경 속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바라볼 때와 실제로 그 앞에 섰을 때의 느낌도 꽤 다르다. 가까운 산은 짙은 초록이다. 그 뒤의 산은 조금 옅어지고, 훨씬 먼 산은 푸른빛을 머금은 채 희미해진다. 산들이 겹겹이 포개지면서 만들어내는 원근감이 청풍호를 더욱 깊게 보이게 한다.
9월의 구름은 꽤 극적으로 보인다. 파란 하늘을 길게 가르며 흘러가는 흰 구름과 산 위에서 솟아오르는 뭉게구름이 청풍호의 수면과 묘하게 어울렸다. 구름이 물 위에 비치면 호수에도 또 하나의 하늘이 생긴다.
그래서 청풍호를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경계를 찾기 어려워진다. 산과 물, 하늘과 구름이 한 장면 안에서 연결된다.
비봉산이라는 이름도 풍경과 잘 어울린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날아오르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풍호 중앙에 자리한 비봉산 정상에 서면 왜 이곳이 청풍호를 바라보기 좋은 자리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비봉산 정상에는 전망공간과 야외 데크가 마련되어 있다. 알록달록한 벤치와 조형물도 있어 사진을 남기기 좋다. 청풍호를 배경으로 자리를 잡으면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충분한 한 장의 여행사진이 된다. 이곳에서는 무엇인가를 계속 찾아다니기보다 잠시 머물러 있는 편이 더 좋다.
평소에는 몇 분이면 지나칠 풍경인데 높은 곳에 올라오면 이상하게 오래 보게 된다. 여행을 하면서 가끔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소보다 새로운 시선인지도 모른다. 아래에서는 거대했던 건물이 작아지고, 자동차가 점처럼 보이고, 복잡하게 느껴졌던 길도 산과 호수 사이에 그어진 한 줄에 불과해진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세상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올라온 생각들이 조금 작아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청풍호의 풍경이 그런 시간을 만들어내주고 있었다. 가을 여행이라고 하면 흔히 붉게 물든 단풍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9월의 초가을도 좋아한다. 아직 산은 초록이지만 여름의 초록과는 조금 다르다. 나무 끝에서는 계절이 천천히 이동하고 있고 햇빛은 조금 부드러워진다. 구름의 모양도 달라지고 하늘은 한층 넓어 보인다.
초록빛 산 사이에서 시작한 색의 변화가 능선을 따라 번지고, 파란 청풍호와 붉고 노란 산이 대비되는 계절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청풍호반 케이블카는 9월부터 늦가을까지 계절의 변화를 여러 번 만나볼 수 있는 여행지가 된다. 가을에 이곳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도 단순히 단풍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걷는 수고를 크게 들이지 않고도 산 정상에서 넓은 호수와 겹겹의 산세를 만날 수 있고,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과정까지 하나의 여행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와도 좋고 부모님과 찾아도 좋으며,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날씨와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청풍호를 담아볼 수도 있다. 물태리역에는 옥상정원 등이 있고, 비봉산역에는 전망대와 야외전망대, 약초숲길 등도 마련되어 있어 정상에서 조금 여유 있게 머물러보기 좋다.
이미 청풍호 전체를 보고 난 뒤라 작은 풍경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를 굽이치는 도로나 산 아래 자리한 건물, 주차장을 오가는 자동차, 그리고 반대편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케이블카까지 이제 또 다른 경험으로 채워졌다.
비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청풍호는 수려한 풍경이었지만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그 거대한 풍경 속에 나 역시 아주 작은 하나의 점으로 돌아간다. 가끔은 내가 서 있는 자리보다 훨씬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너무 힘든 여행은 부담스럽다면 제천으로 향해봐도 좋겠다. 청풍호반 케이블카에 올라 천천히 고도를 높이고 비봉산 정상에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청풍호를 바라보는 것이다. 계절은 매년 돌아오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가을은 언제나 한 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