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제천 비행장길의 보랏빛 가을
한반도가 크지가 않다고 하더라도 여름이 지나가는 방식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또 어떤 곳에서는 들판의 색이 조금씩 옅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9월 초 제천에서는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가을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소개를 해보려고 한다.
제천의 시내와 의림지 사이에 자리한 비행장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때 비행기가 오갔던 넓은 공간 주변으로 보랏빛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늘에는 아직 여름의 흔적처럼 커다란 구름이 떠 있지만, 땅 위의 풍경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넓게 펼쳐져 있는 보라색 꽃은 버베나는 우리말로 버들마편초라 불리는 꽃이다. 작은 꽃들이 둥글게 모여 피고 가느다란 줄기가 길게 뻗어 있어 바람이 불면 꽃밭 전체가 천천히 파도처럼 움직인다. 화려하게 한 송이씩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여러 송이가 함께 모였을 때 더 아름다운 꽃이다. 그래서인지 비행장처럼 넓고 열린 공간과 유난히 잘 어울린다.
제천비행장에서는 과거에도 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버베나를 만날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버베나의 꽃말을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이라는 의미로 소개해왔다. 꽃말을 알고 다시 꽃밭을 바라보면 이곳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한때 시민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공간이 오랜 시간을 지나 시민의 산바카라길과 꽃밭이 된 역사를 생각하면 이 꽃말은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비행장길’이라는 이름과 넓은 활주로의 흔적이 이곳의 과거를 말해주지만, 제천비행장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제천시 모산동과 고암동 일대에 자리한 제천비행장은 1950년대 비행훈련을 목적으로 약 18만㎡ 규모로 조성되었다. 1975년에는 활주로를 정비해 헬기 예비작전기지로 전환했지만 이후 훈련을 위한 항공기 이착륙이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군사시설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천은 그 사이 크게 달라졌다. 비행장 주변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학교와 도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 가까워졌다. 제천의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땅이 실제 군사적 기능은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용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남게 된 것이다.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제천시와 군이 합의각서를 체결하면서 산바카라 등 제한적인 범위에서는 시민들이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군사시설이라는 지위가 유지됐기 때문에 행사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면 국방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2021년에는 시민단체와 지역슬롯가 제천비행장을 시민에게 돌려달라는 운동에 나섰고, 6만 명이 넘는 시민이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21년 12월 제천비행장은 군사시설에서 해제됐고, 2022년에는 군사시설 용도 폐지 절차가 완료됐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도 소유권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었다. 제천시는 부지를 시민 공간으로 보다 안정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매입을 추진했고, 2026년에는 1단계로 활주로 7만 6천여㎡를 확보하면서 본격적인 변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비행장길은 단순히 꽃을 심어놓은 길만은 아니다. 도시의 공간을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오랜 시간 질문한 끝에 만들어지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곳 비행장을 걷다 보면 옛 공간의 흔적과 지금의 풍경이 묘하게 겹친다. 한쪽에는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넓은 활주로가 있고, 그 옆으로는 보라색 버베나가 끝없이 이어진다. 조금 멀리 바라보면 제천을 감싸고 있는 산이 능선을 그리고, 그 위에는 흰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꽃밭 사이로 만들어진 작은 길을 걸으면 풍경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고 한다.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칠한 작은 의자들이 꽃밭을 바라보고 나란히 놓여 있고, 길 곳곳에는 바람개비와 캐릭터 조형물이 자리한다. 과거의 비행장은 목적이 분명한 공간이었다. 비행기는 이륙하거나 착륙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는 반드시 어디론가 향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걷다가 멈춰도 되고, 의자에 앉아 꽃을 바라봐도 된다. 카메라를 들고 작은 꽃 한 송이에 가까이 다가가도 좋고, 구름이 움직이는 방향을 오래 바라보고 있어도 된다.
나는 꽃밭이 과거를 지우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꽃은 그 땅이 지나온 시간을 다른 방법으로 기억하게 한다. 제천비행장에도 활주로는 남아 있다. 직선으로 뻗은 콘크리트와 주변 도로, ‘비행장길’이라는 이름도 과거를 감추지 않는다. 군사시설이었던 시간 위에 시민의 산바카라이 더해지고, 콘크리트 활주로 옆에 보랏빛 꽃이 자라고, 비행기의 이동을 위해 비워두었던 공간에 사람들이 천천히 머물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곳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화다.
봄에는 또 다른 꽃이 피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가까워지면 버베나가 보랏빛으로 흔들린다. 실제로 제천시는 비행장 주변에 계절별 꽃밭을 만들어왔고 메밀꽃을 비롯한 다양한 경관작물을 심으며 이 공간을 시민들이 찾는 장소로 변화시켜 왔다.
9월의 제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은 여전히 여름처럼 크지만 햇빛에는 한풀 꺾인 계절의 기운이 담겨 있다. 꽃 사이를 통과해 온 바람에서도 얼마 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냄새가 난다.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꽃의 색이 조금 깊어지고, 그림자가 조금 길어지고,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이 쌓이면서 그렇게 다가온다. 제천 비행장길의 가을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