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오백 년의 향에 반해보자.

한산전통시장과 한산소곡주갤러리에서 만나는 제9회 한산소곡주축제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떤 지역은 풍경보다 먼저 하나의 맛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충남 서천의 한산이 그런 곳이다. 한산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한산모시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한산소곡주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한 잔의 술이 한 지역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1,500년 가까이 품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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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초입에 찾은 한산전통시장 주변은 며칠 뒤 열릴 축제를 준비하느라 조금씩 분주해지고 있었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아치 너머로 하얀 행사 천막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고 골목 곳곳에는 체험 부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벌집꿀 아이스크림 꾸미기, 로컬 드링크 만들기 같은 프로그램 이름도 보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주변의 한산소곡주를 만드는 양조장에서 술을 파는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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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열리는 제9회 한산소곡주축제는 2026년 9월 4일부터 5일까지 이틀 동안 한산전통시장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 축제의 문구는 사진 속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천오백 년의 향에 반하다’이다. 서천군이 주최하고 한산소곡주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한다.


그런데 한산소곡주축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장터가 어떤 공간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산전통시장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공식적으로 정기시장으로 등록된 것은 1926년이지만 장이 열린 역사는 조선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산장은 모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한때 한산을 비롯한 저산 팔읍에서 생산된 모시가 이곳으로 모였고 국내에서 전통적인 모시 거래의 흔적을 가장 짙게 간직한 시장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매월 끝자리가 1일과 6일인 날에 한산오일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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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를 짜고 술을 빚고 장에 나와 물건을 팔던 것이 모두 한산 사람들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축제를 위해 새롭게 만든 공간에 지역의 전통을 억지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삶이 존재했던 장터 위에서 다시 축제를 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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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가까이에는 한산소곡주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산소곡주갤러리도 자리하고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내부는 나무 살을 이용한 한옥식 구조물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고 낮은 상과 전시장이 배치돼 있다. 한쪽에는 여러 양조장의 소곡주가 놓여 있고, 과거 사람들이 술을 빚던 모습을 재현한 공간도 있다. 옛 주막이나 사랑방을 연상시키는 구조와 현대적인 전시공간을 함께 배치해 놓았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곳은 올해 7월 새 단장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한산을 중심으로 서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여러 소곡주를 한자리에서 비교해 보고 시음하거나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천에는 현재 한산지역을 중심으로 70여 곳의 양조장이 소곡주를 생산하고 있어 같은 ‘한산소곡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더라도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맛과 향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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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전시공간에도 바로 그 이야기가 적혀 있다.

‘백제 유민이 소곡주를 빚어 한을 달래….’

사실 전통이라는 것은 기록과 이야기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연도를 특정하는 기록만으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술을 빚고, 그 방법을 자식에게 전하고, 다시 그 술에 이야기를 붙이면서 시간이 쌓였다.


소곡주는 특히 시간이 필요한 술이다. 찹쌀과 멥쌀, 누룩 등을 이용해 술을 빚은 뒤 오랜 발효와 숙성을 거친다. 전통적인 제조법에서는 약 100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짧게 발효해 마시는 술과 달리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특유의 단맛과 깊은 향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한산소곡주를 소개할 때 자주 따라붙는 별명이 있다. ‘앉은뱅이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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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착지근하고 부드러운 맛 때문에 술이 제법 독하다는 사실을 잊고 계속 마시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이름이다. 며느리가 술이 잘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찍어 맛보다 계속 마셔 취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가 소곡주에 취해 길을 떠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것이 정확한 시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맛있어서 한 잔만으로 끝내기가 어려운 술이었다는 것이다. 소곡주의 특징은 강하게 밀어붙이는 술맛보다 은근한 단맛과 곡물의 풍미에 있다. 쌀과 누룩이 긴 시간을 지나면서 만들어내는 묵직한 단맛과 감칠맛 때문에 전통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비교적 쉽게 다가간다. 그래서 요즘에는 소곡주를 그대로 마시는 것뿐 아니라 칵테일이나 다양한 음식과 연결하려는 시도도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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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산소곡주의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나의 대형 회사가 만들어낸 술이 아니라 오랫동안 여러 집안에서 가양주의 형태로 전승돼 온 술이라는 점이다. 그 역사를 따라가면 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산소곡주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지역에서 전승돼 온 전통주로, 1979년 충청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술의 정확한 기원이 문헌으로 모두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백제시대 궁중에서 마셨던 술이며, 백제가 멸망한 뒤 유민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빚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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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소곡주축제 역시 이런 변화 속에서 시작됐다. 첫 축제는 2015년 한산시장 일원에서 ‘백일 간의 정성, 천오백 년의 맛과 향’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당시부터 소곡주 시음과 판매에만 머무르지 않고 술 빚기 체험, 품평회, 안주 경연대회, 한산모시와 지역 특산품 등을 함께 소개했다. 축제의 목적도 1,500년 전통의 한산소곡주를 다시 알리고 한산의 역사와 문화를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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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는 10월 10일을 ‘한산소곡주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100일이라는 숙성의 시간과 연결해서 10 ×10=100이 되는 날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지역의 술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만들려는 시도가 축제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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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축제가 올해 아홉 번째를 맞이했다. 소곡주를 시음하고 사는 것에서 출발해 술 빚기, 칵테일 만들기, 공예 체험, 지역 향토음식 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지난해 열린 제8회 축제에도 소곡주 시음·판매와 술 빚기, 칵테일 만들기, 향토음식과 공예체험 등이 함께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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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축제를 앞둔 현장을 돌아보면 그 방향이 더욱 분명해 보인다.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체험 부스와 포토존을 만들고 있었고, 한산소곡주갤러리에서는 술의 역사와 제조과정을 전시하고 있었다. 골목을 조금 걸으면 소곡주를 만드는 공간과 판매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오래된 시장과 나무가 우거진 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한산소곡주축제는 흔히 생각하는 ‘술 축제’와는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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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중심에 놓인 것은 술 한 병이 아니라 술을 만들어온 마을이다. 쌀을 재배했던 들판이 있고, 집에서 술을 빚었던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팔던 장터가 있고, 그 옆에는 한산모시를 거래하던 골목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양조장과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소곡주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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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한산소곡주갤러리 앞에는 이런 문장도 보인다.

“옛것의 가치를 새롭게 잇다.”

어쩌면 올해 한산소곡주축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도 이것인지 모른다. 1,500년 전 사람들이 마셨다는 술을 오늘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전통 방식으로 한 잔을 마실 것이고, 누군가는 칵테일로 접할 것이며, 아이들은 술 대신 체험을 통해 이 마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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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통은 박물관 안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춰 조금씩 모습을 바꾸면서 살아남는다. 오는 9월 4일과 5일, 한산전통시장의 하얀 천막 아래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잔에는 한산소곡주가 채워지고 시장에서는 음식 냄새가 피어오를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으로 소곡주의 달콤한 맛을 경험하고, 누군가는 오래전에 마셨던 한 잔을 기억하며 다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른다. 백 일이 지나 한 항아리의 술이 완성되는 것처럼, 한산이라는 마을의 시간도 그렇게 천천히 쌓여 지금의 한산의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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