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읍의 오래된 이야기 정지용생가와 새로운 이야기 마이스센터
대도시를 비롯하여 군 단위의 지자체까지 오래된 공간과 새로운 공간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옥천과 같은 지자체에서 옛날의 중심생활공간을 구읍이라고 부른다. 지역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사람들에게 구읍은 정감이 있는 생활공간이다. 1905년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옥천의 중심은 역이 있는 서쪽으로 옮겨갔고 향교를 품은 옛 마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된다.
옥천군의 구읍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지금도 여행객들이 방문한다. 옥천구읍에서는 시인이 태어난 집인 생가터가 남아 있다. 정지용 생가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옥천군 마이스센터다. 마이스센터로 들어서자 현수막에는 전통을 품은 구읍에서 피어나는 비즈니스 관광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이스센터의 개관식은 2026년 7월 23일에 열렸고 8월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인구소멸대응기금 56억 원에 군비 3억 원을 더해 59억 원이 들었다. 연면적 1,025㎡, 지상 3층규모로 지어졌다.
건물의 1층은 소전시실과 사무실, 2층은 전시실과 휴게실, 3층은 대회의장이 들어서 있다. 3층에는 개관식 현수막이 아직 걸려 있었다. 한쪽 벽 전체가 스크린이고 천장에서 프로젝터가 내려오는 곳으로 옥천군에서 회의를 두 번 개최했다고 한다.
2층에는 지역 작가들의 그림과 사진이 걸려 있었다. 노출 천장에 레일 조명만 달아둔 구성이라 벽면을 어떻게 쓸지 알려주고 있다. 이곳에 걸린 운무가 깔린 산자락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대청호를 낀 이 지역의 아침일 것이다. 사진 속 시간은 예상하건대 새벽이고 내가 서 있는 시간은 한낮이었다.
소회의실로 사용되는 긴 테이블이 놓인 방도 있었다. 스무 명이 마주 앉을 정도. 언론은 이 센터를 전국 전시컨벤션센터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로 소개하고 있다. 옥천군의 마이스센터에서 MICE는 원래 건물이 아니라 산업에 붙여지게 된다. 이 센터는 당초 상계리 전통문화체험관 인근에 지을 계획이었다가 지용문학공원 쪽으로 부지가 바뀌었고 규모도 지상 2층 913㎡에서 지상 3층 1,025㎡로 늘었다고 한다.
마이스센터에서 아래쪽으로 몇 분 걸으면 개울을 낀 길이 나온다. 난간마다 시구를 새긴 판이 붙어 있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이 이 물길이다. 시에 적힌 풍경이 실제 지형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개는 시만 남고 땅은 사라진다. 여기서는 둘 다 남아있다.
정지용은 1902년 이 동네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약재를 다루는 집안이었고 열일곱 무렵까지 여기서 살았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했고 돌아와 모교의 교사가 됐다. 해방 뒤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을 남겼고 한국어가 감각을 다루는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전쟁 중에 행방이 끊겼고 그는 월북 작가로 분류됐다. 작품은 금서가 됐다. 1974년에는 생가가 헐렸다. 이름을 지우는 데는 이십몇 년이면 충분했다. 1988년에야 납북으로 인정되며 작품이 풀렸고 지용회를 중심으로 복원 논의가 시작돼 1996년 초가 두 채가 옛 자리에 다시 섰다. 문학관은 2005년 5월에 열렸다.
집이 헐린 해와 다시 선 해 사이가 스물두 해다. 사람 하나가 태어나 성인이 되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이 자리에는 다른 집이 서 있었다. 마당은 넓지 않지만 소박해서 좋다. 초가지붕의 곡선과 흙벽, 돌을 박은 담이 낮게 이어진다. 툇마루에 앉으면 발밑으로 마른 흙이 보이고 처마 끝으로 하늘이 잘려 들어온다
방안을 보면 안경을 쓴 시인의 흑백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옆에 「호수」를 붓으로 옮긴 액자가 있고 다른 방에는 「고향」과 「별똥」이 있다. 모두 짧은 시다. 약장과 반닫이, 재를 담은 옹기가 놓여 있다. 사람이 살던 흔적이라기보다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배치한 물건들이다. 복원은 원래 그런 일이다. 원본을 되돌리는 게 아니라 없어졌다는 사실을 관리하는 일에 가깝다.
사립문을 나서면 돌담 너머로 관광안내도와 벽돌 건물과 전신주가 한꺼번에 보인다. 초가와 콘크리트가 한 프레임에 들어온다. 기록에 따르면 생가 앞 돌다리 가운데 하나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던 비석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밟고 지나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옥천군 마이스센터는 앞으로 회의와 전시와 행사를 담당할 것이다. 회의공간과 옛 구읍에 자리한 정지용생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시설이 이어지는 여행의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회의가 끝난 오후에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백 년 전의 마당이 있다는 것은 흔한 조건이 아니다.
정지용 생가의 툇마루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실개천 물소리는 시에 적힌 것만큼 크지 않았고 매미 소리가 그 위에서 들려왔다. 백 년 전의 소년도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가 서울로 떠나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이에도 물은 흘렀고 집은 헐렸다가 다시 세워졌다. 지금 그 부근에 마이스센터가 새로 운영되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있다. 옥천군의 변화는 2026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