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지막 선택

그래도 헤어질 수 없어요

byHelia

형과 서하 사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도진과 서하는 여전히 잘 만났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았고, 시간이 맞으면 함께 밥을 먹었다. 공강이 겹치는 날에는 도서관에서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도진에게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서하가 기다렸고, 반대로 서하의 강의가 늦어지면 도진이 국문과 건물 앞으로 왔다.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오늘 뭐 먹을래?"

"아무거나."

도진이 바로 서하를 쳐다봤다.

"또 아무거나."

"응."

"그럼 내가 고른다?"

"그래."

"나중에 싫다고 하지 마."

"안 해."

도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한데."

"뭐가."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내가 고른 거 먹겠다고 할 리가 없는데."

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내가 고를까?"

"아니."

대답은 빨랐다.

"내가 고를게."

"뭐야."

"삼겹살."

"점심부터?"

"싫어?"

서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먹자."

"역시 수상해."

"먹자고 해도 난리야."

도진이 웃으며 서하의 손을 잡았다.

서하도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얽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도진의 어머니가 자신을 따로 불러 헤어져 달라고 했던 일도,

그 말을 듣고 혼자 돌아왔던 날도,

마치 없었던 일처럼.

도진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은 말하지 말자.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괜히 이야기했다가 도진과 어머니가 싸우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으로 하루씩 미루다 보니 어느새 며칠이 지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하는 건축대 앞에서 도훈과 마주쳤다.

"누나."

"도훈아."

"어디 가요?"

"도서관."

"형은요?"

"수업."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다 서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아니."

"뭔데."

"그냥 누나 멀쩡한가 보려고."

서하가 피식 웃었다.

"나 멀쩡해."

"진짜?"

"응."

도훈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엄마가 또 연락한 적은 없죠?"

서하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없어."

"다행이네."

도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걸음 함께 걷다가 다시 서하를 불렀다.

"누나."

"응."

"엄마가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쓰지 마요."

서하가 도훈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냥."

도훈이 가방끈을 고쳐 멨다.

"엄마 말 때문에 형이랑 이상해지지 말라고요."

"..."

"둘이 헤어질지 말지는 둘이 정하는 거잖아요."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훈은 장난기 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절대 흔들리지 마요."

서하가 웃었다.

"너 도진이 동생 맞아?"

"맞거든요."

"그래도 어머니 편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도훈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리고 형, 누나 엄청 좋아하잖아요."

"알아."

짧은 대답이었다.

도훈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알고 있었다.

서하도 형을 좋아한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그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엄마가 또 뭐라고 해도 그냥 흘려들어요."

서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랑 네 형 헤어지면 네가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야?"

도훈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렇게 놀라."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도훈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형이 누나랑 헤어지고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요?"

"그 정도였어?"

"폐인이 따로 없었어요."

도훈이 작게 웃었다.

"그 꼴 두 번이나 봤으면 됐어요. 세 번째는 사양할게요."

서하도 웃었다.

"알았어."

"진짜죠?"

"응."

"약속."

도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야."

"약속하라고요."

"내가 애야?"

"빨리."

서하는 결국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알았어."

"절대 엄마 말 때문에 형이랑 헤어지지 않기."

서하가 잠시 도훈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는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반대한다고 해서 자신과 도진의 3년이 무너질 리 없었다.

두 번이나 헤어지고도 결국 다시 만났다.

이 정도 말에 흔들릴 관계였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의 어머니는,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

일주일쯤 지난 어느 오후였다.

서하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과제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손이 멈췄다.

도진 어머니.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다.

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니."

― 어디예요?

"학교 근처예요."

― 잠깐 볼 수 있어요?

서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 무슨 일이세요?"

― 만나서 이야기해요.

"어머니."

― 오래 안 걸려요.

서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서하가 있는 카페로 찾아왔다.

자리에 앉은 뒤에도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생각해 봤어요?"

서하는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네."

"그래서?"

"... 죄송해요."

서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은 지난번과 같아요."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도?"

"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머니 말씀은 이해해요."

"이해하는 사람이 이래요?"

"..."

"도진이를 정말 생각한다면 놓아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서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꼭 맞잡았다.

"저는 제가 도진이한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도진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도진이는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 애예요."

"네."

"취업도 해야 하고 자기 자리도 잡아야 하고."

"저도 알아요."

"아는데 벌써 결혼 약속부터 해?"

"당장 결혼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그거지."

"달라요."

처음으로 서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가 결혼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도진이 진로를 제가 막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은 그렇겠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앞으로는?"

"..."

"서하 학생은 부모도 없다면서."

서하의 손끝이 굳었다.

"결혼하면 누구한테 의지할 건데?"

"..."

"결국 도진이 아니야?"

서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 도진이한테 기대서 살 생각 없어요."

"지금이야 누구든 그렇게 말하지."

"저도 일할 거예요."

"무슨 일?"

"..."

"글 쓰는 거?"

서하의 입술이 굳었다.

"네."

"그게 언제 자리를 잡을지 어떻게 알아요."

"..."

"도진이는 취직해서 자기 인생 시작해야 하는데 옆에서 언제 될지도 모르는 꿈 좇는 사람까지 바카라임져야 해요?"

"제가 바카라임져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결혼하면 바카라임이지."

서하는 숨을 한번 삼켰다.

"저도 준비하고 있어요."

"준비."

어머니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 말은 누구나 해요."

서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래도 울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제가 부족해 보이실 수 있다는 건 알아요."

"부족해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럼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의 말이 멈췄다.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부족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배울게요."

"..."

"제가 고쳐야 할 게 있으면 고칠게요."

"서하 학생."

"도진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노력할게요."

서하는 숨을 한번 삼켰다.

"잘할게요."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왜 자신이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진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니까..."

서하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헤어지라는 말씀만 하지 말아 주세요."

어머니는 서하를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요?"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네?"

"내가 서하 학생한테 뭘 배우고 고치라고 했어요?"

"..."

"나는 그냥 도진이랑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서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람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만 좋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혼하면 서로의 가족까지 엮이는 거예요."

"..."

"그런데 서하 학생은..."

어머니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짧은 망설임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요."

순간,

주변의 소리가 모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서하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머니..."

"솔직히 그렇잖아요."

"..."

"부모도 없고."

"그건..."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알아요."

"저도 가족이 없고 싶어서 없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서하는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던 날.

그래도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고 버텨왔던 시간.

누군가에게 불쌍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부족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시간이 한 문장으로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요.

눈물이 올라왔다.

서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래도..."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도진이랑은 절대 못 헤어져요."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 말이에요?"

"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도진이 정말 좋아해요."

"..."

"어머니가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도 알아요."

"싫다고 한 적 없어요."

"그래도 잘할게요."

서하는 떨리는 숨을 골랐다.

"도진이 힘들게 안 할게요."

"..."

"도진이가 하고 싶은 일도 막지 않을 거고, 저 때문에 자기 인생 포기하게 만들지도 않을게요."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참았다.

"제가 부족한 게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

"고칠 수 있는 건 고칠게요."

서하는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저한테 기회라도 주세요."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하는 기다렸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하지만 돌아온 것은 짧은 한숨뿐이었다.

"난 할 말 다 했어요."

어머니가 가방을 챙겼다.

"어머니."

"잘 생각해 봐요."

"잠깐만요."

어머니는 그대로 돌아섰다.

서하가 한 번 더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카페 문이 닫혔다.

서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진이 자신을 좋아한다.

자신도 도진을 좋아한다.

도훈에게도 약속했다.

절대 엄마 말 때문에 형이랑 헤어지지 않기.

그러니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머리로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 한가운데가 너무 아팠다.

부모도 없고.

집안이라고 할 것도 없잖아요.

서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서하는 황급히 눈가를 닦았다.

그런데 한번 떨어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갑자기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나 수업 끝났어.]

도진이었다.

곧이어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카폐지?]

서하는 급하게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페 문이 열렸다.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서하야."

서하의 몸이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진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왔어?"

목소리가 엉망이었다.

도진은 곧바로 서하 앞으로 다가왔다.

"너 왜 울어."

"아니야."

"아닌데 왜 울어."

"그냥 좀..."

도진의 시선이 테이블 맞은편으로 향했다.

마시다 만 찻잔이 하나 더 있었다.

"누구 만났어?"

서하의 어깨가 아주 작게 굳었다.

도진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서하야."

"..."

"여기서 누구 만났어?"

서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다음 날.

도훈은 전공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다가 복도 끝에 서 있는 도진을 발견했다.

"형?"

"끝났냐."

"응. 여기 웬일이야?"

"너 보러."

도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밥 먹자."

"형이 사?"

"그래."

"뭐야. 수상하게."

"싫으면 말고."

"아니. 먹어야지."

두 사람은 학교 앞 식당으로 향했다.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도진은 별말이 없었다.

결국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도진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너 뭐 아는 거 있냐."

도훈의 손이 멈췄다.

"뭘."

"서하."

"..."

도진이 그 짧은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뭐 아네."

"뭘 안다고."

"어제 서하가 카페에서 울고 있었어."

도훈의 표정이 달라졌다.

"... 울었다고?"

"응."

도진이 동생을 똑바로 바라봤다.

"누군가 만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

"너 뭐 아는 거 없어?"

도훈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을 마셨다.

"형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 몰라?"

"응."

"너 서하랑 얘기한 적 있잖아."

"학교에서 마주치면 얘기하지."

"무슨 얘기."

"별 얘기."

"한도훈."

도훈이 피식 웃었다.

"왜 자꾸 나한테 그래."

"네가 뭔가 아는 얼굴이니까."

"형 착각이야."

도진은 쉽게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도훈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서하와 형의 문제였다.

서하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대신 전하는 것도 이상했다.

게다가 어머니도 형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서하 누나가 말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도훈이 말했다.

"그 이유가 뭔데."

"나도 모른다니까."

도진은 한동안 동생을 바라봤다.

결국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도훈의 마음은 불편해졌다.

울었다고?

설마.

어머니가 또 만난 건가.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도훈은 주방에 있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물었다.

"엄마."

"왜."

"어제 서하 누나 만났어?"

어머니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도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 또 만났네."

"너는 어떻게 알았어?"

그 말이면 충분했다.

도훈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왜 또 만났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엄마."

"너는 신경 쓰지 마."

"서하 누나 울었대."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형이 봤어."

"..."

"카페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거."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도훈아."

"뭐라고 했길래 누나가 울어."

"너는 몰라도 돼."

또 그 말이었다.

도훈은 한동안 어머니를 바라봤다.

"엄마가 나한테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나도 가만히 있었어."

"..."

"서하 누나도 직접 말 안 하니까 내가 끼어들 일 아닌 것 같았고."

도훈이 휴대폰을 꺼냈다.

"근데 이제는 아니야."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뭐 하게?"

"형한테 말하려고."

"한도훈."

"엄마가 또 누나 만난 거잖아."

"하지 마."

"왜."

"괜히 집안 시끄럽게 만들지 마."

도훈은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봤다.

"엄마가 먼저 시끄럽게 만든 거잖아."

"..."

"형 여자친구를 형 몰래 불러서 헤어지라고 했잖아."

도훈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도 가지 않아 도진이 받았다.

― 왜.

"형."

― 응.

"아까 나한테 물어본 거."

수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도훈이 말했다.

"나 알아."

― 뭘.

"엄마야."

잠시 침묵.

― 뭐?

"서하 누나 만난 사람."

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형 몰래 서하 누나 따로 만났어."

― 언제.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 번이 아니야."

긴 침묵이 흘렀다.

"미안."

― 왜 이제 말해.

"서하 누나가 형한테 말 안 하는데 내가 먼저 말하기도 그랬고."

"..."

"엄마도 형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도진이 낮게 물었다.

― 무슨 말했는데.

"정확하게는 몰라."

도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처음 만났을 때 형이랑 헤어지라고 한 건 맞아."

― 뭐?

"그리고 어제 또 만났고."

― 그래서 서하가 운 거야?

"... 그런 것 같아."

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

도훈은 화면을 내려다봤다.

"형?"

불길했다.

---

도진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를 찾았다.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왔어?"

도진은 평소처럼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그저 어머니 앞에 서서 물었다.

"엄마."

"응."

"서하 만났어?"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 도훈이가 말했니?"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도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왜 만났어."

"도진아."

"왜 나 몰래 서하 만났어."

"엄마가 할 말이 있어서."

"헤어지라고 했어?"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

"... 그래."

결국 대답이 돌아왔다.

"그랬어."

도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너를 위해서야."

도진이 허탈한 듯 웃었다.

"나를 위해서?"

"너 아직 어리잖아."

"그래서?"

"앞으로 만날 사람도 많고, 지금부터 한 사람한테 묶여서 결혼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 안 묶였어."

"도진아."

"서하가 나 잡고 있어?"

"..."

"서하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매달렸어?"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잖아."

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고."

"도진아."

"헤어졌을 때도 내가 못 잊었어."

어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만난 것도 내가 원했고."

도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결혼 얘기도 내가 먼저 했어."

"..."

"그러니까 서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알아."

도진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엄마가 나 걱정하는 거 알아."

"..."

"그래도 이건 내가 정할게."

어머니가 아들을 바라봤다.

"내가 누구 좋아할지."

"누구 만날지."

"누구랑 결혼할지."

도진은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말했다.

"그건 내가 정할게."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은 두 사람만 좋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알아."

"가족도 봐야 하고."

"그것도 알아."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가족이 반대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헤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스물두 살에 하는 사랑이 얼마나 간다고 그래."

도진은 잠시 어머니를 바라봤다.

"3년 갔어."

"..."

"중간에 두 번 헤어졌는데도 결국 다시 만났고."

"그게 오히려 안 맞는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

"아니."

도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

"..."

"두 번이나 헤어져 봤는데도 결국 서하더라."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도진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엄마."

"왜."

"나 서하 많이 좋아해."

"..."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서하가 나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좋아해."

"도진아."

"그러니까 서하한테 헤어지라고 하지 마."

도진은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조곤조곤 말했다.

"서하는 못 헤어져."

"..."

"아니."

도진이 고쳐 말했다.

"내가 못 헤어져."

어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엄마가 반대해도 똑같아."

"..."

"서하가 먼저 헤어지자고 해도 붙잡을 거야."

도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제 서하 따로 만나지 마."

"내가 그 애를 만나지도 못해?"

"그런 뜻 아니야."

도진이 고개를 저었다.

"서하 만나서 나랑 헤어지라고 하지 말라는 거야."

"..."

"나한테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어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 울었어."

그제야 어머니의 시선이 흔들렸다.

"어제 내가 카페 갔는데 혼자 울고 있었어."

"..."

"왜 우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도진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

"엄마랑 나 싸우게 하기 싫어서 말 안 한 것 같아."

"..."

"서하는 그런 애야."

도진이 어머니를 바라봤다.

"자기가 상처받아 놓고도 나한테 엄마 욕 한마디 안 했어."

어머니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니까 아프게 하지 마."

도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화를 내는 말투가 아니었다.

부탁하듯 다정했다.

하지만 물러날 여지는 없었다.

"엄마."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도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

"엄마한테 서하 좋아해 달라고 안 할게."

"..."

"당장 며느리로 받아들이라고도 안 할 거고."

"그런데 다시는."

도진이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 몰래 서하 만나서 헤어지라고 하지 마."

"..."

"서하한테 부족하다는 말도 하지 말고."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가족 얘기로 아프게 하지도 마."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을 피했다.

그 반응 하나로 도진은 알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서하가 왜 울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하 부모님 없는 거."

"..."

"그건 서하 잘못 아니잖아."

도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떨렸다.

화가 나서였다.

그래도 끝까지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걔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

"그걸 왜 서하한테 상처 주는 말로 써."

"나는 그런 뜻으로..."

"어떤 뜻이었든 서하가 울었잖아."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진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어머니 앞에 앉았다.

"엄마."

"..."

"나 엄마랑 싸우고 싶은 거 아니야."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엄마가 나 걱정해서 그러는 것도 알아."

"..."

"근데 내가 행복하려면 서하랑 헤어져야 한다고 엄마가 대신 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어머니가 아들을 바라봤다.

"나는 서하랑 있을 때 좋아."

"..."

"헤어져 있을 때보다 같이 있을 때 훨씬 행복하고."

도진이 작게 웃었다.

"그걸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엄마."

도진은 조용히 말했다.

"나 믿어줘."

"..."

"내가 선택한 사람이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진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서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괜찮아."

몇 걸음 옮기다 다시 멈췄다.

"반대해도 돼."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도진은 천천히 돌아봤다.

"그래도 나는 서하랑 안 헤어져."

"..."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나한테 말해."

도진은 마지막으로 분명하게 덧붙였다.

"내가 서하보다 서하를 더 많이 좋아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듯 도진이 잠시 멈췄다.

그러다 작게 웃으며 바로잡았다.

"아니."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서하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서하를 더 많이 좋아하니까."

"..."

"헤어지라고 하려면 서하한테 하지 말고 나한테 해."

도진은 잠시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래도 내 대답은 똑같아."

짧은 침묵.

"나 윤서하 못 놔."

도진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어머니 혼자 남았다.

고함도 없었다.

문을 세게 닫지도 않았다.

화가 난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분명했다.

어머니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반대하면 아들이 고민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스물둘이니 시간이 지나면 마음도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도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정한 뒤였다.

두 번이나 헤어지고도 다시 돌아간 사람.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잊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미래에 당연하다는 듯 함께 두고 있는 사람.

그게 윤서하였다.

어머니는 닫힌 도진의 방문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서하를 밀어낸다고 해서,

도진의 마음까지 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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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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