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먹는 집, 백 년을 기다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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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속은 유독 뜨거웠다.
여름이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에어컨은 분명 켜져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몸속 어딘가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열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은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혼자 사는 자취방은 조용했다.
냉장고가 한 번씩 웅웅 거리는 소리와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 오늘도 또."
새벽 두 시 삼십칠 분.
그 시각만 되면 이상하게 잠이 달아났다.
처음에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시간이 일주일이나 반복되자 우연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았다.
그때였다.
쓱.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식었다.
마치 한겨울의 냉기가 문틈으로 밀려든 것처럼.
"...?"
에어컨이 고장 났나 싶어 리모컨을 찾았지만 전원은 이미 꺼져 있었다.
그런데도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지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번졌다.
침대 맞은편 거울.
그 안에 자신 말고 누군가가 서 있었다.
긴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
창백한 얼굴.
빛 한 점 없는 검은 눈동자.
지은이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 꿈?"
그렇게 넘기려던 찰나였다.
거울 표면에 희미하게 글자가 떠올랐다.
도망쳐.
지은은 얼어붙었다.
누가 쓴 것도 아니었다.
마치 안쪽에서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처럼 서리가 걷히며 나타난 글씨였다.
순간 불이 깜빡였다.
탁.
방 안이 암흑으로 잠겼다.
"...!"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거울에는 또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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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관리인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방이 좀 그래."
"무슨 말씀이세요?"
"전 세입자들도 새벽만 되면 이상한 걸 본다더라."
"귀신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오래된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옥상 창고에 가 보면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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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안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낡은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1926년.
정확히 백 년 전의 기록.
'오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약속했다.'
'벚꽃이 피면 다시 만나자고.'
'나는 끝내 기다릴 것이다.'
이름은 하나만 적혀 있었다.
윤서진.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붉은 얼룩 위에 남겨진 짧은 문장.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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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였다.
지은은 매일 밤 같은 남자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단 한 번도 다가오지 않았다.
항상 창가.
혹은 방문 앞.
멀리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두려움보다 이상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슬픔.
그 남자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당신... 누구예요?"
처음으로 말을 건넨 밤.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윤서진."
목소리는 바람처럼 희미했다.
"당신이... 귀신이에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이었던 적은 있다."
"왜 여기 있는 거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다리고 있어서."
"누구를요?"
"... 약속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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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지은은 서진의 이야기를 들었다.
백 년 전.
그는 의병이었다.
나라를 잃던 시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했지만 끝내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이 집에서 죽었다.
그리고 약속 하나만 붙든 채 시간이 멈춰 버렸다.
"원망하지 않았어요?"
지은의 물음에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오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걸 믿어요?"
"사랑했으니까."
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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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새벽 세 시.
집 안 전체가 흔들렸다.
거울이 깨졌다.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복도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도.
형체도.
없었다.
그저 새까만 안개 덩어리가 수십 개의 팔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쉰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백 년 동안 숨어 있었구나."
서진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 물러서."
그림자가 웃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원혼 따위가."
순간 차가운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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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은 지은을 자신의 뒤로 감췄다.
"눈 감아."
"싫어요!"
"부탁이다."
검은 안개가 집 안을 삼켰다.
천장이 갈라졌다.
벽지가 찢어졌다.
사진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백 년 전.
서진을 죽인 자.
탐욕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내의 악귀였다.
그는 죽어서도 원혼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우고 있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악귀가 웃었다.
"널 먹으면 난 완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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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안 돼!"
지은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또 혼자 남으려고요?"
서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 신기하군."
"뭐가요?"
"백 년 만에 처음이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준 건."
그 말에 지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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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싸움 끝에.
서진은 자신의 영혼을 미끼로 악귀를 봉인했다.
새벽이 밝아오자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진의 모습도 함께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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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흘러 봄이 왔다.
벚꽃이 피던 어느 날.
지은은 집을 떠나기로 했다.
현관문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 기다리게 하지 않았네."
지은이 천천히 돌아봤다.
햇살 아래.
이제는 사람처럼 따뜻한 미소를 짓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창백했던 얼굴에는 온기가 스며 있었고, 검은 눈동자에는 긴 밤을 견뎌 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이 담겨 있었다.
"윤... 서진?"
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 끝났으니까."
"이제야."
"다시 살아 보려고."
지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 년 동안 한 사람을 기다린 영혼.
그리고 그 기다림의 끝에서 다시 시작된 삶.
벚꽃 잎이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귀신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장 오래 사랑한 존재는,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 약속을 놓지 않았던 한 영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지은은 더 이상 새벽 두 시 삼십칠 분에 잠에서 깨지 않았다.
대신 봄밤마다 창문을 열어 두는 습관이 생겼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어디선가 누군가가 조용히 미소 짓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미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오래된 인연이 남긴 가장 따뜻한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