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편혜영 소설집, 문학동네, 2026
시집을 내려는 작가로부터 해설을 요청받은 적이 있었다. 무슨 해설이 필요할까 그대로도 좋은데. 무한하게 연결된 바다와 하늘 같은 시들. 관계였든 겉치레였든 결국 해설을 쓰기로 했었다. 갑작스러운 무게로 세상의 글과 시와 해설의 형식들에 방향을 틀었던 시간의 농도에 감사했다. 최근 그 작가의 글에서 해설을 맡기고픈 사람에 대해 읽었다. 나는 아니었다. 적잖은 균열이 나를 관통했지만 그래도 견뎌야 했다. 가슴에 담고 있던 긴 시간을 폐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는 게 참 호락하지 않다.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것을.
그런 얘기다. 지금, 살자, 어떤 이야기를 품고도 살아있는 지금을 위해. 편혜영이 주는 노련한 위안이다.
살아온 기억과 흔적들을 더듬는다. 알았던, 살아있는, 소멸된, 죽지 않는, 남은, 죽은, 죽이고 싶은,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건조한 기록의 톤이 무겁다. 반드시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루어 질지 아닐지 상관없다는 것이 긴 여운을 남긴다.
우연이 만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다. 필연이라는 건 관계를 기만하는 말이다, 상대로부터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이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해도 좋다. 어차피 궁극적으로 모르는 거 아닌가. 지금 다가오는 것들에 집중하고 같이 나누는 시간들이 결국 전부인 것이다.
생존하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 슬롯가 정해둔 규칙을 들락날락하며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파고드는 바카라략으로 지금 당장을 살아내는 것이다. 같이. 닥치는 반동의 압력을 몸으로 겪고 마음을 다지는 일, 그 거친 시간으로 가장 뜨겁게 산다. 훔친다는 것은 모두 탈탈 털린 가슴의 생존 방식이다. 오랜 과거가 그렇게 가르쳤고 머지않은 과거가 그렇게 살도록 이끈다. 할 수 있다면 상처 난 몸이 준비하는 내일이라는 불가능한 시간이다.
가능한 열정으로 사는 시간들이 아름답다. 불가능한 울분이 대신하는 장면들이 처연하고 비장한 대리 만족을 준다. 막다른 골목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차가운 벽으로 스며들고 마는 절망을 목격한다. 혼자 스러져간 자리를 기억하려는 마음들이 흩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모인다. 각각의 방식으로 사라짐의 슬픔을 해소하려는 살아남은 영혼의 안간힘이 안타깝다. 거기 살아 틀어진, 여기 죽어 응축된 향으로 남은 사람에 대한. 아무도 죽어선 안된다는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외침 같은, 위선, 위안, 자기 연민, 그 또한 생존의 기술이다.
끝 온기가 여는 그 이후에 대한 여행이다. 남은 흔적들이 이끄는 시간 속에는 갈망이 있고 조작되었을 수도 있는 기억과 약속이 있다. 생생하게 이어지는 관계의 엮임들이 떠나간 이를 깊게 이해했다고 착각하게 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떠나는 것은 이후의 시간을 잇게 하고 그 위에 위안과 그 단서들을 얹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라진 후의 흔적들은 시간을 겪으며 흐린 얼룩으로 남아 끝내 건조한 먼지처럼 부유한다. 엄마는 사라지지 않고 떠난다. 뒤를 따라 계속 같이 걸어간다.
사람의 욕망이 실재하고 어떻게든 실현하려는 심리적 층위를 들여다본다. 생각과 그 생각의 주체와 그 주체가 기거하는 장소에 대한 집착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비루한 허세를 인정하는 눈빛은 이미 슬롯적 상징이 된 지역적 장소적 계급과도 상통한다. 강 건너 살아 사모님이 되고 천 아래 살아 아줌마가 된다. 백화점에 가기 위해 명품구두를 사고 재래시장에 가는 운동화 종류에 목소리가 달라진다. 서로 다른 세상은 하나의 심장 속에서 조용히 마주 보며 산다.
남을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는 일은 어쩌면 모두 허사일지도 모른다. 준비하는 사람의 삶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니 서로 이해는 불가능하다. 대체 왜. 말없는 무생명이 남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현상 사이에 충격과 당황이 남는다. 말끔하게 기억되고 싶은 욕망이 속이 다 비어버린 피부에 모조리 배어있다. 두 번 떠나려는 것이 마지막 의도였을까. 얼토당토않은 상상. 모든 생기를 세상에 바쳐버린 가장 얇고 처절한 육신, 따뜻한 물이 닦아내는 생명의 잔여물을 마주한다.
기괴하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낯선 틈이다. 그 틈 안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본 것들이 단서가 되어 어떤 물건이 증거가 되고 구체적인 시간은 알리바이가 된다. 핏줄이 주는 농도가 집착이 되고 과잉된 강박이 된다. 조급하게 처리하려는 시간은 불안을 부추긴다. 죽어버린 걸까. 죽여버린 걸까. 살아있는 주변의 호흡을 급기야 멈추려는 곳에서 다른 신호가 뜬다. 살아있는 증거일까. 살고 싶다는 절규일까. 같은 피가 흐르는 그녀는 옷자락에 밴 붉은 통증으로 산다.
아프다는 것을 보여야 사는 데 이득이 된다는 건 꽤 살아낸 사람들의 깨달음이다. 산 시간이 길면 길수록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슬롯다. 존재한다는 외침, 그 불투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느다란 희망이다. 아프다 소리치는 것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약을 먹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손바닥을 펴 알약을 보여야 하고 색깔대로 무슨 증상에 먹는지 주장해야 한다. 고통을 전하는 데 전력을 다해도 모자라 그 증명에 남은 시간을 바친다. 화상처럼 통증 부위가 보일수록 넓을수록 세상이 인정한다, 살아 있구나, 아프구나. 그러니 보이지 않는 동통, 몸속 깊이 새겨지고 마음속에 문드러진 상처 따윈 잊히고 만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는 말은 그래도 살아내라는 목소리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을 읽었다. 다소 뻔하고 미지근하다. 나머지 온기는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가라는 듯한 단단한 톤이다. 해설은 읽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영화 후 바로 이어지는 언택트 톡의 형식이라 여겼다. 생각할 시간 없이 들이닥쳐 뇌에 기록되어 마치 내 것처럼 자동 입력 저장 출력되는 그런 과정 말이다. 세뇌같이. 바카라이라 해설을 먼저 읽을 수도 있긴 하다. 각자의 몫이다. 언젠가 순서가 바뀔 수도 있다. 지금은 알량한 내 고뇌의 시간을 존중하고 싶다. 그로 인해 조금 더 크게 떠질지도 모를 삶을 향한 나의 눈을 믿어보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