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좋은 식재료 앞에서 정신을 놓는다.
그날따라 예전의 내 다리처럼 매끈하고 통통한 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찌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으랴. 앞뒤 생각 없이 덜컥 3개나 샀다.
오늘은 2026년 9월 15일 화요일, 할 일이 너무 많다. 첫째는 딸 미용실 예약, 둘째는 대학병원 진료, 셋째는 송편소로 넣을 풋콩 사기, 넷째는 초1 손녀와 전화 통화하기. 다섯째는 저녁 8시에 류귀복 작가님의 온라인 북토크 참여다.
문제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어영부영하다 자주 빠뜨리곤 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숫자로 머릿속에 입력하는 버릇이 있다. 나름 나만의 노하우다. (그럼에도 잊곤 하지만)
대학병원에 가기 위해 7시 전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밥을 먹으며 서둘러 카톡으로 첫 번째 일정인 딸의 미용실 예약을 마쳤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딸이 갑자기 머리 염색을 해보고 싶단다.
한 시간 만에 도착한 대학병원은 언제나 붐빈다. 정년 퇴임을 앞둔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약 처방을 받았다.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위 선종 시술부터 진료까지 내 속을 훤히 알고 계신 분이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근 맛집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대학병원에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다. 정갈한 한상은 내 몸에게 주는 위로 같은 선물이다. 한 시간의 대기도 견뎌낼 만큼 맛있었다.
서둘러 세 번째 일정을 위해 집 근처 농산물도매시장에 들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찾던 풋콩은 없고 계획에 없던 무에 꽂힌 것이다. 결국 쪽파 한 단과 무만 덜컥 사 들고 왔다.
풋콩을 포기할 수 없던 나는 인근 마트 몇 곳을 더 들렀다.
요즘은 송편을 집에서 안 하는지, 풋콩은 끝내 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온라인 주문으로 해결했다.
바로 깍두기를 담가야 하지만, 하교하는 손주들을 돌봐야 하기에 서둘러 딸 집으로 향했다. 윤이, 훈이에게 간식을 주고, 쉴 새 없이 집 안 정리를 한 다음 저녁까지 차려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허연 무가 주방에서 '나 여기 있소' 하며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찹쌀 풀을 쑤고 무를 썰어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뿌려 절였다. 적당히란 말은 세월이 가져다 준 나만의 계량이다.
이어 쪽파를 다듬으려고 식탁에 앉아 손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지난 주말, 손녀가 살고 있는 양양에 시동생 부부와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날 손녀와 카페에 가기로 했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변명이라도 해야 했는데 바쁜 일정으로 그만 잊고 있었다.
네 번째 일정까지 마쳤는데 다음에는 또 뭐가 있더라 …
앗! 북토크.
그만 매끈한 무에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북토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류귀복 작가님의 온라인 북토크가 있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망설였다. 하필 분주한 명절 전이기도 하거니와 예전에 다른 작가님의 온라인 북토크를 신청해 놓고 잊은 전력이 있어서다.
그때도 바쁜 일상에 밀려 뒤늦게 알고는 그 자바카라감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그 중요한 순간을 잊다니, 그런 내가 한심하고 한없이 미웠다.
그런 전적이 있어 선뜻 신청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꾸 마음이 쓰였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작가님은 어떤 분 일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신청한 거였는데 또 잊고 있었다.
북토크 20분 전이다.
쪽파를 다듬다 말고 후다닥 일어나 준비에 돌입했다. 다행히 오전에 병원을 다녀온 터라 민낯은 아니다. 빈방으로 노트북을 옮기고 떨리는 손으로 로그인했다.
이제 무가 절여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북토크 참석이야말로 나와의 소중한 약속이니까.
온라인 접속이 무사히 이루어져 가슴을 쓸어내렸다. 북토크 진행자인 백수광부님과 호스트 아호파파님, 주인공이신 류귀복 작가님을 화면으로 마주했다.
진행은 누구보다도 매끄러웠고, 아호파파님의 온화한 미소가 북토크를 더욱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중간에는 축구 중계 대신 북토크를 선택한 조선여인 작가님 모습도 보여서 반가웠다. 북토크에 집중하느라 마음의온도 작가님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처음에는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유를 찾아가는 류귀복 작가님. 이 북토크를 위해 한 편의 에세이를 쓰듯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모습은 역시 세 권의 저서를 펴낸 베테랑 작가다웠다.
작가님의 공식 마케터인 딸 서하의 피아노 연주를 시작으로 정성 들여 작성한 질문지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모습은 모범생 그 자체였다.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씀에는 나도 울컥했다. 슬픔에 매몰되어 아파하기보다 글을 쓰며 잠시라도 편히 숨 쉴 수 있다면, 그 또한 어머니를 오래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이지 않을까.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어 그 마음이 오래 남았다.
온라인이지만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바카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작가님의 호흡으로 느끼고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서하에게 배웠다는 작가님의 수영에 대한 이야기다. 어려서 배웠던 수영을 서하에게 제대로 다시 배운 후 단시간에 더 멀리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서하에게는 분명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작가님은 말한다. 44년이 걸린 거라고. 그것도 서하 덕분에.
이 얼마나 멋진 답인가.
나 역시 1시간이 아닌 2시간이나 무를 절였지만, 41년 주부 경력 덕분에 짜지 않고 적당하게 간을 맞출 수 있었다. 완성된 깍두기의 맛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41년이라는 시간은 그냥 흘러버린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었다.
류귀복 작가님의 북토크는 깍두기와 맞바꿀 만큼 내게 충분히 의미 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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