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짐을 싸면

by희야 ㅡ 박상희

남편이 새벽 6시에 짐을 싸 들고 나갔다. 해방이라도 된 듯 9시가 넘도록 누워 안 되는 일본어를 붙잡고 뒹굴었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슬금슬금 일어나 팬에 올리브유를 칙칙 뿌리고 달걀을 스크램블하다가, 대저 토마토를 썰어 넣고 살짝 볶아 접시에 담았다. 빵도 귀찮고 요거트도 생략한 채, TV 뉴스를 보며 느긋하게 아침을 즐겼다. 몇 개 안 되는 그릇이건만 설거지도 안 한 채 행주로 슬쩍 덮어 놓고 내 얼굴만 꼼꼼히 씻었다.


딸이 예약한 쌀국숫집으로 향했다. 카페거리의 명소답게 대기가 길어 근처 공원에서 1시간이나 기다렸다. 윤이, 훈이까지 넷이서 푸팟퐁카레와 팟타이, 쌀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마침 사위도 새벽 일찍 골프를 치러 가고 없으니, 온전히 우리들만의 시간이었다. 푸르름이 짙어가는 카페 창가에 앉아 망고 빙수와 커피를 마시며, 민생 지원금 업무로 지친 딸아이의 고충을 들어줬다.


집돌이인 윤이, 훈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으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길모퉁이까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새로 오픈한 가게였다. 집에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 나도 줄이나 서볼까 싶어 슬쩍 합류했다. 알고 보니 요즘 뜨는 휘낭시에와 마카롱 맛집이란다. 어쩐지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볼록한 봉지를 한 아름씩 들고 가더라니.


뭔지도 모르고 지나가다 줄을 서서 20분이나 기다려, 가격도 만만치 않은 휘낭시에 두 개와 마카롱 두 개를 사 들고 왔다. 식재료를 살 때는 이 집이 쌀까, 저 집이 쌀까 비교하며 한 푼이라도 아낄 때는 언제고, 유행 따라 줄을 섰던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나를 두고 여행 떠난 남편 탓이라고 우겨본다.


한 달 전이었다. 갑자기 4형제끼리만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우린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영했다. "사형제가 여행 간대요!" 현수막이라도 걸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성사된 여행은 1박 2일 코스로 네 시간 이상 걸리는 남해 쪽이었다. 우리 동서 4인방은 카톡방에서 이참에 자유를 누려야 한다며 서로를 뜨겁게 응원했었다. 그렇게 해 놓고 고작 한다는 것이 딸과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휘낭시에와 마카롱만 달랑 사 들고 돌아왔다. 그것도 엘리베이터에서 요가반 총무님을 만나 반씩 나누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설거지하고 청소도 말끔히 해치웠다. 저녁은 밥도 하기 싫고 만사가 귀찮아 사 온 간식으로 때웠다. 평소에 남편은 거실에서 스포츠 경기를 보고, 나는 안방에서 바카라을 보거나 예능이나 드라마 등을 본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넓은 거실은 물론이고 리모컨까지 독점했다. 리클라이너 의자에 누워 늦게까지 TV를 보다 스르륵 잠들었다.


새벽녘 잠이 깨었으면서 침대 속에서 종일이라도 누워있을 것처럼 또 게으름을 피웠다. 10시가 지나니 빈속에서 전쟁이다. 어제저녁도 부실하게 먹었기에 아침만큼은 제대로 차려 먹기로 했다. 달걀 두 개를 스크램블하고 토마토와 브로콜리를 올리브유로 살짝 볶아 접시에 담았다. 단백질 섭취를 위해 닭가슴살도 올리고, 발사믹 소스를 뿌렸다. 냉장고에 있던 키위와 사과도 가지런히 담았다.

평소 남편과 매일 먹던 삶은 병아리콩과 아몬드, 블루베리를 얹은 요거트도 준비했다. 혼자 먹어도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지 완전 꿀맛이었다. 남김없이 싹 비우고 나니 힘이 난다. 그동안 미뤄오던 옷 정리를 했다. 남편은 무엇이든 버리는 걸 싫어한다. 되도록 없을 때 처리하는 것이 상바카라이다. 맞서봐야 소리만 커질 뿐이니, 피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기에 깔끔하게 정리했다.


배꼽시계는 거르는 법을 모른다. 탄수화물이 나를 부른다. 마침, 삶은 곤드레나물이 냉장고에 있어 솥 밥을 하기로 했다. 쌀 1인분을 씻어 불리고, 고명으로 올려줄 표고버섯과 당근을 채 썰었다. 솥 밥엔 국물이 진리다. 소고기뭇국도 끓였다. 30분쯤 불린 쌀을 작은 솥에 넣고, 곤드레나물을 국간장에 살짝 버무려 넣었다. 썰어둔 당근과 표고버섯까지 모두 올려주었다. 넘치지 않도록 약불로 줄이며 서서히 뜸을 들였다. 짜잔! 양념간장은 양조간장, 참기름, 깨소금만 넣어 점심 겸 저녁으로 맛나게 비벼 먹었다.




2주 후에는 반대로 내가 가방을 싸 들고 집을 나섰다. 어린아이를 두고 가는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야무지게 짐을 챙겼다. 우리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한정식집에 모여 점심을 해결하고 출발했다. 우리가 머물 장소는 자연휴양림 내에 있는 숙소였다. 카트까지 동원하여 짐을 옮겼다. 비록 일곱 명 중에 네 명만 참석한 야유회였지만, 푸짐하게 준비했다.


녹음이 짙어가는 5월의 숲속은 낭만 그 자체였다. 새들의 환영 송이 울려 퍼지고, 온몸을 파고드는 싱그러운 숲 냄새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었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산바카라하며 자연과 하나 되는 황홀한 순간을 만끽했다. 저녁이 되자 옆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음식으로 저녁상을 차렸다. 여기까지 와서 고기를 굽는 것은 내키지 않아 우린 미리 보쌈을 주문해서 가져왔다.


이번 여행을 위해 며칠 전부터 알배기 배추김치와 열무김치를 담갔다. 전날에는 채소와 과일, 음료 등을 사고 밑반찬도 몇 가지 만들었다. 가져온 반찬에 채소전까지 부쳐낸 저녁상은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여전히 상담 봉사를 이어가고 있는 선생님들을 위해 꼭 한 번은 정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싶었다. 저녁 후에는 이 선생님이 가져온 상큼한 향의 와인으로 숲속의 밤을 뜨겁게 달궜다.


그럼, 상담사들이 야유회를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다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마침 버츄카드가 생각나서 들고 온 참이었다. 우린 그렇게 술잔을 기울이며 버츄카드의 52가지 미덕을 가슴에 품고 숲속의 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나가던 새들이 유리창에 쿵! 부딪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여기까지 와서 새벽 산바카라을 안 한다는 것은 대역죄인이 될 것만 같은 날이다. 싱그러운 풀 냄새와 나무 내음이 코끝을 간질이고, 알맞은 온도와 적당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쏘냐.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멈춰지지 않는 발길이 빙그르르 돌며 새벽 숲길과 하나가 되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처럼 또다시 상을 차렸다. 이 선생님 딸이 두바이에서 공수해 온 귀한 빵과 소스가 등장하고, 지인이 선물해 준 커피와 내가 준비해 온 채소와 과일로 화려한 아침상이 완성되었다.


한바탕 산바카라도 마쳤으니 무엇인들 맛있지 않으랴. 배가 부르다면서도 우리는 식탁 위의 접시를 새하얗게 비워냈다. 그 와중에 남편에게 내준 숙제가 도착했다. 끼니마다 인증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말했던 터였다.


나 없으면 행여 끼니를 거를까 봐 몇 번이고 당부했었다. 다행히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여 앞으로 자주 짐을 싸도 괜찮을 것 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짐을 꾸리고 체크아웃하고도 아쉬워 숲 산바카라을 한 번 더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나의 1박 2일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떠나지 못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1박 2일이 아니라 2박 3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 야유회 #여행 #부부 #상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