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맛집도 오픈런이 필요해

단풍보다 사람 구경을 더 많이 한 날

by호사


토요일 새벽 5시. 침대에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몸을 셀프 멱살잡이해 가며 속으로 외쳤다.


“지금 안 일어나면 올해는 끝이야.”


일요일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이 있으니 더 미룰 수가 없었다. 매년, 단풍철이면 찾는 곳이 바로 북한산 숨은벽이다. 멀리 가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시간도 마음도 지갑도 여유가 없다. 대신 좋아하는 숨은벽에 가서 병풍처럼 펼쳐진 단풍 숲을 보고 나면 한 해 가을을 제대로 마무리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몇 주 전부터 내 볼은 단풍처럼 불타고 있었다. 독감과 폭풍 업무의 콜라보 시즌이었다. 정상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밀려드는 일을 쳐냈다. 몇 주째 노트북 앞에 붙어 일하느라 양 볼이 단풍색이 됐다. 이대로 어영부영하다 실물 단풍 한 번 못 보고 가을을 마감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세수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첫차를 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평일에 비해 토요일 새벽은 비교적 한산하다. 모자란 잠을 채우며 40여 분을 달려 효자 2통 정류장에 내렸다. 신선한 산 공기를 마시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은 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가을이 끝나가고 곧 겨울이 온다는 신호다. 눈이 오기 전까지 몇 번 더 산에 갈 수 있을까? 언젠가 설산 구경을 하러 눈 쌓인 산을 오르다 크게 넘어질 뻔 한 뒤 기준이 생겼다. 산에 눈이 쌓이면 그해 등산은 종료. 다음 해 봄 눈이 다 녹아야 등산을 시작하는 내게 올해 산행 기회는 몇 번 남지 않았다.


정류장에서부터 저벅저벅 걸어 <밤골탐방지원센터>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사람이 없나 했는데 등산로 입구 근처에 가니 화장실 앞이 북적인다. 역시 성수기는 성수기구나. 평소라면 두세 팀쯤 있을 시간인데 열 팀 넘게 모여 있다. 더 혼잡해지기 전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벤치도 만석이라 근처 바위에 가방을 놓고 등산 스틱을 꺼내 세팅하고, 장갑을 낀 후 몸을 풀었다. 하나 둘 셋. 등산 앱의 출발 신호에 맞춰 뚜벅뚜벅 산을 올랐다.


자주 다니던 코스라 새로운 건 없었다. 익숙한 계단, 낯익은 암릉, 친근한 너덜길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랐다. 멈추지 않고 걷다 보니 어느새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이미 해는 떠서 주변은 환했다. 드디어 여유롭게 숨은벽 단풍을 누릴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쁨도 잠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벼르던 맛집 오픈런에 실패하면 이런 기분일까? 마당바위 위에는 부지런한 등산객들이 가득했다. 새벽 산바람을 타고 솔솔 풍겨오는 매콤 짭짤한 컵라면 냄새. 왁자지껄 인증샷 남기기에 열중인 사람들의 소음. 어느 할아버지의 휴대용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까지... 사방을 채우고 있었다. 고요한 가을 산을 기대하며 해도 뜨기 전부터 올랐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 각설이만 없는 산중 장터였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성수기 한가운데에서 고요를 찾으려 한 건 완벽한 욕심이었다.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이 분위기가 즐거웠다. 자주 앉았던 낮은 소나무 아래 자리는 이미 만석이라 그나마 숨은벽이 잘 보이는 바위 한쪽에 휴대용 방석을 펴고 자리를 잡았다. 아침부터 챙겨간 빨간 사과 하나를 꺼내 씹으며 새빨간 단풍을 눈에 넣었다. 무자비한 소음도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이어폰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새삼 고마웠다. 사과에 이어 단백질 두유까지 비우고 5분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산 준비를 했다. 거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오니 더 머무르는 건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내게 허락된 올해의 숨은벽 단풍은 여기까지다.


평소라면 공포의 암릉을 지나 백운대까지 갔겠지만 숨은벽이 인파가 이 정도면 백운대는 12월 31일 보신각 앞 수준일 거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하산을 택했다. 사람에 치여 산으로 피했는데 그곳에서까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발버둥 치기 싫었다. 올라온 길 말고, 계곡 쪽 길로 하산하는데 길이 험해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하산길 마무리쯤 만난 한 노부부가 벌써 내려가냐며 말을 걸었다. 첫차 타고 왔다고 조심히 올라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등산을 시작했던 밤골탐방지원센터는 아까보다 더 북적거렸다. 외국인 단체 여행객에, 지방에서 올라온 산악회, 인증샷 찍느라 정신없는 운동화에 운동복 차림의 젊은이들까지 크리스마스 명동 한복판처럼 사람이 많았다. 아까 침대 위에서 조금만 더 늑장을 부렸다면 아마 이 인파 속에서 등산을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과거의 나를 칭찬하며 등산을 마무리했다.


내가 알던 조용하고 수줍은 숨은벽은 이제 없다. 너무 알려져 ‘숨은벽’이 아니라 ‘들킨벽’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단풍맛집 오픈런은 실패했다. 고요한 산에서 단풍을 즐기겠다는 계획은 틀어졌다. 다음엔 미루지 말고, 단풍 성수기가 오기 전에 미리 움직여야겠다. 올해 단풍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극한의 계획형 인간은 그렇게 내년 산행 계획을 벌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