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해준 밑반찬이 먹고 싶어.”
애틀랜타에 사는 딸이 카톡을 보냈다. 그 말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비행기표를 끊었다. 자식이 무어라고 반찬 몇 가지 해주겠다고 비행기까지 타나 싶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새벽에 뉴욕집을 나섰는데 비행기 연착으로 일곱 시간 만에야 겨우 딸의 얼굴을 마주했다. 피곤한 몸으로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한인 마트였다. 평소 미국 음식을 주로 해 먹는 아이들이니 기본양념조차 제대로 갖춰 놓았을 리 없었다. 카트를 밀며 진열대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멸치, 진미채, 장조림 고기, 신선한 나물거리, 기운을 북돋아 줄 전복죽 재료까지 듬뿍 담았다. 딸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말렸고, 나는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실랑이를 벌였다. 카트 손잡이를 쥔 채 옥신각신하던 순간. 수십 년 전의 어느 날이 겹쳐졌다.
구순을 넘긴 친정엄마는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 수시로 집으로 오셨다. 틈만 나면 반찬을 만들고 과일을 사 와 냉장고 안을 빈틈없이 채워 넣으셨다. 그런데 그 시절의 나는 그게 참 버겁고 싫었다. 해주고 가신 반찬들을 먹지 않아 버릴 때마다 속이 상했고, 내 살림을 엄마 식대로 싹 바꿔놓을 때마다 화가 났다. 딸 집에 오면 일하지 말고 쉬시라는 당부도 소용없었다. 그때 속으로 깊이 다짐했었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 이유로 결혼한 딸네 집을 자주 가지 않았다. 친정엄마처럼 바리바리 음식을 해다 주지도 않았다. 그 대신 딸에게 일러두었다. “네가 부르면 엄마는 언제든 갈 테니 필요할 때 부담 없이 이야기해.”
마트를 나서 딸 집에 들어서니 게스트룸 탁자 위에 아기자기한 ‘웰컴 키트’가 놓여 있었다. 나를 위해 딸이 준비해 둔 작은 향수와 생수, 차와 스낵 몇 봉지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가끔 와야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장바구니를 풀고 앞치마를 둘렀다. 낯선 주방이었지만 도마 위에 칼을 올리자, 금세 내 부엌처럼 손에 익었다. 냄비에서는 장조림이 졸아들고, 프라이팬에서는 멸치가 고소하게 볶아졌다.
늦은 밤, 식탁 위에 반찬들을 차려 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위는 숟가락을 들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분 좋은 추임새를 넣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내는 모습에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사실 냉장고 선반을 다 꺼내 닦아주고 살림살이도 말끔히 정리해 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꾹 참았다. 친정엄마의 일방적인 사랑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짜증을 냈던 철없던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2박 3일 동안 우리는 ‘따로 또 같이’ 머물렀다. “엄마, 내일 아침엔 된장찌개, 저녁엔 비빔국수 콜?” 신나게 메뉴를 읊는 딸의 말에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낮에는 둘 다 일하느라 바빠 챙겨온 바카라을 읽거나 동네 집들을 구경했다. 뉴욕과 달리 집들이 널찍널찍하고 자연 친화적이어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딸과 엄마 사이도 여느 인간관계처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내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 것.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한 걸음 물러서서 참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친정어머니를 통해 깨닫고, 이제 딸에게 건네는 사랑이다.
떠나는 날 아침, 딸은 반찬통으로 채워진 냉장고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엄마, 반찬 잘 먹을게. 다 떨어지면 또 카톡 할 거야!” 그래, 딱 이만큼의 거리면 충분하다. 필요할 때 기꺼이 날아와 정성껏 밥 한 끼 지어 먹이고, 서로의 일상을 응원하며 쿨하게 돌아설 수 있는 사이.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 길, 차창 밖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맑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