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두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카메라 앞에 선 오픈AI CEO 샘 올트먼은 얼굴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얼굴은 있었는데 표정이 없었다. 능숙한 미소나 미리 준비된 비유로 드러나는, 카메라를 의식한 사람의 계획조차 없어 보였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도,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모두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반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걸 대답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AI 다큐: 종말론적 낙관주의자가 되다》는 그렇게 끝난다. 올트먼, 아모데이, 하사비스, 세 사람은 지금 인류의 문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 거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기, 카메라 앞에서, 그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감독은 그 장면을 자르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에서 언어가 증발하는 그 시간, 그 어색한 침묵을 그대로 두었다. 마치 사고 현장에서 바카라임자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장면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두려움이 없어야 할 사람들이, 가장 두려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영화는 다니엘 로어와 찰리 타이렐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2026년 선댄스에서 첫선을 보였고, 지난 9월 넷플릭스로 공개됐다. 로어 감독은 곧 첫 아이를 맞을 예비 아빠였다. 누군가의 슬롯적 지위나 경력이 아니라 그저 곧 아이를 가질 사람의 위치에서, 그는 AI라는 거대한 시대 변화 앞에 선다. 그의 아내 캐롤린 역시 영화 곳곳에서 내레이션으로 출연하는데, 그 음성은 절망에 빠졌다가 공포에 떨었다가 의심했다가 다시 희망하기를 반복한다.
중립이라는 허상
영화는 세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AI로 인한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이 인터뷰이로 나와 인류의 존재론적 위험을 경고한다. 요슈아 벤지오, 엘리저 유드코프스키, 팀닛 게브루 같은 AI 전문가, 혹은 내부고발자들이다. 누군가는 로어 감독의 태어날 아이가 고등학교까지 살아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존재론적 위기가 몰려온다. 당장이라도 영화를 멈추고, 지구 종말이 오기 전 인생을 즐기러 뛰쳐나가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인다.
다음 단에서는 낙관하는 사람들이 나와 AI가 열어줄 풍요의 시대를 말한다. 질병이 사라지고, 노동이 줄고, 인류가 황금기에 들어선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는 같은 기술의 다른 얼굴도 함께 보여준다. 난치병을 고치는 단백질 구조를 찾아내는 모델과, 신무기의 설계를 최적화하는 모델은 같은 개념으로 만들어진다. 생명을 살리는 손과 인류를 지울 수 있는 손이, 엄밀히 말하면 같은 손이다.
그리고 세 번째 단, 다섯 명의 거대 기업 CEO 중 세 명이 등장해 말은 하지만 답은 없다. 그게 지금 인류가 처한 현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을 대표하는 이 세 명의 AI 기업 CEO들은 자신들이 멈출 수 없는 이유로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쁜 정부'를 꼽았다. 자신들은 선한 사람들이고, 이 기술을 선을 위해 쓰고 있다는 자부심이 그 언급 안에 함께 들어있었다. 나는 이게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사실 답이 없었던 게 아니라, 답이 따로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답은 자기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았다.
감독은 이 구성을 균형을 갖춘 중립적 태도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비관과 낙관을 나란히 놓고 관객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다큐멘터리 특유의 겸손, 양쪽의 말을 다 들려주고 판단은 당신의 몫이라고 말하는 익숙한 제스처였다. 그런데 이 구성 자체를 의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큐멘터리에 정말 중립이라는 게 있을까.
과학기술학자 실라 재서노프는 '슬롯기술적 상상'이라는 말을 썼다. 어떤 기술의 미래상, 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그것이 객관적 예측이 아니라 특정 슬롯와 집단이 만들어낸 상상이라는 뜻이다. 이 개념을 영화로 가져오면, 비관과 낙관이라는 두 개의 상을 나란히 배치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중립적이지 않다. 그 배치가 관객의 사고를 적어도 두 가지 틀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하나는 '극단 사이의 균형'이 제일 이성적이라는 틀이다. 비관과 낙관 양쪽을 다 진지하게 들어주고 어느 쪽에도 온전히 기울지 않는 게 '현명한' 태도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면 규제를 서두르자는 강경론이나, 아예 개발을 멈춰야 한다는 극단론은 상대적으로 성급해 보인다.
다음은 '누가 이 논쟁의 중심인가'라는 틀이다.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도, 결국 CEO들도 모두 업계 안의 전문가나 경영진이다. 그러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업계 내부자들만으로 좌표가 고정되고, 노동자나 규제 당국자, 피해 지역 주민 같은 다른 목소리는 처음부터 틀 밖에 있게 된다. 영화에 양쪽 의견이 다 있으니 균형 잡혔다고 느끼게 만들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멈추도록, 더 물어보지 않도록 유도한다. 다큐멘터리가 중립을 자처하는 그 순간, 역설적으로 그 중립 자체가 하나의 설계가 된다.
영화 속 어느 장면도 중립적이지 않다. 카메라가 누구를 비추는지, 어느 질문을 먼저 던지는지, 누구의 어떤 멘트를 더 강조하고 화면에 오래 비추는지. 그 선택들이 이미 관객의 생각을 틀 안에 넣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영화 밖에도 이렇게 개인들이 나란히 서서 현실을 틀 안에 가두는 경기장이 하나 있다. 샘 올트먼과 일론 머스크는 2015년 비영리 법인으로 오픈AI를 함께 세웠다. 3년 후, 머스크는 이슬롯를 떠났다. 이후 오픈AI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영리 법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두고, 머스크는 설립 정신을 배신했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걸었다. 2023년에 그는 따로 xAI를 세우고 그록을 만들었다. 지금 머스크는 올트먼을 '돈만 밝히는 아이'라고 비난한다. 올트먼은 구글의 AI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머스크는 그런 올트먼을 도덕적으로 비판한다. 둘 다 다른 사람에게 AI를 다루기에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둘 다 자기 회사의 AI 개발은 멈추지 않는다. 조금 쉽게 보면, 이걸 마치 두 연예인의 추한 싸움처럼 읽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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