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을 사랑할 때 생기는 일들
"사랑의 시기는 끝났다. 이제 이재명 정부와 지지자의 관계는 우정으로, 비판적 지지로 넘어가야 한다."
김어준이 방송에서 선언했다. 그 근거로 철학자 박구용의 개념을 빌렸다.
문장 하나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다. 정치 중매자라는 직업이 어떻게 하나의 생태계로 자라났는지, 사랑이라는 틀 자체가 왜 처음부터 자기모순을 안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 현상이 진영을 가리지 않고 거울처럼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까지 따라가보려 한다. 그 모든 결과로 지금 한국 정치에 실제로 어떤 해악이 쌓이고 있는지, 그 앞에서 주권자인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까지.
사랑에서 우정으로
김어준은 9월 28일 방송에서 "내 몸처럼 걱정하고, 내 몸보다 더 걱정하며 돌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이재명 정부에 대한 사랑의 시기가 끝났다고 선언하고, 철학자 박구용의 우정 개념을 빌려 이제는 비판적 지지, 즉 우정의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빌려온 철학자부터가 중립적이지 않다. 박구용은 2024년 9월 이재명이 임명한 민주당 교육연수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탄핵 촉구 집회에 나온 2030 여성들을 "남성 동원용 정보"라고 표현해 성적 대상화 논란을 일으켰고, 이듬해 2월에는 2030 보수 남성들을 향해 "스스로 말라비틀어지게 해야 한다"는 발언까지 더해 끝내 자진 사퇴했다. 그동안 민주당이 여성을 바라보고 대하는 남성우월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시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청년 세대에 고착화되었다.
민주당의 교육을 맡았던 인물이, 지지층을 향해서는 돌봐야 할 몸으로, 반대편을 향해서는 말려 죽여야 할 대상으로 말한 것이다. 시민을 정치적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하거나 제거할 감정적 자원으로 보는 시선이 두 발언을 관통한다. 지지자 전체를 사랑의 총량으로 환산하는 이번 발언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런 이력을 가진 인물을 방송에서는 그저 "철학자"라고만 소개한다. 당직자 전력도, 논란의 당사자였다는 사실도 지워지고, 철학이라는 중립적인 언어의 외피만 남는다. 당의 메시지를 철학의 언어로 세탁하는 방식이다.
이 가스라이팅의 구조는 사실 처음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같은 문법이 이미 작동했다. 지지층 내부에서 비판이 나오면 "너 문재인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의 국민의힘은, 민주당은 다를까. 인물만 바뀌었을 뿐 이러한 태도는 계속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반대편을 향한 무기가 아니라 내 편을 향한 검열의 도구로 쓰인 것이다. 사랑은 비판을 흡수하지 못한다. 사랑은 강요한다, 왜 나를 여전히 사랑하지 않느냐고.
이 구조는 종교적 신앙 고백과 닮아 있다. 믿음의 대상에게 의심을 품는 순간 신자로서의 자격을 의심받는 것처럼, 지지자가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가 돌려받는 건 설득이 아니라 배신자라는 낙인이다.
이재명 정부에 대한 사랑의 시기가 끝났다는 김어준의 선언은 그의 유튜브 프로그램을 매일 아침 챙겨 듣고 그의 해석을 정치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온 열성 청취자들에겐 상처를 건드리는 트리거가 된다. 이들이 상처받는 지점은 구체적이다. 그동안 쏟아온 시간과 신뢰, 즉 방송을 챙겨 듣고 댓글로 응원하고 이재명에 대한 김어준의 해석을 되풀이해 퍼뜨린 행위 전체가 이제 와서 과도했던 사랑으로 규정되고, 그 사랑을 거두는 결정권마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김어준에게 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들은 김어준을 버릴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과의 관계를 끝낼지 말지조차 김어준이 쥐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그들을 그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이쯤되면 김어준을 '정치 중개인(브로커)'가 아닌 사랑 타령하는 '정치 중매자'라고 부르는 게 맞다.
그러니 이들은 김어준을 떠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말을 더 붙들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이재명 대통령과 우정이라는 새 자격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골몰한다. 문화이론가 로런 벌랜트는 이런 패턴을 '잔인한 낙관'이라고 불렀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이 사실은 나의 성장이나 자율적 판단을 가로막고 있는데도, 그 애착을 포기하는 순간 더 큰 상실감이 찾아올 것 같아서 오히려 더 단단히 붙드는 역설이다. 벌랜트가 예로 든 건 아메리칸 드림처럼 좋은 삶에 대한 약속이었지만, 여기서는 그 약속의 자리에 김어준이 해석해주는 정치가 들어선다. 사람들은 김어준의 해석을 놓아버리면 당장 자신이 무엇을 믿고 판단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때문에, 그가 이재명 정부에 사랑이 식었다고 선언하는 순간조차 지지자들은 김어준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그 선언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 그에게 매달린다. 관계를 시작한 것도, 끝낸다고 선언하는 것도, 그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도 전부 김어준이다.
정치 중매자의 계보
이것이 김어준이라는 인물 하나의 일탈로 끝나는 이야기라면 가벼웠을 것이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이건 대한민국 슬롯에 자리 잡은 하나의 직업군이다.
고성국은 2007년 프레시안 평론가로 복귀한 뒤 진보 진영의 간판 논객으로 자리 잡았고, 나는 꼼수다와 한겨레TV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패널로 출연했다. 지금은 완전히 보수로 전향해 김어준과 더불어 양 진영 장외 스피커로 나란히 불린다. 전향의 동기를 신념의 전환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진보 진영에는 이미 김어준, 김용민, 정봉주, 주진우가 자리를 채우고 있어 파이가 작았고, 보수 쪽에는 1인 미디어 스피커가 거의 없었다. 자리가 찬 쪽과 빈 쪽, 그 틈을 읽은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다만 이 전환은 어느 한 순간의 계산이 아니라, 2007년 복귀 이후 수년에 걸쳐 친박 성향으로 서서히 옮겨간 점진적 과정이었다.
점진적인 이동이었다 해도, 그 방향을 정한 건 결국 시장 논리였다.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합리적 자본주의와 대비시킨 개념, 천민자본주의다. 베버가 말한 근대 자본주의는 합리적 계산과 생산성 향상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쪽이었고, 천민자본주의는 그와 달리 전쟁, 정치권력, 신분적 특권처럼 이미 존재하는 권력 구조의 틈새에서 중개와 투기를 통해 이윤을 뽑아내는 쪽이었다.
고성국과 김어준에게 적용하면 이렇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건 새로운 정보나 분석이 아니다. 그의 실제 상품은 진영과 진영 사이, 그러니까 양쪽 모두에 스피커가 필요하지만 어느 한쪽에 자리가 다 찼을 때 생기는 빈틈이다. 진보 진영의 자리가 꽉 찼을 때는 그 포화 자체가 고성국의 상품 가치를 떨어뜨렸고, 보수 진영에 자리가 비었을 때는 그 공백이 곧바로 그의 몸값이 됐다. 생산을 통해 가치를 키운 게 아니라, 권력의 분포가 바뀌는 자리마다 옮겨 다니며 그 틈에서 수수료를 떼어내는 구조다.
이건 몇몇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치 중매자라는 직업 전체가 이 원리로 돌아간다. 정당이 유권자와 직접 대화하지 못하는 자리를 찾아 들어가 해석이라는 서비스를 팔고, 그 자리가 다른 중매자로 채워지면 또 다른 빈틈을 찾아 옮겨 간다. 이 경제에서 중매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경쟁자가 아니라 틈이 메워지는 것, 즉 정당과 언론이 제 역할을 되찾아 중개가 필요 없어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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