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일이 있었다. 사양서를 뜯어보고, 도면을 대조하고, 엑셀에 숫자를 하나하나 채워 넣던 일. 그게 이제는 한 시간이면 끝난다. AI가 초안을 뽑아주고, 정리해 주고, 심지어 놓친 부분까지 짚어준다.
편해진 게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만큼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다.
결과는 빨리 나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게 맞는지 확인하는 건 결국 나다. 숫자 하나, 문구 하나까지 다시 들여다보고, 바카라임을 지는 건 여전히 나의 몫이다. 만드는 시간은 줄었는데, 검증하는 시간은 그대로거나 오히려 더 늘었다. 속도가 빨라진 건 절반뿐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는다.
도구는 주어졌다. 그런데 그 도구를 제대로 쓰는 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알아서 부딪혀보고, 알아서 익혀야 한다. 편리해지라고 준 것 같은데, 오히려 그걸 익히는 몫까지 내가 떠안은 기분이다. 이게 냉혹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도구는 손에 쥐여줬으니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말없는 통보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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