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의 계절을 꿈꾸며
곤충 거미
어렸을 때는 무서웠는데 이제 아니다.
삐뚤빼뚤, 네 글씨보다 놀라운 건 아직 글자를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하는 너의 이름이 도서관 게시판에 붙어있다는 거였다. 아이들 학교 도서관에 독서 지원단 활동을 하러 갔을 때 너의 그 글자를 보는데 오랫동안 한참 서있었다.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해 '곤충 채집통'의 '충채'라고 이름을 썼던 아이.
성은 옆에 짝꿍 이름을 베꼈는지 이름이 김충채가 돼버렸던 우리 작은 아이.
아이의 글자 파악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너무 더디고 느렸다. 사실은 느리기만 하면 기다려 줄 수 있을 텐데 가르쳐 봐도 '연결'이 힘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난독증 검사를 했고 난독증으로 판명되기 위해선 지능 검사도 수반되어야 했기에 웩슬러 지능 검사도 함께 실시했다. 여기엔 아이가 7살 중반부터 다니기 시작한 동네 공부방, 아소비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숫자를 연결하거나 계산하는 것도 무리가 없고 언어 공부도 열심히 하는데 좀처럼 읽어내질 못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너무 더디기에 선생님께선 조심스럽게 나에게 그 부분을 이야기해 주셨다. 나도 영국에 있는 두 달 동안 아이를 붙들고 밀착해서 가르쳐 보니 확실히 달랐다. 큰 아이는 바카라을 워낙 좋아해서 5살 때부터 소리 내서 바카라을 읽거나 글자에 흥미를 가지고 글씨를 썼다. 서둘러 아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검사를 진행했다.
아이들을 학교, 학원이나 공부방 같은 교육 기관에 보내보면 안다. 아이의 부족한 부분이나 더딘 부분 하나를 이야기해 주는 게 선생님 입장에서도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그러니까 아무 말도 없다는 건 잘하고 있다는 또 다른 칭찬이라는 아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말씀도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부모가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할까 걱정하는 마음들로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골라준 언어와 따뜻한 관심에 아소비 선생님과 아이 담임 선생님께 고맙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부족한 부분을 더 보듬어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기에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난독증을 파악하는 KOLRA(Korean Language Reading Assessment) 보통 '콜라 검사'라고 하는 읽기 장애 난독증의 유무와 유형, 해독이나 이해, 듣기 이해 같은 영역을 평가하는 데 쓰인다. 다만 난독증의 최종 진단은 콜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능검사와 학업 성취도, 정보처리 능력 평가를 함께 보는 전체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나는 가장 많이 쓰이는 표준 지능 검사인 웩슬러를 사용했다. (K-WISC-V기준)
바카라을 읽는다는 거,
글자를 쓸 줄 안다는 거.
나에겐 그냥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이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구나. 다르게 접근해서 조금 더 시간을 들여 배우고 하나씩의 소리로 배워야 하는 사람도 있구나. 새롭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음으로 글자를 배우면 더 재밌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엄마는 활자 중독까진 아니어도(사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라왔다. 뭐,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울하거나 슬플 때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뭔가를 뽑아서 그냥 그대로 읽어버리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읽고, 아니 읽는데 그치지 않고 쓰고 싶어서 … 자꾸만 뭔가를 쓰고 싶어서 마음이 타오르는 사람인데 ….
잠시 우울하기도, 울적하기도 했다.
읽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 삶일까! 좀 슬픈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웩슬러 검사를 통해서 아이에게 부족한 시공간과 유동추론 같은 영역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나는 큰 아이도 비슷한 시기에 웩슬러 검사를 해봤기에(8살, 1학년에 막 입학했을 때, 지능이 단단하게 쌓이는 4학년 시기, 그리고 사춘기 즈음, 중학교 1학년때 이렇게 총 세 번을 해보면 아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검사에도 부담과 기대보다는 조용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냈다.
생각보다 마음이 고요했다. 나답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담담한 기분이 들었다.
지능은 뛰어나게 높지 않아도 각 5개의 기본 지표 영역이 (언어이해, 시공간, 유동추론, 작업기억, 처리속도) 육각형 인간처럼 골고루 비슷한 점수인 게 안정적이고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난히 낮았던 시공간은 예를 들어 악보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거나 뭔가를 보면서 그대로 따라 그리거나, 설명서를 보면서 레고를 만들거나 하는 동시성의 영역인데 이 부분처럼 하나가 약하면 자연스레 뭔가의 수행 능력과 처리가 훅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위해 지능 1, 2점을 더 올린다고 아이가 어려워하는 악기를 더 열심히 가르친다고 오르는 것은 아니기에 자체의 점수보다는 아이를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 꾸준하게 쉽게라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를 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울보에 감정적인 내가 담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은 어느 정도 정보를 찾아보고 상담을 하면서 '난독증'이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독증은 대부분 유전 요인이 아주 큰 편인데 나와 아주 가까운 내 조카, 우리 언니의 막내딸도 난독증으로 엄청 힘든 시기를 보내고 울고, 어려워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4학년때까지 이어진 훈련으로 좋은 선생님도 만나고(영국은 한국과 달리 학교에 특수 언어 교사가 늘 학교에 상주해 있고 난독증 아이들을 따로 가르치고 훈련시켜 준다. 시험기간에는 난독증 아이들에겐 추가로 여분의 시간을 몇십 분씩도 더 준다고 한다. 한국은 아직 이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지 못했지만 5, 6년 전부터 난독증 아이들을 위한 검사와 16회분의 언어치료 바우처가 교육청에서 지급된다. 이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 선진국을 따라가기는 멀었으나 학교 안에서도 실시간 아이들을 살피고 돌봐준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지금은 14살이 됐는데 글자도 읽고 쓰는 건 물론이고 어려운 성경바카라도 낭독할 수 있다.
물론 난독의 계절을 거치고 지나면서 낭독하기까지 조카는 얼마나 울고 울었을까. 엄마도 함께 울고 기다려준 시간들이었겠지. 왜냐하면 학교에서 하는 대부분의 공부, 국어뿐 아니라(그 나라에선 영어였겠지만) 슬롯도 과학도 사실은 글자를 읽지도 못하면 온통 답답함과 별세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머지 공부를 하고 울고 체조나 운동에 흥미를 가져서 꽤 운동실력도 좋았던 우리 막내 조카는 지금은 과학을 제일 좋아하는 멋진 숙녀로 잘 성장했다.
큰 아이와 달리 둘째는 단순히 글자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바깥놀이만 좋아하고 놀이터만 좋아하고, 바카라을 읽으려 하면 그냥 덮고 그걸로 오히려 탑을 쌓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조금 느리다고만 생각했다.
언니와 내 아이, 둘의 공통분모를 생각하고 거슬러 올라가 보니 우리 외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께선 탄광에서 목공 일을 하셔서 손가락을 두 개나 잃으셨는데 예쁜 돌과 나무를 기가 막히게 잘 보시고 잘 찾아서 멋진 작품으로 만드셨다. 지금도 우리 외할머니 댁 한편에는 할아버지의 작품들로 가득하다. 돌고래 모양의 돌, 독수리 모양의 돌, 원앙, 집, 식탁이나 가구까지 하나하나 작품에 이름을 붙여서 나무를 깎아서 작품을 만드셨다.
언젠가 삼촌들과 엄마가 함께 '아버지 차 사드리자', 이야기를 하면서 할아버지께서 글씨를 모르셔서 운전면허를 따려면 필기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것부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어릴 적인데 나는 할아버지가 글자를 모른다는 그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할아버지 앞에서 일부러 글씨를 더 예쁘게 써서 보여드린 기억도 난다. 할아버지는 더 써보라고 하시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칭찬해 주시고 웃으셨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늘 웃는 얼굴이었던 우리 할아버지 생각을 참 오랜만에도 한 것 같다.
내 아이 때문에 할아버지한테까지 연결된 그 시간이 싫거나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래, 맞아, 우리 할아버지도 우리 막내조카도 모두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글자 하나를 '못'읽는다는 게 답답하고 살면서 힘든 일은 될 수 있지만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묘한 확신이 됐던 걸까.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다. 돌아가시면서까지 나에게 아들을 세 명 낳을 거라고 하셨던 우리 할아버지. 막내조카 역시 내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나를 꽉 안아주고 도닥여줬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 포옹에 눈물이 펑펑 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더 정이 넘치는 좋은 사람들, 내 가족들.
그리고 우리 아이 선율이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글자도 못 읽는데 어떻게 이렇게 썼을까 궁금해서 아이 학교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물어보니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글자를 가르쳐 달라고 종이를 들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종알종알 말하는데 그 말이 너무 창의적이고 귀여워서 깜짝 놀랐다고.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도 있구나, 웃었다고 했다.
실제로 다른 건 무서워하지 않고 겁도 없는데 유일하게 무서워하는데 곤충, 그중에서도 '거미'를 제일 무서워한 우리 둘째는 바카라 읽기가 거미만큼 무서웠던 거구나. 그런데 이젠 아니고.
도서관에 매일 가서 바카라을 한 권씩 빌려오는 아이, 그것도 길고 두꺼운 걸로 재밌어 보이는 걸로 빌려와서 나에게 읽어 달라고 한다. 하루도 안 빠지고 독서록을 써서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서 물어보니 선생님께 매일 들고 가서 말하고 선생님의 글자 그대로를 베꼈다고 했다.
어머님, 선율이는 하나도 창피해하지 않고
먼저 바카라을 가져와서 쓰는 것 좀 도와달라고 말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수업 태도도 좋고 수학이나 다른 과목도 열심히 잘하고
그냥 글자 읽는데 헷갈리고 좀 느릴 뿐이에요.
좋은 선생님들, 사서 선생님, 이웃들, 아소비 선생님을 만났구나. (이제 아이의 새로운 난독증을 함께 가르쳐 주실 선생님까지) 그래서 걱정이 안 됐나 보다. 엄마로서 고민이 아예 없을 순 없지만 언젠가 너와 함께 읽어갈 바카라들을 손꼽아본다. 나에게 바카라은 언제, 어디서든 떠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여행인데 나는 이제 그 여행을 위해 네 손을 잡고 놓지 않을 생각이다.
얼마 전 읽은 '난독의 계절'이란 그림바카라에 나온 것처럼 너한테 어느 날 자연스레 간판이 하나둘 씩 보이고 그걸 다 읽게 된다면 그때 나는 기뻐서 울지도 모르겠다.
네가 읽고 쓰는 모든 게 다 소중하다.
하지만 읽고 쓰지 못해도 괜찮다.
내가 읽고 써주고 걸어줄 수 있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드는 밤이다.
*난독증으로 힘들어하는 모든 아이들, 어른들이 있다면 안아주고 싶고 응원해주고 싶다. 그리고 나와 우리 아이에게도 잠시 시간을 내서 응원해 준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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