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알고리즘은 참으로 요망하다. 내 관심사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띄워 주니 말이다.
며칠 전에 알고리즘에 뜬 영상은 해남에 사시는 할머니들이 회원인 '꽃메청춘합창단'의 공연 영상이었다. 한 예능 프로에서 80 전후 노령의 할머니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한 목소리로 부르고 계셨다. 영정 사진 앞에서 울지 말라는 노랫말의 첫 소절을 듣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곧이어 눈물샘이 폭발해 버렸다.
산전수전 다 겪어내신 삶의 끝자락에서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할머니들의 도전을 보고 있노라니 온갖 감정들이 온몸을 훑고 다녔다. 영상엔 공연을 지켜보던 관람객의 모습도 담겼는데, 하나같이 눈물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연을 보며 누군가는 연로하시거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먼저 먼 길 보낸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기도 했을 테니까.
내가 떠올린 건 70~80대의 내 모습이었다. 저 나이에 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 나이에도 꿈이 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을까.
"나 죽으면 내 영정 사진 앞에서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불러 줘."
멤버 중 몇 분이 공통적으로 먼저 남기신 유언의 말씀에 또 한 번 가슴이 저릿해졌다. 나의 죽음에 함께할 동행이 있다는 건 생의 마지막에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뒷배가 아닐까.
40대에 접어들면서 속칭, '사십춘기'를 앓았다. 10대 때의 사춘기와는 사뭇 달랐다. 직업도 있고 가정도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 나는 헛헛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늙어가도 정말 괜찮은 거야?' 내 안의 내가 지피는 군불에 자꾸 데었다. 불혹은 의심이 없어지는 나이라는데 자꾸 나를 의심하고 폄하하고 낮잡아 보는 이가 내가 될 줄 미처 몰랐다.
나를 휘두른 것은 내 마음이었으니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이도 나일 터였다. 뭐라도 해보자. 자꾸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를 멈추게 한 건 이 생각이었다. 해보고 싶었지만 생각에서만 그쳤던 것, 익숙하지 않은 것이라도 좋았다. 내게 필요한 건 초보가 갖는 초심일지도 모르니까.
어느새 익숙해진 것들에 둘러싸여 내가 가진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더, 더, 더 바라는 내 욕심을 건강한 욕망으로 전환시켜 줄 동기가 필요했다. 그때부터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대학원을 다니고, 해외 주재원 자녀들을 위한 재외한국학교 몇 곳에 지원서를 넣고, 국외교사교류 프로그램에 지원해 외국 교사들과 교류했다. 성인을 위한 취미 미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러닝을 하고 매주 주말엔 북한산에 올랐다(그렇게 3년 동안 북한산 다람쥐가 되었다).
배움의 열망에 시도한 것들 중 하나가 악기였다. 처음부터 오카리나였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오카리나를 처음에 만났다면 다른 악기들처럼 스쳐 갔을지도 모른다. 피아노, 플루트를 배워 보다 이 속도로 언제 노래 한 곡 연주하겠나, 싶어 2019년 겨울 방학 때 우쿨렐레 연수와 오카리나 연수를 동시에 신청해 배웠다. 결국 지금 내 곁에 남은 악기는 오카리나다(정확하게는 '한국식 오카리나'. 보통 사람들이 아는 오카리나와는 운지법과 연주 자세 등 상당히 다르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악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전문 오카리니스트 강사님의 멋진 연주를 듣고 마음을 뺏겨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이선희의 노래, '인연'을 작은 악기로 그리 애절하게 연주할 수 있다니! 한 음, 한 음에 정성을 쏟으며 호흡 소리마저 음악이 되는 연주에 홀딱 반해 버렸다. 하지만 낯선 운지법을 익히느라 힘에 부쳐 한동안 손을 놓았다. 그렇게 1년을 쉬고, 2020년 겨울 방학에 다시 악기를 잡았다.
다시 잡은 악기는 달랐다. 무언가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그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코로나 3년 동안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한 번 크게 준 마음은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만남이 제한되던 그때, 회원들은 줌 영상으로 수업을 듣고 집에서 연습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오히려 연습할 시간은 더 많았다. 마음에 드는 곡을 오카리나로 배우면 잘 연주하고 싶은 마음에 연습을 거듭해도 힘든 줄 몰랐다. 그건 몰입의 행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십춘기로 마음을 앓던 중인데 팬데믹으로 세상이 고립되어 불안과 우울이 깊어질 수 있던 시기에 오카리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내 마음을 돌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 악기가 나를 살렸대도 과장은 아니다.
그렇게 6년 가까이 오카리나와 동행 중이다. 변화 없이 안주하는 내가 싫어서,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납작해진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배운 오카리나가 결국 가장 나를 위로하며 곁을 지켜 주고 있다.
조너선 라우시는 『인생은 왜 오십부터 반등하는가』에서 중년 이후의 반등은 일시적인 기분 변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가치관이 바뀌고 만족감의 원천이 바뀐 결과이며, 나라는 존재 자체가 바뀐 결과라는 것이다. 내가 겪었던 사십춘기는 어쩌면 50 이후의 반등을 위해 도움닫기를 하느라 그리 요란하게 몸살을 앓았던 건지도 모른다. 멀리 뛰려면 그만큼 낮게 웅크려야 하는 법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그 몸살도 썩 억울하진 않다.
내가 70~80이 되어도 꽃메청춘합창단 할머니들처럼 연주하고 있을까? 올해 4월 16일, 세월호 12주기를 홀로 기리는 마음으로 가슴에 노란 리본 배지를 달고 퇴근 후에 교실에서 그 영상 속 노래,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오카리나로 연주했는데... 어쩌면 나도 할머니들처럼 "내 영정 사진 앞에서 이 노래 연주해 줘." 하는 유언을 남길지도 모르겠다. 삶의 끝을 떠올리면서 이리 설렐 수 있다니, 난 참 행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