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손글씨 쓰기 대회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일상이 된 시대다. 수업 시간에도 회의시간에도 키보드 소리가 손글씨 소리를 대신한 지 오래다. 하지만 최근 뇌과학 연구들은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는 행위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고력과 기억력, 학습 능력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신경과학자 오드리 반 데르 메르(Audrey van der Meer) 교수 연구팀은 손글씨를 쓸 때 훨씬 넓은 영역의 뇌 신경망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과 시각, 감각, 운동 기능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고 학습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키보드 입력은 동일한 반복 동작이 많아 이러한 복합적인 뇌 자극이 상대적으로 적다.
손글씨의 힘은 단순히 '예쁜 글씨'에 있지 않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과정 자체가 생각을 정리하고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빠름이 미덕인 시대일수록 손글씨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어 교실, 붓 대신 펜을 들다
올해 이 뜻깊은 경험이 현실이 되었다. 루르대학교 보훔 한국학과에서는 네 개 한국어 수업의 학생 약 50명이 교보손글씨 한국어 글쓰기 대회에 함께 참가했다.
대회의 취지는 아름다운 글씨체를 발굴하는 데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이 대회는 단순히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뽑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읽고 감동받은 한국 문학 작품 속에서 마음에 남는 한 문장을 직접 골라 손글씨로 옮겨 적었다. 어떤 학생은 힘든 시기에 위로가 되었던 구절을, 또 어떤 학생은 자신의 삶과 닮아 있다고 느낀 문장을 선택했다.
컴퓨터 자판으로 입력하면 몇 분이면 끝날 일을, 손으로 옮겨 적는 데는 훨씬 긴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림 속에서 학생들은 문장의 리듬을 느끼고,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음미하며, 한국어를 배우는 즐거움을 새롭게 발견했다.
학생들이 선택한 한국 문학
응모작을 살펴보면 독일 대학생들이 어떤 한국 문학에 공감하고, 무엇에 감동받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작가는 한강이었다.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등 여러 작품이 선택되었으며, 학생들은 "인간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그 이유를 적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배경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한강의 작품이 한국 슬롯의 역사적 경험을 넘어 인간 보편의 물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문학으로서 학생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눈길을 끌었다.
시의 인기도 높았다. 특히 윤동주의 「서시」와 「별 헤는 밤」을 선택한 학생들은 아름다운 한국어의 울림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산유화」, 이육사, 한용운, 김수영, 김준태, 황유원 등의 작품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손으로 직접 써 내려가는 대회의 특성상, 시가 가진 응축된 언어와 깊은 의미가 학생들에게 더욱 큰 매력으로 다가간 것으로 보인다.
현대소설 가운데서는 손원평의 『아몬드』,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이 여러 차례 선택되었다. 『아몬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공감의 의미를 되묻는 소설로, 또래 관계와 감정 표현에 민감한 시기의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가닿았을 것이다. 『불편한 편의점』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소박한 온기의 이야기로, 경쟁에 지친 학생들에게 작은 위안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천 개의 파랑』은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가까운 미래를 서정적으로 그린 SF로, 미래 슬롯를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세대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다. 세 작품 모두 감정, 관계, 돌봄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품고 있으며, 거대한 서사보다 자신의 삶과 맞닿은 이야기에서 문학의 의미를 찾는 학생들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모인 결과로 읽힌다.
응모작 전체를 종합하면 학생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키워드는 위로, 공감, 희망, 아름다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슬롯에 대한 이해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작품을 선택한 이유였다. "한국어를 연습하기 위해서"라고 답한 학생은 드물었다. 대신 "내 삶과 연결되는 문장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라는 답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한국 문학을 단순히 언어 학습의 도구로 접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한국 문학은 낯선 언어로 쓰인 텍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셈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문학이 보편적인 언어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응모작들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말하는 손글씨와 한국문학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학생들의 답변은 저마다 달랐지만, 그 안에는 공통된 감수성이 흐르고 있었다.
황유원의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를 선택하고 필사한 지한 (Cihan)은 철학적인 시를 선택한 이유로 "내면의 평화를 다루고 있으며,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 개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그럼에도 자신만의 내적 평온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필사 과정에서도 치한은 "글을 손으로 옮겨 쓰면서 내용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나 자신도 일종의 내면의 평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삶에는 기복이 있고, 쉽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시가 조용히 일깨워주었다고 덧붙였다.
이종욱의 『나는 또 하나의 별이 되고 싶다』의 한 구절을 필사한 레티치아 (Letizia)는 "꿈과 개인적인 목표에 대한 메시지가 매우 영감을 준다"며 작품을 선택했다. 특히 "모든 것을 당장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으며, 꿈을 마음속에 품고 인내하면서도 성실하게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달하는 이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해 동기를 부여한다"라고 밝혔다. 가장 마음에 남은 구절로는 꿈을 말로 내뱉기보다 간직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대목을 꼽았다. "사람들은 종종 목표에 대해 많은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노력하지 않는다. 이 시는 말보다 인내와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라고 했다. 필사에 대해서는 "단순히 읽는 것보다 훨씬 깊이 텍스트와 마주하게 되었으며, 한국어 글씨가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손으로 쓴다는 것은 생각을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형태로 만드는 일이며, 필체는 쓰는 사람의 개성과 성격을 반영한다. 그래서 글씨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깨달음도 나누었다.
마들렌(Madeleine)은 김준태의 『불이냐 꽃이냐』를 선택했다. 시인의 표현력이 매우 강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필사 과정에서 그는 단순히 받아쓰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단어 한 단어에 시의 의미와 울림을 담으려 했다"라고 전했다. 텍스트를 옮기는 것을 넘어, 그 안에 깃든 감각까지 함께 써내려 가고자 했던 것이다.
비키 (Wiki)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골랐다. 독자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시를 좋아한다는 그는,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눈물이 날 만큼 깊이 감동받았다고 고백했다. 이 시가 상실과 슬픔을 다루면서도, 그 무거움 속에서 사랑이 인간에게 건네는 희망을 함께 이야기한다고 했다. 필사하는 동안에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시와 더 깊이 연결되는 느낌이었으며,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자신의 감정 세계에 강하게 작용했다"라고 전했다.
릴리안 (Lilian)은 낭독회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시, 『물방개』를 선택했다. "몇 주 전 학교에서 이 시의 낭독회가 있었는데, 시인이 직접 시를 발표하는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라고 했다. 또한 "시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덩어리로 느껴졌고, 연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시를 이룬다"라고 밝혔다. 특히 자신의 한국어 실력으로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선택의 이유 중 하나였다. 필사에 대해서는 "손글씨로 시를 옮기면서 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시 속으로 완전히 몰입해야만 쓸 수 있었다"라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언어로 자신만의 손글씨가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이 무척 뿌듯하고 충만한 느낌이었다"라고 전했다.
후안젠 (Huanzhen)은 혜민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일부를 필사했다. 단순하지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이라는 점이 선택의 이유였다. "우리는 늘 시간, 성공, 꿈을 좇으며 일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지나치곤 한다. 이 메시지는 특히 대학생들에게 매우 적절하다"라고 했다. 가장 마음에 남은 부분으로는 "일상에서 우리는 돈, 가족, 여러 의무들로 인해 압박을 받으며, 그러다 보면 삶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이 텍스트는 속도를 늦추고 순간을 즐기라고 일깨워준다. 그렇게 하면 하늘의 구름, 길가의 꽃, 친구의 미소 같은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대목을 꼽았다. 필사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한국어 손글씨를 쓰는 것은 큰 도전"이라며, "깔끔하게 쓰는 것뿐 아니라 텍스트를 충분히 이해하고 전체 페이지가 균형 있어 보이도록 줄을 배치해야 한다. 개별 단어는 잘 써도 문장 전체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 때로는 꽤 답답하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글씨가 국경을 넘다
이번 교보손글씨 한국어 글쓰기 대회는 참여는 학생들에게 단순히 손글씨를 겨루는 행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 문학 속 한 부분을 손으로 천천히 써 내려가며, 그 문장들을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생들의 응모작은 한국 문학이 언어와 국경을 넘어 세계의 젊은 독자들에게도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뜻깊은 사례다. 이들은 이미 한국 문학을 읽고, 느끼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독자들이었다. 이번 대회는 그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새겨본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