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vor 03. 토마토 오이지 냉 메밀국수
30세대도 채 되지 않는 조용한 아파트에 ‘악당’이 나타났다.
나는 아직 그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친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 말에 따르면, 그는 꽤 거구에 양팔은 문신으로 뒤덮여 있고, 어딘가 힘깨나 쓸 것처럼 무섭게 생긴 사람이라고 했다. 관리 소장님이 흡연 문제 등 아파트 환경 관리 차원에서 그에게 몇 마디를 건넸더니, 그는 “여기가 소장님 땅이냐”며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걸까. 그날 이후 소장님은 그가 무섭다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주민들도 괜히 그러다 소장님이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떡하냐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다 보면 이런저런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새로 산 니트에 어느 날 성가신 보풀이 하나둘 올라오는 것처럼, 공동주택의 일상에도 사소하지만 신경 쓰이는 문제들이 생겨난다. 최근 우리 아파트의 골칫거리는 전기차 주차 문제였다. 좁은 대지 탓에 지상에 주차할 수 있는 자리는 고작 두 대뿐이고, 나머지 차량들은 모두 기계식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그런데 전기차는 배터리 폭발 사고 이후로 기계식 주차장에 넣기 어려운, 어쩐지 조심스러운 ‘금쪽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주민들은 가급적 전기차를 위해 지상 주차 공간을 비워두려 애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검은 제네시스 G80 한 대가 거머리처럼 외부 주차 공간에 떡하니 붙어 있기 시작했다. 그 차는 좀처럼 자리를 비키지 않았고, 소장님의 애간장은 날이 갈수록 타들어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아파트의 사소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아파트에 몇 대 되지 않는 전기차 중 한 대가 내 차이고, 그 검은 제네시스의 차주가 문제의 ‘아파트 악당’이라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얼마 전, 평온한 토요일 아침에 일어났다.
토요일은 원래 쉬는 날이지만, 그 주 토요일은 밀린 일들 때문에 주말 출근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면 꼭 어떻게든 꼬이게 된다고, 하필 전날 밤에는 기계식 주차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대한 덩치의 상가 쪽 차량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차를 기계식 주차장에 넣어둔 상태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의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검은 제네시스가 기계식 주차장 안에 차를 세워둔 채, 입고를 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말 칠칠맞은 사람이군, 하고 속으로 혀를 차며 재빠르게 머릿속으로 로직을 세웠다. 대신 저 차를 입고시켜 주고, 내 차를 출고시키면 되겠지. 나는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토요일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최대한 기분 좋게, 내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그 차는 단순히 실수로 입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주차 위치 오류로 인해 아예 입고가 되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즉, 차주가 다시 와서 차를 제대로 주차하거나 빼기 전까지 나는 내 차를 출고시킬 수 없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재빨리 차 앞 유리에서 그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웬 이상한 전단지 가운데의 빈틈에, 필기체로 흘겨 쓴 휴대폰 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무엇을 기대했던가.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바로 문자를 보냈지만, 역시나 보지 못한 것인지 답장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터덜터덜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시내버스를 타고 회사에 출근했다.
버스에 앉아 있는 동안, 이 악당에게 어떻게 쓴소리를 해야 할지 온갖 복수(?)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웹툰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대체 이런 세상에서 나는 왜 이렇게 왜소한 체구로 태어난 걸까. 차라리 내가 마동석처럼 태어났어야 했다. 그래야 “이렇게 거지같이 주차를 하면 어떡합니까?” 하고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악당이 나를 비웃으며 해코지하려 들면, 힘센 여자 도봉순처럼 그를 바닥에 패대기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현실의 나는 그저 버스에 앉아, 머릿속으로만 온갖 만화를 그려대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 차가 내가 퇴근하고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차고 안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다. 후문으로 들으니 나뿐만 아니라 여러 주민들이 차를 입출고하지 못해 관리소 소장님과 기계식 주차 관리인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와 연락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그와 마주친 소장님이 단단히 쓴소리를 장전한 채 입을 열려는 순간, 그는 먼저 자신이 잘못 주차한 걸 알고 있다며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끝내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했다. 차를 다시 주차해 달라는 나의 간곡한 문자에는 그 흔한 “죄송합니다” 한마디도 돌아오지 않았다. 분풀이도 못 했고, 사과도 받지 못했다. 토요일 아침 내내 혼자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마음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중에 붕 떠버렸다.
돌이켜보니 일면식도 없는 사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났던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온실 같은 회사에서 화초 같은 사람들만 만나며 살아온 탓에, 세상에 넘쳐나는 안하무인들과 가지각색의 인류들에 대한 면역력을 조금 잃어버린 모양이다. 악당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조용한 아파트에, 검은 제네시스 한 대를 몰고 나타났다.
더워지는 계절에는 입맛을 깨우는 차갑고 산뜻한 음식이 필요하고, 괜히 마음이 뜨거워진 날에는 더더욱 그런 한 그릇이 필요하다. 토마토의 상큼함과 오이지의 짭조름한 아삭함, 차가운 메밀국수의 가벼움으로 마음의 온도도 조금 낮춰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