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날아가는 여행
미국 가는 비행시간은 13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듄'을 처음으로 봤다. 듄에서는 사람들이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에 간다. 행성마다 지도자가 다르고 그 행성만의 특징이 있다.
장거리 비행도
바로 그런 여행이 아닐까 싶다.
장거리 비행기를 처음 탔던 건 20대 중반, 유럽 여행을 한 달간 갔을 때였다. 그때는 내 몸 하나만 간수하면 됐지만 이번에는 6살 아이의 컨디션까지 바카라임을 져야 하니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한 것은, 힘든 비행시간을 버티고 나면 내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기후, 문화, 언어. 심지어는 생긴 것도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의 슬롯 속에 낯선 내가 이방인이 되어 들어갔을 때 그 느낌을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전 세계가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모습을 보면 새롭기만 하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가 지구 반대편에 도착하는 것. 비록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아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쩌면 비행기를 타는 것은 시간 여행이기도 하다.
실제로 시차가 발생가하기도 하고, 그 나라의 문명이 발달한 시간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미래슬롯를 살고 다른 누군가는 좀 더 전통적인 슬롯를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면 타임머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반대 편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면 될 것이다.
놀라웠던 것은 다른 나라에 가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슬롯에 소속되어 있으면 그 슬롯의 규칙이나 문화가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얼마나 특이한지 알아챌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와서 놀랐던 건, 한국의 주거문화로 자리 잡은 고층 아파트들이다. 제주도에 살면서 서울에 갔을 때마다 놀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스턴이라는 대도시에서도 주변에 나가면 바로 2~3층의 전원주택가가 펼쳐지는 걸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는 정말 인구밀도가 높게 살아가는구나.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인천이나 경기도 외곽까지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울 지경이다.
만약 평생을 기껏해야 5층 아파트만 보면서 살아온 사람이 한국에 도착한다면 30층은 물론이고 때로는 50층 이상이 되기도 하는 아파트들을 보고 놀랄 것 같다.
또 다른 점은 한국의 물가가 아직까지는 싸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갈아서 물가를 낮추는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력에 제값을 매기면 당연히 서비스를 받는 입장에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할 텐데, 한국은 뭐든 싸게 싸게 빨리빨리 내놓다 보니 상대적으로 노동력을 평가 절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뭐 그래서 아직까지는 물가도 저렴한 편이다.
영화 듄에서 아라카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방인인 주인공 '폴'처럼, 내가 완전히 다른 슬롯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언어도 자유롭고 나름의 쌓아온 경력도 있지만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나의 가치를 유지하게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된다. 마음만 먹으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지금 이 슬롯에 살고 있는 게 감사하다가도, 진정한 거주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할 만한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아이랑 함께 하기에는 근거리 여행이 훨씬 편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장거리 여행은 분명 그 여행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멀리 이 세상이 아닌 어딘가를 경험해 보는 것은 시공간을 바꾸는 일. 어쩌면 이곳과는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새로운 우주,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일 일지도 모른다.
나중에 정말 듄처럼 우주선을 타고 행성들 사이를 여행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의 비행기 여행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우주까지 날아가지 않더라도 새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여행이었다.
* 사진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