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맞이할 새해가 그리 많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by지후트리
순간.jpg수어그림 에세이바카라 < 손소리와 산바카라할래양 ? > 삽화 그림 / ' 순간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벌써 6월의 끝자락이다. 참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쳤다.

일련의 사기꾼 사건을 겪으며 한 가지 굳은 다짐을 했다. 열정을 빙자해 기망을 떠는 인간들과는 다시는 협업하지 않겠다고. 이제 남 좋은 일은 그만두고, 온전히 내 것을 하겠다는 선언이다. 은연중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유행에 휩쓸려 나만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세인(대중) 속으로의 퇴락'이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랬다. 작업이 늘어날수록 헤이터들도 늘어났고, 그것을 의연하게 무시하고 앞으로 밀고 나갈 배포가 내겐 부족했다.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강박 또한 당장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만드는 거대한 벽이었다. 결국 나는 숨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깊은 동굴이라는 무인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세상과 벽을 쌓았다. 공격받지 않는다는 안도감은 제대로 챙겼지만, 정작 내가 가장 애정하던 작업물들과 소외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가 숨어 지내는 동안 세상은 크리에이터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하루아침에 주목받는 이들이 넘쳐났다. 제3자의 시선으로 그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해왔던 옛날 방식으로 다시 작업해도 주목받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꼭 주목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원초적인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여 있는 듯한 그 동굴 속에서도 내 안의 존재 의지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짜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을 말한다. 지금 당장은 건강해서 체감하지 못하지만, 100세 인생을 놓고 봐도 내가 엄마와 함께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횟수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그녀와 더 좋은 기억과 추억을 새기고 싶다는 실존적인 간절함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이제 작품 생산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맹목적으로 쫓는 건 내 체질도 아니고 쉽게 지칠 뿐이다. 애당초 나는 내 쪼대로, 내 흐름대로 작업하며 재밌는 것들을 모아 왔던 사람이 아니던가. 다만 그 흐름의 시곗바늘을 너무 오래 멈춰 두어, 다시 태엽을 감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내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 나를 던져볼 때다.

최근 세계적으로 한국의 전통문화에 열광하는 흐름 속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나다운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일었다. 올해 초 콘서트에서 전 세계 아미들이 BTS 버전의 아리랑을 떼창 하는 모습을 보며 내면 깊은 곳에서 영롱한 경외감이 차올랐던 기억이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 길로 아리랑을 수어 퍼포먼스로 창작해 비디오를 올렸고, 제법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사실 그전에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기획했던 ‘나무아미타불’ 수어 영상은 아이폰의 화질 저하 문제 때문에 하마터면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해결하려다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 조금 어둡더라도 그냥 올려버렸다. 완벽주의를 내려놓은 그 작은 실행이 막혔던 물꼬를 텄다. 이후 글로벌 플랫폼에서 크리에이터 제안을 받으며 나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연이어 올린 아리랑 영상이 터진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행동은 죽고, 다시 동굴의 늪으로 빠지기 쉽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당분간은 숨 쉬듯 당연한 일상의 루틴으로 여기고, 그저 ‘실행 버튼’을 누르기로 했다.

벌써 하고 싶은 콘텐츠가 머릿속에 가득하다. 의상과 영상미, 배경 설정을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다. 조만간 동네 친한 친구들을 살살 꼬셔서 영상을 찍으러 나갈 생각이다. 고독한 무인도를 탈출해 다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지금, 다시 일기를 쓰며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니 참 반갑고 고맙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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