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S 증후군이 찾아온 듯했다.
간신히 눈을 떴지만 몸은 좀처럼 침대에서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호르몬의 노예가 되는 시기에는 몸보다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더 어렵다.
그렇다고 소중한 하루를 이렇게 싱겁게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씻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수영을 시작한 이후로 선크림만 바르고 모자를 눌러쓴 채 외출하는 일이 제법 익숙해졌다. 맨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어색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얼굴에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좋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커피 쿠폰으로 텀블러에 커피를 담았다. 별다른 목적지 없이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바깥을 걷는 일에는 묘한 효능이 있다.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 누군가는 출근을 하고,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는 어딘가로 부지런히 향한다. 각자의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나의 멈춰 있던 시간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인의 일상에서 삶의 활력을 얻는 사람. 적어도 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걷다 보니 몸에 에너지가 차올랐다. 서울로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던 길,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잠시 앉을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메모장을 켜고 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가씨, 시간 있어요?”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네? 왜 그러시죠?”
“아, 시간 있으면… 나 문자 보내는 것 좀 도와줄 수 있어요?”
할머니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접힌 종이 한 장을 수줍게 꺼내 펼쳐 보이셨다.
가지런한 글씨로 적힌 주소였다. 동창회장님께 보내야 할 주소라고 하셨다.
처음 말을 거셨을 때는 어른과 대화하는 예의를 갖추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문자 보내는 일을 도와드리려니 다시 앉아야 했다. 할머니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내가 주소를 불러줄까요?”
할머니는 내가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주소를 또박또박 읊어주셨다. 나는 받아 적었다.
할머니가 불러주시고 내가 입력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 한 팀이 되었다.
작은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공동 작업이 이루어졌다.
“문자는 다 완성했는데, 제가 잘 적었는지 한번 읽어볼 테니 맞는지 들어봐 주세요.”
“경기도…”
“맞아요. 그렇게 보내주세요. 아구,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도움드릴 수 있어 다행이네요!”
할머니는 다시 주머니를 뒤적이셨다.
“잠시만요. 이거 먹어요.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할머니의 손에서 귤이 나왔다.
“우와! 저 귤 너무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나를 한번 바라보시더니 물으셨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저 한국 사람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웃음이 났다.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 문자를 부탁하는 일이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주머니 속에 주소가 적힌 종이를 넣고 다니시다가 마침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셨을지도 모른다.
그 종이를 펼쳐 보이던 수줍은 손짓이 자꾸 생각났다.
문자 한 통을 보내드린 일이 전부인데 할머니는 내게 귤을 건네셨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고마운 일이 된다.
내가 건넨 것은 잠깐의 시간이었고, 할머니가 건넨 것은 귤과 마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침의 무기력함은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예상하지 못한 다정함을 만났다.
내가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상 속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두 사람이 잠시 시간을 나누고, 주소를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고, 귤을 주고받았다.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호르몬에 휘둘리는 날에도 세상은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잠깐 걸어 들어갔다가 작은 온기를 얻어 돌아왔다.
오늘은 인류애를 조금 충전했다. 귤도 생겼다.
글 지후트리 ghootree
그림 지후트리 ghootr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