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 리뷰
고향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인지를 말하려면 통상적으로 쓰이는 단어의 정의를 말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쭉 살았던 곳이나 현재는 살지 않는 곳. 과거와 달리 출생지에 국한하는 것이 아닌 쭉 성장했거나, 혹은 정서적 애착이 강하다던가, 현대슬롯에서 그 기준은 꽤 모호하다. 그게 어떤 이유가 됐든 대다수가 고향에선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하는 강박이 사라져 심신의 평안과 안온함을 느낀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고향은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는 포근함을 준다.
근데 단순히 내가 편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회가 와도 거절하고, 고향에서 조금 더 편하고, 익숙한 것만 찾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에게 과연 밝은 핑크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어렵다. 쉽지 않을 것이다.
가령 취업을 예로 들어보자. 서울이 고향인 누군가가 있다. 용인에서, 이천에서, 광주에서, 울산에서, 부산에서 혹은 전국 어디서든 연봉 5천만 원주는 온라인 게임에서 러브콜이 왔다. 너무 마음에 드는 제안이지만 본인은 서울을 떠나는 것이 두렵고 싫어 대차게 거절한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다음 타자에게 그대로 넘어간다. 그는 연봉을 조금 낮춰서라도 어떻게든 서울에 남아있으려 하지만 경쟁은 박터지고(내가 좋아 보이면 남에게도 좋다) 일 년, 이년 취업은 미뤄지고 그렇게 장기취준생이 된다. 내가 편한 환경, 내게 익숙한 환경, 그러나 발전은 없는. 필요악도 아닌 그냥 치명적인 독이다.
그 인사이트로 오디세이는 시작한다. 가족의 사랑, 복수와 환멸, 전쟁 출격과 귀환, 오디세우스라는 신화적 인물에서 인생 전체의 여정이 세 시간의 러닝타임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트로이 목마에 병사를 태워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끈 오디세우스는 사실 전쟁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와 달리 고향인 이타카를 떠나 본인이 전쟁에 가면 이겨도 본전이고(아무것도 주어질 것이 없다는 걸 알거든) 운이 안 좋으면 죽을 수도 있다. 즉, 본인에게 얻을 게 없다. 신화적 인물로 미화됐지만 사실 오디세우스도 잴 거 다 재는 간사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미친 척을 한다. 소와 당나귀를 함께 매고 밭을 갈고, 씨앗대신 소금을 뿌린다. 하지만 팔라메데스는 이를 눈치챈다. 그래서 계략을 짜본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쟁기 앞에 슬쩍 놓아둔다. 진짜 그가 미쳤다면 본인의 아기를 밟아버리고 지나가 아들을 죽였겠지. 누구나 예상했듯, 오디세우스는 그 앞에서 멈춰 선다. 그렇게 미친 척이 들켜서 결국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떠나는 거다. 그 덕분에 그가 가까이 갈 수 없던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에 대중은 그 배경에 거리감을 좁힌다.
이 영화는 떠남(도전)- 시련과 역경- 귀환이라는 전형적이고 규칙적인 서사를 따른다. 안전한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밖에서 온갖 시련과 역경을 딛고 다시 나만의 장소로 돌아오는 한 사람의 일상처럼. 마치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탯줄을 끊고 태어나, 시간이 지나 자라고 배우고 적응하면서 성인이 되고, 늙고 병들고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서사처럼. 여기서 대중과의 거리감은 더 좁혀져 간다. 오히려 재해석한 이 신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이 영화만의 다른 포인트가 있다. 대개 큰 성공을 앞둔 이들은 성공을 하기 전 도전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다루나, 오디세이는 성공(전쟁에서의 승리) 뒤 귀환하는 장면이 영화 분량을 채운다. 오디세이가 괴물의 눈을 공격해 포세이돈이 화가 나 바다에서 훼방을 놓는 배경은 결과만을 쫒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시련을 이기고 더 멋있게 정상에서 내려올 수 있는지, 어떤 깨달음을 얻으며 귀환할 수 있는지(삶의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듯하다.
특히 귀향 장면에서 오디세이에게 칼립소는 이런 말을 한다.
믿음을 가지고 너를 바다에 던져라
새로운 길로 가고자 했던 모험은 자초됐지만 오디세이는 끝내 안주하던 현실이라는 달콤함을 깨트리고 굉장히 위험한 도전에 마주한다. 그리고 끝내 10년간의 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영웅이 된다.
한 번의 실패도 이루지 못하고 본인이 뜻하는 바를 이룬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두 번, 세 번, 네 번 아니 실패가 그냥 ‘당연한 것’, 일상이 되어 지쳐갈 때쯤 어떤 우주의 운과 내 실력 그리고 타이밍이 묘하게 맞아떨어져 그때 한 번의 기회가 인생에서 찾아온다. 성공도 아닌 그냥 작은 기회. 근데 그 기회가 오기 전에 대다수는 포기해 버린다. 왜?
똑같은 걸 다시 하는 데에는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다. 귀찮고 하기 싫거든. 이렇게 당연한 명제를 영화는 대중들에게 한번 더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딱 한 번만 더 해보라고.
자. 그렇게 성공했다치자. 귀환에 성공한 오디세우스는 이제 뭘 해야 하는가. 결국 인간이 돌아갈 길은 어디인가. 이뤄내고 돌아갈 길을 잃으면 어쩌나. 그 성취라는 달콤함은 무한할 수 있는가.
영화가 주는 설득력은 꽤나 탄탄하고 질겨서 내가 걸어왔던 길, 잘못 갔던 길,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 나중에 돌아가야 할 길까지 고심하게 한다. 그 길의 정의를 단순히 오디세우스를 통해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 페넬로페를 봐라. 그저 남편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기만 한 왕의 아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녀가 해야만 하는 그 길을 고수하고 지켜낸다. 20년 동안 그의 공백을 메꾸고, 지조를 지키고, 그의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어떻게든 국가를 꾸려간다. 한 국가를 20년 동안 다스리는 게 얼마나 깊은 통찰과 지식, 내면의 단단함 그리고 덕을 쌓아야만 이룰 수 있었을까. 대통령도 임기가 5년인데. 그는 그만의 길을 지켰고 마침내 남편이 돌아왔을 때 원래의 그의 내면도 같이 돌아온 거다.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만 귀향 길에서 유일하게 오디세우스 혼다 귀향하는 점, 트로이 목마가 ‘선물’이라는 가면아래 치밀한 계략이었던 점,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뒤얽혀 서로의 이익만 좇는 그 당시 시대상을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낸 점은 과연 영웅적 서사뒤에 윤리적 맹점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긴다.
놀란의 세계관은 실로 거대하고 또 웅장해서 그저 배고픔과 피곤함에 인상을 찌푸리고 폭염에, 인간관계에, 육아에, 돈에 짜증 내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우리 각자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필코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멀든 가깝든 어떻든 중요치 않다.
길이 있냐 없냐. 존재의 유무 그리고 한 가지 바람.
그 길의 목적이 물질적인 걸로 더럽게 덮히진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