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일은 언제나 쓰다

글쓰기라는 작은 반항

by글밥 김선영

글쓰기는 말 그대로 ‘글자’를 ‘쓰는 일’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방장은 칼을 쓰고, 드러머는 스틱을 쓰며, 골프 선수는 골프채를 쓴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궁색한 사람은 없는 대로 돈을 쓴다. 이처럼 어떤 물건을 사용할 때 우리는 흔히 쓴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글을 ‘사용’한다는 뜻인가. 맞지만 납작한 해석이다.


글을, 정확히는 글자를 눈앞에 꺼내놓아야 글이 탄생한다. 꺼내놓는다는 것은 원래는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있었다는 이야기다. 글이 꼭꼭 숨어있던 장소는 글을 탄생시키는 존재 내부이다.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건 존재를 소모하는 일이다. 지우개도 쓰면 닳고, 물도 물 쓰듯이 쓰면 결국 바닥을 드러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무너뜨리는 일이니 ‘쓸(bitter)’ 수밖에 없다. 나의 일부를 벼려야 하는데 마냥 달콤할 수는 없는 것이다. 푸른곰팡이가 핀 기억을 기어이 길어 올리고, 두 눈을 감은 채 어디에 붙었는지 모를 끈적한 단어 더듬어 낚아채 몸 밖으로 꺼내는 일이다. 이마가 지끈거린다. 신경질적으로 백스페이스키를 누르며 성질을 참지 못하고 종이를 구겨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것을.


쓴 약을 삼키려면 써야(Put on) 한다. 모자를 눌러쓰듯 작가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로 가면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을 상연할 때 배우들이 가면을 착용했듯, 내가 본래 평범한 회사원이더라도, 육아에 전념하는 전업주부더라도, 잘 나가는 CEO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잠시 망각하고 작가 가면을 써야 한다. 중요한 자리에는 잘 차려입고 가야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글 쓰는 사람으로 갈아입는 일은 일종의 의식이다. 평소보다 사뭇 진지해지겠다는 다짐, 내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겠다는 결단과 집요함의 선언이다. 그것이 눈부신 보석일지 발부리에 걸리적거리는 하찮은 돌멩이일지는 꺼내 봐야 안다. 실은 십중팔구 돌멩이다. 그것도 아주 울퉁불퉁 보기 흉한. 못난 돌을 조탁하고 연마해서 봐줄 만하게 만드는 일이 글쓰기다. 글이 완성되고 나면 비로소 작가 페르소나를 벗어 바카라상 서랍에 넣어둔다. 그 순간, 쓴 약을 삼킨 기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러니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글쓰기에는 상상적 독자가 필요하다. 나만의 독백이 아니라, 내가 쓴 글을 읽을 이름 모를 이를 떠올리고 쓰기에 임한다. 나의 독자는 마음이 언제나 활짝 열려 있어 너그럽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직업으로 치자면 상담사와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해력은 부족한 편이라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야 알아듣는다. 또 언제나 나와 초면이기 때문에 꼭 알아야 할 정보를 생략하지 않는다. 그(혹은 그녀)는 논리적인 사람이라 비약을 아주 싫어한다. 나는 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기에 쓴 글을 몇 번이고 톺아본다. 이 정도면 그래도 환한 얼굴로 읽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조심스레 내놓는다. 내가 쓴맛의 고통을 참고 게워낸 글은 잘 구워진 에그타르트처럼 노릇노릇하고 달달해 먹기 좋다. 정성이 담긴 에그타르트를 최고급 디저트 접시 위에 올려 대접한다. 맛있게 먹는 얼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결국 글쓰기는 먹이는 일이다. 나를 써서 타인을 먹이는 일. 정확하게 우리가 연결됐을 때의 기쁨을 상상하며. 그것이 아주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말이다.


카뮈는 하염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가면을 쓰고 쓴맛을 참아가며 나를 소모하는 일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반항처럼도 느껴진다. 그 반항이 매일같이 굴러 떨어지는 내 인생에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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