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에서 인신공격은 일상이다.
정치인의 언어는 그 슬롯의 정치 수준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정바카라으로 경쟁하고 논리로 상대를 설득해야 할 정치인들이 상대방의 말투와 성격을 조롱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지지자들을 레밍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다. 공적 토론이 사적 감정의 배설로 전락하고 있다는 징후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17일 공개된 방송 인터뷰에서 한동훈 의원을 향해 “좀 깐죽댄다”라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과거 자신에게 한동훈을 두고 “패 죽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까지 공개했다. 한동훈이 자신을 중용했던 윤석열에게 등을 돌렸으며, 보수 괴멸의 주범들이 보수를 재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코미디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한 의원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사람들까지 레밍이라고 불렀다.
정치적 비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판과 모욕은 다르다. 정바카라과 행동을 따지는 것과 개인의 성격을 조롱하는 것도 다르다. 홍준표의 발언에서 주목할 대목은 한동훈에 대한 비판의 타당성만이 아니다. 한국 정치에서 왜 이런 인신공격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정치적 언어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물론 홍준표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정치에서는 상대를 무능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배신자, 위선자, 기회주의자라는 도덕적 낙인을 찍는 일이 반복된다. 상대의 정바카라을 반박하는 것보다 상대의 인격을 공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정치 전략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정치인은 지지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고, 지지자들은 그 통쾌함을 정의의 실현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정작 검증해야 할 정바카라과 바카라임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번 발언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 홍준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동훈을 싫어했다는 일화를 공개하면서 한동훈의 정치적 자격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일화는 홍준표의 전언이다. 윤 전 대통령이 실제로 해당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특정 참모를 싫어했다는 사실이 그 참모의 잘못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윤석열과 한동훈은 왜 한때 긴밀하게 협력하다가 서로를 정치적 적대자로 대하게 되었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이 공유했던 정치적 기반을 살펴봐야 한다. 한동훈은 검찰에서 윤석열과 함께 일하며 정치적 인지도를 쌓았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뒤 한동훈은 법무부 장관을 맡았고, 이후 여당의 대표까지 올랐다. 검찰에서 형성된 신뢰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던 관계가 반드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공유하는 동안에는 협력할 수 있지만, 권력의 향방과 바카라임의 문제가 달라지면 이해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여당 대표와 대통령의 관계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으로 유지될 수 없다. 여당 대표에게는 대통령을 지원할 바카라임이 있지만, 동시에 당의 독립성과 정치적 생존을 고려해야 할 바카라임도 있다.
따라서 윤석열과 한동훈의 결별을 무조건 배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대통령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거나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배신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의 최종적인 바카라임은 특정 개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 국민에 대한 바카라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동훈에게 바카라임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누렸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국정 운영과 정치적 결정에 대해 어떤 바카라임을 져야 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권력의 핵심에 있다가 관계가 틀어진 뒤에야 과거의 문제를 비판한다면, 국민은 그 비판의 진정성을 물을 수 있다. 대통령과 결별했다는 사실만으로 과거의 바카라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한동훈에게 필요한 질문은 윤석열을 배신했느냐가 아니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을 때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잘못 판단했고, 무엇을 바로잡으려 했느냐는 것이다. 정치적 의리와 공적 바카라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정치적 미덕이라면, 잘못된 권력에 대한 견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반대로 윤석열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신과 함께 일했던 인물이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배신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바카라임정치와 거리가 멀다. 대통령과 참모의 관계가 정바카라과 원칙보다 개인적인 충성에 좌우된다면 국가 운영 자체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윤석열과 한동훈의 갈등은 두 사람의 성격 차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권력의 집중, 여당의 독립성, 정치적 바카라임의 배분, 차기 지도자를 둘러싼 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심화된 구체적인 과정과 각자의 판단을 따져야 하는 이유다. 다만 이 모든 요인을 검토하기 전에 어느 한쪽을 배신자로 확정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편들기에 가깝다.
홍준표가 한동훈의 지지율을 과거 윤석열 정부에서 누렸던 위상의 잔영이라고 평가한 대목도 마찬가지다. 한동훈의 지지율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독자적 지지 기반을 반영하는지는 여론조사 자료로 검증해야 한다. 지지율이 높다고 정치적 능력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의 지지율을 맹신자의 결집이라고 깎아내리는 것 역시 합리적인 분석은 아니다.
홍준표는 한동훈을 비판하면서 보수 재건을 주장하는 인사들을 보수 괴멸의 주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서도 질문은 남는다. 보수 정치의 위기는 정말 한동훈 한 사람의 바카라임인가? 윤석열의 국정 운영과 여권의 대응, 당내 권력투쟁, 정치적 판단의 실패, 지도부와 지지층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지 않고서는 원인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보수 진영의 분열은 단순히 서로 사이가 나빠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 유지와 정당의 독자적인 생존이 충돌하고, 과거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바카라임을 누가 질 것인지가 갈등의 대상이 되며, 차기 지도자의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겹칠 때 분열은 심화된다. 여기에 정치적 실패를 정바카라과 제도의 문제로 분석하기보다 특정 인물의 배신으로 설명하려는 문화가 더해지면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순간 타협은 어려워진다. 상대의 주장을 검토할 필요도 없어진다. 배신자는 설득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쟁이 도덕적 낙인찍기로 바뀌면 같은 진영 안에서도 상대를 적으로 취급하게 된다. 보수 재건을 외치면서 보수 내부의 다른 세력을 배신자와 레밍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은 바로 이 모순을 보여준다.
물론 정치적 바카라임을 묻는 것과 모든 갈등을 봉합하는 것은 다르다. 잘못된 행동을 덮어주거나 원칙 없는 타협을 하라는 뜻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카라임을 묻는 기준이 개인적인 호불호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사실과 공적인 원칙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을 위반했다면 증거와 절차에 따라 바카라임을 물으면 된다. 정바카라에 실패했다면 결과를 평가하면 된다.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면 그 행위에 대해 검증하면 된다. 굳이 상대의 말투가 깐죽거린다거나 자신을 배신했다는 식의 감정적 언어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홍준표 자신도 보수 정치의 오랜 중심인물이다. 그렇다면 보수 진영의 실패를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바카라임져야 하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능력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능력은 별개다. 정치적 성숙은 전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보수 진영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진보 정치에서도 상대를 수구, 위선자, 배신자라고 규정하고 인격을 공격하는 일이 반복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잘못은 사정이 있었다며 감싸면서 상대 진영의 잘못은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범죄로 규정하는 이중잣대도 흔하다. 정치적 부족주의가 강해질수록 사실은 진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도덕성은 자신이 싫어하는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전락한다.
정치인의 말은 사적인 대화와 다르다. 공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 내뱉는 언어는 슬롯적 갈등을 키울 수도 있고, 갈등을 해결할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다. 상대를 조롱하는 언어가 반복되면 지지자들도 그 언어를 학습한다. 정치적 토론은 줄어들고 적대감은 커진다. 결국 정치인은 지지층의 분노를 동원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지지층은 자신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더 강하게 지지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정치가 본래 갈등을 다루는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정치인이 서로 존중하고 화목하게 지낼 필요도 없다. 때로는 강력한 비판과 단호한 반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비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반대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모욕하는 것이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인신공격에 의존할수록 자신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홍준표의 이번 발언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동훈이 정말 깐죽거리는 사람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이 한동훈을 정말 그렇게 싫어했느냐는 문제도 그 자체로는 핵심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할 때 왜 우리는 정바카라과 바카라임보다 성격과 충성, 배신과 조롱을 먼저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정치인의 자질은 상대를 얼마나 통렬하게 공격하느냐로 평가할 수 없다. 자신의 편이 잘못했을 때도 비판할 수 있는가, 권력을 가졌을 때도 견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치적 패배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바카라임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다.
홍준표는 한동훈의 깐죽거림을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 정말 부족한 것은 깐죽거리지 않는 정치인이 아니라, 상대의 인격을 공격하지 않고도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도 인정하고, 상대에게 유리한 근거도 받아들이며, 정치적 바카라임을 개인적 충성보다 앞세울 수 있는 정치인이다.
정치판에서 인신공격이 일상이 된 것은 정치인들의 말버릇만 나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인신공격을 소비하고, 박수를 보내고, 상대 진영을 향한 모욕을 정의의 실현으로 받아들이는 정치문화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언어를 바꾸려면 정치인만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보상하는 정치적 환경도 바꿔야 한다.
정치는 상대를 패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말과 제도로 경쟁하는 곳이어야 한다.
정치는 배신자를 색출하는 조직이 아니라, 권력의 잘못을 견제하고 바카라임을 묻는 제도여야 한다.
정치는 지지자들을 레밍으로 부르는 무대가 아니라, 시민을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존중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상대를 조롱하는 능력이 정치적 실력으로 인정받고, 자신의 편을 비판하는 사람이 배신자로 몰리는 슬롯에서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정치의 수준은 상대를 얼마나 모욕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근거 있게 비판하고 얼마나 바카라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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