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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보여준 ‘전쟁 식민지’ 국민의 비극

위험의 외주화를 위해 전쟁도 하도급하는 세상이 되었다

byFrancis Lee

전쟁에도 식민지가 있다. 외국의 지배를 받으며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빼앗기는 나라만 식민지가 아니다. 자국의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그 전쟁의 방향과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데 외부 강대국에 의존하고, 국민의 생명을 바쳐 얻은 군사적 성과가 정작 자국민보다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에 더 크게 기여한다면, 그것 역시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전쟁 식민지’의 비극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자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크라이나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와 목숨을 바치는 동안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자국의 안보적 이익을 추구한다. 우크라이나 지도부 역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싸우지만,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국가의 생존과 집권세력의 정치적 생존이 뒤섞일 위험을 안고 있다.


여기서 전쟁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 전쟁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강대국은 자국 군대가 치러야 할 위험을 다른 나라에 맡기고, 정치 지도자는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며, 군수산업은 무기 수요의 증가에 대응한다. 그 사이에서 고향과 가족과 생명을 잃는 사람들은 전쟁의 목표를 결정할 권한도, 전쟁을 끝낼 조건을 통제할 능력도 충분히 갖지 못한다.

기업이 비용과 위험을 줄이기 위해 업무를 하청업체에 넘기듯, 국제정치에서도 강대국이 직접 부담해야 할 군사적 위험을 다른 나라의 국민에게 전가하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전쟁 하도급’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는 형식적으로 독립국이지만, 무기와 자금, 정보와 군사기술을 외부에 의존할수록 전쟁의 선택지는 좁아진다. 국민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그들의 희생은 동시에 강대국의 전략적 자산이 된다.


물론 우크라이나를 미국과 유럽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규정하거나, 젤렌스키가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전쟁을 계속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러시아의 침략 바카라임과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주적 저항은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희생은 누구를 위해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전쟁의 지속에서 얻는 이익과 그 비용은 공정하게 배분되고 있는가? 그리고 전쟁을 끝낼 조건을 결정하는 권한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전쟁의 명분만 논의하면서 정작 전쟁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의 구조를 놓치게 된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단지 침략당한 나라의 비극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희생이 국가의 이름으로 동원되고, 그 희생이 자국 권력의 유지와 외국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는 세계의 비극이다.

전쟁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계속되는가


전쟁이 시작되면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국가의 생존, 자유, 주권, 안보와 같은 가치가 동원된다. 실제로 그러한 가치는 소중하다. 그러나 그 가치가 정치 지도자의 모든 판단을 무조건 정당화하는 면허증이 되는 순간, 국민은 국가를 지키는 주체에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대상으로 바뀐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계속하는 데에는 외부의 침략에 저항하고 국가의 독립을 보전하려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전쟁의 바카라임을 침략국과 침략당한 나라에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침략에 저항하는 전쟁이라고 해서 그 전쟁을 수행하는 모든 정치적 결정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국가의 생존과 현직 지도자의 정치적 생존은 점점 더 쉽게 동일시된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전쟁을 끝내는 방안에 대한 비판과 토론은 자칫 애국심이 부족한 행동으로 취급될 수 있다. 지도자는 전시의 비상권한과 국민의 결집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있고, 반대 세력은 국가의 위기라는 이유로 활동 공간이 좁아질 수 있다.


이것은 젤렌스키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어느 나라에서나 권력을 집중시키고, 지도자의 판단을 국가의 운명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지도자는 국민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희생을 언제까지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을 수 있다.


젤렌스키 정부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는 국가를 방어해야 할 바카라임이 있지만, 동시에 전쟁의 목표와 전망, 희생의 규모, 종전 가능성을 국민에게 설명할 바카라임도 있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패배를 인정하거나 타협할 경우 발생할 정치적 손실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한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지도자의 정치적 운명은 국가의 운명과 결합한다. 전쟁에서 물러서면 지도자는 무능과 패배의 바카라임을 질 수 있다. 반대로 전쟁을 지속하면 국가적 결속을 유지하고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지도자에게 전쟁을 끝내는 결정보다 계속하는 결정이 정치적으로 더 안전한 선택이 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젤렌스키가 의도적으로 전쟁을 연장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을 추측하는 데 있지 않다. 전쟁이 지도자에게 정치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을 때, 누가 그 이해관계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국민이 지켜야 할 것은 국가의 독립과 자유이지 특정 지도자의 권력이나 정치적 명예가 아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희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권력이 그 희생의 정당성을 스스로 독점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유럽은 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가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제법과 국가 주권의 원칙을 지키려는 목적이 있다. 유럽의 안보를 보호하고, 러시아가 군사력으로 국경을 변경하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이해관계도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도덕적 명분과 국가의 전략적 이익은 언제나 함께 작용한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행동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우면 러시아는 병력과 무기, 탄약을 소모한다.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면 미국과 유럽은 자국 군인을 대규모로 투입하지 않고도 잠재적 경쟁국의 군사력을 제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러시아가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여력도 줄어든다.

이러한 결과가 미국과 유럽에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서방의 지원이 오직 러시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만 이루어진다거나, 미국과 유럽이 전쟁의 장기화를 공동으로 설계했다고 단정할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지원하는 것과 러시아의 군사력을 소모시키는 것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모든 지원의 목적을 하나로 환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전략적 이익을 누가 어떤 비용으로 얻느냐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줄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직접 전투를 치르는 것은 우크라이나군이다. 러시아군 역시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감수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도시와 기반시설의 파괴, 인구 감소, 가족의 해체, 장기적인 경제적 손실을 떠안는다.


강대국은 상대국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전략적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국의 젊은이들이 대규모로 전사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비용을 자국 영토 밖에서 치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대국의 관점에서는 효율적인 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략의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국민의 관점에서도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울 이유가 있다. 동시에 미국과 유럽에는 러시아의 위협을 줄이려는 이유가 있다. 양자의 이해관계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것은 자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다. 미국과 유럽이 원하는 안보 질서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원하는 종전 조건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것은 러시아의 침략을 억제하고 우크라이나의 협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원국의 전략적 목표가 바뀌면 지원 규모와 조건도 바뀔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은 외부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항전이 서방에 전략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희생이 강대국의 전략적 계산에 종속되고, 그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과 전쟁의 종료 조건을 결정하는 권한이 외부에 집중될 때 발생한다.


‘전쟁 식민지’라는 새로운 종속


전통적인 식민지에서는 종주국이 식민지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이용했다. 식민지 주민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기 어려웠다.


오늘날의 종속은 반드시 군사적 점령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한 나라가 형식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더라도 핵심적인 정치·경제적 선택을 외부의 승인과 지원에 의존한다면 실질적인 자율성은 제한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를 ‘전쟁 식민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다만 이 표현은 우크라이나가 법적 의미에서 식민지라는 뜻이 아니다. 러시아의 침략과 점령 시도, 우크라이나 국민의 자주적 의지를 무시하고 우크라이나를 서방의 꼭두각시라고 규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개념은 전쟁의 비용과 전략적 이익, 의사결정 권한 사이의 불균형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의 무기와 재정 지원, 정보 제공을 필요로 한다. 이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수행하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그러나 의존도가 커질수록 지원국의 정치적 판단이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선택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


미국이 무기 공급을 제한하거나 정보 제공의 범위를 바꾸면 우크라이나의 전장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유럽이 재정 지원과 군수품 공급을 충분히 이어가지 못하면 우크라이나의 방어 능력도 약화된다. 결국 우크라이나가 어떤 방식으로 싸우고 어떤 조건에서 협상할 수 있는지는 자국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적 종속의 군사적 형태다.


더구나 외부의 지원은 공짜가 아니다. 지원국은 자국의 전략적 목표를 고려하고 지원의 조건과 범위를 결정한다. 지원을 받는 나라는 그 조건을 무시하기 어렵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무기와 자금에 대한 의존은 커지고, 의존이 커질수록 외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질 수 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에 선택권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지도부와 국민은 여전히 판단하고 선택한다. 다만 그 선택의 범위가 전쟁의 피해와 외부 지원에 의해 심각하게 제약된다는 것이다.


전쟁 식민지의 핵심은 누군가가 모든 결정을 직접 명령한다는 데 있지 않다.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통제하는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인다는 데 있다.

전쟁도 하도급을 주는 시대


오늘날 기업은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업무를 외부에 맡긴다. 직접 고용과 투자에 따르는 부담을 줄이고 필요할 때 외주업체를 이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익은 발주기업에 집중되는 반면, 사고의 위험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은 하청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구조를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전쟁 하도급’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강대국은 자국 군대를 직접 투입하는 대신 다른 나라가 전쟁을 수행하도록 지원할 수 있다. 무기와 자금, 정보, 군사훈련을 제공하면서 상대국의 군사적 역량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지원국은 자국 군인의 인명 손실과 국내 정치적 부담을 줄이면서 전략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우크라이나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은 현지 동맹군과 무장세력에 의존해 경쟁국과 싸우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냉전기의 대리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각 사례에서 현지 세력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행동했는지, 외부 지원국이 어느 정도 전쟁을 통제했는지는 개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단순히 외부 세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실제로 침략을 당했고, 자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분명한 이유를 갖고 있다.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지를 서방의 전략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전쟁 하도급이라는 비판은 유효하다. 자국의 방어라는 정당한 목표와 강대국의 전략적 목표가 결합하면, 강대국은 자신이 직접 부담하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 동시에 러시아의 군사력을 소모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미국과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효과를 얻는다. 양쪽의 목표가 일치하는 동안에는 이 관계가 상호 이익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크라이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르거나, 미국과 유럽이 다른 전략적 우선순위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원국은 지원 규모를 줄이거나 협상 방향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은 파괴된 도시와 잃어버린 가족, 전쟁으로 무너진 삶을 그대로 떠안는다. 발주기업은 계약을 종료할 수 있지만 하청 노동자는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국가 간 동맹을 기업과 하청업체의 계약에 그대로 비유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관계에는 상호 협력과 공동의 안보 이익도 존재한다. 그러나 위험을 직접 부담하는 주체와 그 위험에서 전략적 이익을 얻는 주체가 다르다는 구조적 유사성은 외면하기 어렵다.


전쟁 하도급의 세계에서는 전쟁의 위험마저 국경 밖으로 외주화된다. 강대국은 전략을 설계하고 자원을 배분하지만, 실제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은 다른 나라의 국민이다.


전쟁의 이익과 손실은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전쟁이 발생하면 슬롯 전체가 손실을 입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의 손실은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전선의 군인은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민간인은 폭격과 피난, 실업과 빈곤을 겪는다. 젊은 세대는 교육과 직업의 기회를 잃고, 아이들은 부모와 고향을 잃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부상과 외상, 가족의 해체, 국가 재건의 부담은 오랫동안 남는다.


반면 전쟁을 결정하거나 지원하는 정치·경제적 행위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 지도자는 국민의 결집을 통해 권력을 강화할 수도 있고, 방위산업 기업은 무기 수요 증가로 매출과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강대국은 경쟁국의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는 전략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정치 지도자가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며, 방위산업 기업의 이익이 곧 부당한 이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군수품 생산은 방어에 필수적일 수 있고, 전쟁을 지원하는 정치인 역시 국내외의 비용과 바카라임을 부담한다.


그러나 이익과 손실의 배분을 검증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구조가 될 수 있다.


전쟁을 결정하는 권력자에게는 전쟁을 계속할 정치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에는 더 많은 무기를 공급할 경제적 유인이 있을 수 있다. 강대국에는 상대국을 약화시킬 전략적 유인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이해관계가 결합하면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보다 계속해야 할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비밀리에 전쟁을 조종하고 있다고 상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각 행위자가 자신의 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을 지속시키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 지도자는 패배의 바카라임을 피하려 하고, 강대국은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려 하며, 군수산업은 수요에 대응한다. 누구도 자신을 전쟁의 지속을 원하는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 전쟁이 끝나지 않고 희생만 누적된다면, 그 구조 자체가 비판받아야 한다.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선의만이 아니다. 전쟁의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주체들이 그 이익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무한정 요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제도적 장치다.


국민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전쟁을 둘러싼 모든 논의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원칙이 있다. 국민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 존엄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다. 그런데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생명을 끝없이 소모하고, 그 희생에 대한 질문을 애국심의 문제로 돌린다면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다.


국가의 주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주권은 국민을 희생시키기 위한 추상적인 권리가 아니다. 주권의 가치는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어떤 조건으로 협상할 것인지,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것인지는 정치 지도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군사적 비밀을 보호하고 긴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더라도, 전쟁의 목표와 전망, 비용에 대한 바카라임은 민주적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의 침략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 것처럼, 그들이 전쟁의 목표와 종전 조건을 논의할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 전쟁을 계속하자는 주장만 애국적인 것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종전 방안을 검토하자는 주장 역시 정당한 정치적 요구다.


동시에 전쟁을 끝내자는 말이 곧바로 어떤 조건의 평화든 받아들이자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침략자가 점령한 영토를 무력으로 차지한 채 전쟁을 끝낸다면, 그것은 새로운 침략을 부추길 수 있다. 휴전 이후의 안전보장과 재침공 방지 대바카라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문제는 무조건 싸우느냐, 무조건 항복하느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면서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지도자가 그 판단에 바카라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전쟁을 지속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현실적인 이익은 무엇인지, 그 대가를 누가 부담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요구하는 권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바카라임이 따라야 한다.


전쟁 식민지의 비극을 끝내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침략이라는 명백한 현실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이 전쟁의 바카라임을 침략국과 침략을 당한 나라에 기계적으로 나눠서는 안 된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저항을 미국과 유럽의 전략에 종속된 행동으로만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침략에 대한 저항이 정당하다는 사실이 전쟁의 모든 결정과 장기화의 모든 결과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강대국의 지원 역시 도덕적 명분을 내세운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만이 아니다. 누가 전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가, 누가 전쟁에서 전략적 이익을 얻는가, 누가 생명과 재산을 잃는가, 그리고 전쟁을 끝낼 조건을 누가 결정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 전쟁에는 이미 심각한 정치적 불균형이 존재한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식민지라는 표현으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우크라이나 국민이 스스로 싸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자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우면서도 전쟁에 필요한 자원과 국제적 지원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그 의존이 강대국의 전략적 계산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크라이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강대국이 직접 감당해야 할 군사적 위험을 다른 나라에 전가하고, 그 나라의 국민이 치르는 희생을 자국의 안보 이익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전쟁은 점점 더 정교한 형태의 외주산업이 될 수 있다.


정치 지도자는 국가를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강대국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지원한다고 말한다. 군수산업은 방어에 필요한 무기를 공급한다고 말한다. 각각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명분을 합쳐도 죽어가는 군인과 폭격당하는 민간인의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다.


전쟁의 명분이 아무리 숭고해도 그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들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국가의 주권도, 지도자의 정치적 명예도, 강대국의 전략적 우위도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무한정 희생시킬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전쟁에서 죽는 사람은 따로 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폐허를 재건해야 하는 사람은 또 따로 있다면, 우리는 그 전쟁의 정의로움만이 아니라 그 전쟁의 권력 구조부터 물어야 한다.

전쟁 식민지의 진정한 비극은 국민이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이 흘린 피가 자국 권력자의 생존과 외국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으로 전환되는데도, 정작 그 국민은 전쟁의 목적과 종료 조건을 결정할 충분한 권한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위험을 외주화하고 희생을 하도급하는 세계에서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거대한 계약의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전쟁 그 자체만이 아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과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분리되고, 그 불균형을 국가와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정치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전쟁도 궁극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그 목적을 잃은 전쟁은 아무리 숭고한 명분을 내세워도 국민을 위한 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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