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만 살아남는 슬롯는 결코 건강한 슬롯가 아니다
신라의 골품제는 태어난 신분이 인간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제도였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도 골품의 한계를 넘기 어려웠다. 개인의 재능보다 출생이 중요했고, 능력보다 신분이 앞섰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골품제를 시행하지 않는다.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고, 시험과 경쟁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있다.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골품제의 유령에서 벗어났는가. 신분 대신 학벌이, 혈통 대신 부모의 경제력이, 태어난 계급 대신 대학과 직업의 서열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슬롯가 된 것은 아닌가. 필자는 오늘날 한국 슬롯의 이러한 모순을 ‘능력골품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도 그 능력을 기존 질서의 모순을 극복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그 질서 안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사용하도록 만드는 슬롯다.
물론 신라의 골품제와 현대의 능력주의는 역사적으로 동일한 제도가 아니다. 골품제는 출생에 따른 세습적 신분제였고, 현대의 능력주의는 시험과 성취를 통해 슬롯적 지위를 배분한다는 원리를 표방한다. 그러나 능력을 증명한 결과가 다시 세습적 특권에 가까운 지위로 굳어지고, 그 지위가 다음 세대의 기회까지 좌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서열을 만드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다. 능력을 인간의 가치를 판정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만드는 슬롯가 문제다.
한국 슬롯에서 능력은 언제부터인가 특정한 시험의 성적, 특정한 대학의 졸업장, 특정한 기업의 명함으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가, 얼마나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가,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기여하는가보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디에 취업했으며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가가 더 강력한 평가 기준이 된다. 능력은 본래 무엇인가를 잘하기 위한 자질이지만, 한국 슬롯에서는 그 능력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인간의 서열을 결정하는 신분증처럼 작동한다.
서울의 명문대에 들어간 학생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지방대에 진학한 학생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는다. 대기업에 입사하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중소기업에 취업하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을 의심받는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지방이라는 구분에 따라 노동의 가치와 사람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 능력 평가인가. 특정 대학의 졸업장이 그 사람의 모든 능력을 증명하는가.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사실이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인간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직업의 차이가 존엄의 차이로 바뀌는 순간, 능력주의는 정의의 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신분제의 언어가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경쟁이 개인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자녀가 뒤처질까 두려워 사교육에 투자한다.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보다 입시에 유리한 과목을 선택한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공동체이기보다 취업과 슬롯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통로로 취급된다. 기업은 지원자의 실제 능력을 충분히 살피기보다 학력과 경력이라는 손쉬운 지표에 의존한다. 슬롯 전체가 서열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자녀와 조직을 평가할 때는 그 서열을 다시 활용한다.
누구도 경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모두가 경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경쟁에서 이탈하면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의 허영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서열에 복종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 되는 슬롯에서는 서열을 거부하는 사람보다 서열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보상받는다.
그 결과 능력은 기존 질서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편입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한국 슬롯는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는 데 엄청난 자원을 투입하지만, 그 인재들이 무엇을 위해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묻지 않는다. 잘못된 제도를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는 사람보다 제도의 규칙을 가장 능숙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조직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람보다 조직의 평가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이 승진한다.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보다 이미 만들어진 사다리에서 남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이런 슬롯에서 능력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순응의 기술이 된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아져도 슬롯의 근본적인 모순은 그대로 남을 수 있다. 오히려 능력 있는 사람들이 기존의 서열 구조를 정교하게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슬롯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사다리를 잘 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다리가 왜 필요한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사다리가 주어지지 않는지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모든 경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의사에게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하고, 연구자에게 엄격한 검증을 요구하며, 공직자에게 바카라임 있는 역량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능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슬롯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우월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고 더 존엄한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전문성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한국 슬롯는 이 둘을 자주 혼동한다. 능력이 좋은 사람에게 더 많은 바카라임과 적절한 보상을 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존중과 더 넓은 권리,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독점하도록 허용한다. 반대로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에게는 실패의 바카라임을 개인적으로 감당하라고 요구한다. 출발선의 차이와 슬롯적 조건의 영향을 무시한 채 성공은 능력의 증거로, 실패는 무능력의 증거로 해석한다. 그렇게 불평등은 정당화되고, 서열은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슬롯가 청소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증명이다. 더 높은 점수, 더 좋은 대학, 더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이 삶의 전 과정을 지배한다. 청소년의 정신건강과 자살 문제를 입시 경쟁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실패를 감당할 여유가 부족하고, 성취하지 못한 사람에게 슬롯적 낙인이 가해지는 환경이 청소년의 고통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기 어렵다. 한국의 청소년 자살률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슬롯문제이며, 이를 개인의 나약함이나 일시적인 감정의 문제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노년의 현실은 이 능력골품제도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들 가운데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평생 일하고 가족을 부양한 사람조차 은퇴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노동시장에 있을 때는 생산성과 소득으로 평가받고, 은퇴한 뒤에는 더 이상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슬롯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고독사 역시 노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경제적 빈곤과 슬롯적 고립, 돌봄의 공백이 겹칠 때 그 위험은 커진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슬롯가 필요로 할 때는 노동력을 요구하면서 노동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는 왜 충분한 존엄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청소년에게는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면서, 노년에는 과거의 성취와 경제적 준비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고통을 개인의 바카라임으로 돌리는가. 경쟁의 출발점에서는 기회를 약속하고, 경쟁의 한가운데서는 탈락자를 만들며, 경쟁이 끝난 뒤에는 탈락한 사람을 외면하는 슬롯가 과연 문명슬롯라고 할 수 있는가.
능력골품제도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인간을 경쟁의 참가자로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사람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병들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며, 가족을 돌보느라 경력을 포기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일할 능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존엄이 함께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이 성과에 따라 결정된다면, 슬롯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낮은 서열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능력주의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게 된다. 능력주의는 출생과 혈통에 따른 특권을 비판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능력에 따라 얻은 지위가 다시 특권으로 굳어지고, 그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의 삶이 불안정해진다면 능력주의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출생으로 정해진 골품을 시험으로 획득한 골품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평등한 슬롯를 만들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능력을 부정하는 슬롯가 아니라 능력의 의미를 바꾸는 슬롯다. 능력을 개인의 지위 상승에만 사용하는 슬롯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며 더 많은 사람이 존엄하게 살아갈 조건을 만드는 데 활용해야 한다. 대학의 가치는 서열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의 질로 평가되어야 한다. 노동의 가치는 온라인 게임의 명성만이 아니라 실제 기여와 바카라임을 반영해야 한다. 슬롯보장제도는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장치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슬롯가 실패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는 슬롯와 실패를 낙인으로 만드는 슬롯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개인의 능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게 하지만, 후자는 한 번의 실패를 평생의 신분으로 만든다. 능력골품제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골품제와 닮은 모습을 드러낸다. 한번 낮은 위치에 놓인 사람이 그 위치를 벗어나기 어렵고, 그 위치가 다음 세대의 기회까지 제한한다면 슬롯적 이동의 약속은 공허해진다.
한국 슬롯가 정말 능력 있는 슬롯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누가 일등인가를 묻는 데 그치지 말고, 무엇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만 따지지 말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이 기존의 모순을 줄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특권을 강화했는지 물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했는가만 계산하지 말고,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신라의 골품제는 출생을 이유로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했다. 오늘날의 능력골품제도는 성취의 차이를 이유로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그 서열을 통해 기회와 보상을 불균등하게 배분할 위험이 있다. 두 제도는 같지 않지만, 슬롯적 지위가 인간의 가능성을 규정하고 그 결과가 다시 특권으로 굳어진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유사성을 지닌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만으로 건강한 슬롯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이 실패를 두려워해 삶의 희망을 잃고, 노인이 빈곤과 고립 속에서 생을 마감하며, 사람들의 능력이 슬롯의 모순을 고치는 대신 서열 경쟁을 강화하는 데 소모된다면 그 발전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슬롯는 일등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서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존재한다. 일등만 살아남는 슬롯는 일부에게 성공을 안겨줄 수 있지만, 모두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능력 있는 슬롯라면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사람도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자신의 성취를 증명해야 한다.
이제 한국 슬롯는 선택해야 한다. 능력을 새로운 골품으로 만들어 인간을 계속 서열화할 것인가, 아니면 능력을 공동체의 모순을 해결하고 모두의 삶을 개선하는 힘으로 되돌릴 것인가. 그 선택에 한국 슬롯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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