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진과 장원영, 같은 듯 다른 인간 상품화

결국은 신자유주의적 인간 상품화의 현상일 뿐이다.

byFrancis Lee

박서진과 장원영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장구를 치며 장터와 행사장을 누볐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이돌 산업의 가장 세련된 무대 위에서 살아남았다. 한 사람에게는 ‘장구의 신’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완벽한 외모와 자기관리, 세련된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팬층도 다르다. 소비 방식도 다르다. 음악도 다르다.

그런데 이 둘을 가만히 놓고 보면 묘하게 닮은 지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인간적 특성 자체가 상품이 됐다.

박서진에게 상품이 된 것은 장구만이 아니다. 고생한 청년의 이야기, 가족을 생각하는 아들, 효심, 서민적인 이미지, 장터에서 출발해 성공한 인간적 서사가 모두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장구를 치는 모습은 그 브랜드의 상징이다. 팬들은 노래만 듣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인생을 소비한다. 고생했던 이야기에 감동하고, 가족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고, 그가 잘되기를 바란다. 팬에게 그는 가수이면서 동시에 아들이고 손주다.

장원영의 상품화 방식은 다르다. 외모, 몸, 표정, 말투, 자세, 패션, 자기관리, 심지어 일상에서 보여주는 태도까지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완벽하게 관리된 이미지는 소비자가 원하는 아이돌의 상품적 가치가 된다. 노래를 듣고 춤을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원영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까지 시장에 들어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진짜이고 누가 더 가짜냐가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야 살아남는 구조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인간 상품화의 핵심이다.

과거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예인은 노동력만 파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팔고, 몸을 팔고, 목소리를 팔고, 성격을 팔고, 가족 이야기를 팔고, 상처와 실패까지 판다. 인간의 모든 것이 상품의 원료가 된다.

박서진의 고생은 감동 콘텐츠가 된다.

장원영의 완벽함은 자기관리 콘텐츠가 된다.

한쪽에서는 ‘고생했지만 성공한 인간’이 소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 소비된다.

방식은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인간의 개성이 상품의 차별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연예산업의 무서운 점이다.

예전에는 가수가 노래를 잘하면 됐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됐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누구보다 특별해야 한다. 누구보다 눈에 띄어야 한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팬들이 감정적으로 투자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상품인가.’

장구를 칠 것인가.

완벽한 외모를 만들 것인가.

착한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

고생한 이야기를 팔 것인가.

효도를 팔 것인가.

자기관리 능력을 팔 것인가.

결국 나 자신을 시장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가가 생존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기기업가적 인간의 모습이다. 사람은 더 이상 단순히 노동자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기업처럼 관리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고, 이미지를 관리하고, 경쟁력을 만들고, 타인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

연예인은 그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연예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튜버도 그렇다.

인플루언서도 그렇다.

교수도 그렇다.

작가도 그렇다.

온라인 게임인도 그렇다.

심지어 평범한 사람까지 SNS에서 자신의 일상을 전시한다. 여행도 콘텐츠가 되고, 가족도 콘텐츠가 되고, 취미도 콘텐츠가 된다. 인간의 삶에서 시장과 무관한 영역이 점점 줄어든다.

박서진의 장구와 장원영의 완벽함은 그래서 전혀 다른 것 같지만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박서진은 **‘인간적인 서사’**를 상품으로 만들었다.

장원영은 **‘완벽하게 관리된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한쪽은 인간미를 팔고, 다른 한쪽은 완벽함을 판다.

그러나 둘 다 결국 자신이라는 인간을 시장에서 차별화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팬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박서진을 좋아하는 중년 여성들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장원영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주는 대상을 찾는다. 팬덤은 인간에게 공동체와 소속감, 정서적 만족을 제공한다.

문제는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을 끊임없이 상품으로 전환하는 시장의 구조다.

사람의 상처까지 팔아야 한다.

사람의 가족까지 팔아야 한다.

사람의 외모까지 팔아야 한다.

사람의 사생활까지 팔아야 한다.

사람의 인간관계까지 팔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에 따라 시장에서의 가치가 결정된다.

가장 끔찍한 것은 여기서 인간이 자신의 상품화를 스스로 수행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관리한다.

스스로 이미지를 만든다.

스스로 몸을 관리한다.

스스로 이야기를 만든다.

스스로 자신을 홍보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를 확인한다.

조회 수가 나의 가치가 되고, 팔로워 수가 나의 가치가 되고, 좋아요가 나의 가치가 된다.

인간의 존재가 숫자로 환산된다.

연예산업은 이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산업일 뿐이다.

박서진과 장원영은 그래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장구를 치는 박서진의 모습도 아름답다.

무대 위 장원영의 모습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름다움과 매력 뒤에서 한 가지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장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더 특별해져라.

더 매력적이어라.

더 경쟁력 있어라.

더 팔리는 인간이 되어라.

그 요구에 끝없이 응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얼마나 팔리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 된다.

박서진과 장원영의 차이는 크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은 장구와 서민적 서사를 팔고, 다른 사람은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판다.

그러나 결국 둘 다 시장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상품으로 전환해야 살아남는 시대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것은 연예인만의 비극이 아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조금씩 그렇게 살고 있다.

인간이 상품이 된 시대.

그것이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신자유주의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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