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재판의 광기를 보이는 국민의힘과 극우가 바로 빨갱이다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배우의 집 앞까지 찾아가는 슬롯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가.
영화 한 편인가.
아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비판과 공격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영화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일부 보수 정치권과 극우 세력은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영화의 역사적 해석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수 있다.
감독에게 해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관련 자료를 제시하며 영화의 내용을 반박할 수도 있다.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지 말라고 호소할 수도 있다.
심지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한 항의 집회를 여는 것까지도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범위라면 시민의 권리다.
그런데 배우의 집 앞까지 찾아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영화는 공적인 작품이다.
배우의 집은 사적인 공간이다.
영화에 대한 비판은 공개된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의 집 앞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구분이다.
그런데 지금 그 기본적인 선이 무너지고 있다.
10월 4일 일부 극우 성향 단체가 유해진의 주거지로 알려진 서울 성북구의 한 주택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유해진은 사과하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영화가 아니라 배우를 향한 구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도대체 유해진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가 영화를 만들었는가.
각본을 썼는가.
역사학자로서 사건의 진실을 판정했는가.
아니다.
그는 배우다.
영화에 출연해 주어진 역할을 연기했다.
그런데 영화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불만이 배우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것은 논쟁의 수준이 아니다.
바카라임의 전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방식의 압박이 실제로 창작의 공간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일부 행사가 취소됐다.
이민호의 프로그램도 취소됐다.
개봉 2주차 전국 무대인사도 전면 취소됐다.
제작진과 출연진의 안전 문제가 이유로 거론됐다.
국가가 상영을 금지한 것이 아니다.
법원이 영화의 상영을 막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슬롯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검열은 반드시 정부가 칼을 들고 나타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겁먹게 하면 된다.
행사를 취소하게 만들면 된다.
광고와 투자에 부담을 주면 된다.
배우가 공개석상에 나타나는 것조차 위험하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법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살아 있어도 실제 창작의 자유는 위축된다.
이것을 우리는 자기검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검열은 직접적인 검열보다 훨씬 교묘하다.
아무도 “하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스스로 하지 않게 된다.
이번 사건에서 영화인연대가 “작품에 대한 비판과 개인에 대한 압박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들은 영화의 역사적 해석 자체를 옹호하지 않았다.
영화가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작품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명확하게 인정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작품을 비판하는 것과 사람의 일상을 공격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 구분을 하지 못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군중의 인민재판으로 변한다.
여기에서 나는 국민의힘과 일부 극우 세력의 태도에서 매우 기묘한 역설을 본다.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는 전체주의적 정치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한다.
그 사람이 참여한 작품을 공격한다.
그 사람의 생업을 압박한다.
그 사람의 생활공간까지 찾아간다.
그리고 집단의 분노를 이용해 사과를 요구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과거 북한에서 많이 보던 인민재판 자체 아닌가?
나는 그래서 ‘빨갱이’라는 말을 그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물론 그들이 공산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실제로 북한을 지지한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혐오하는 ‘빨갱이 사냥’의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뜻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단순한 정치적 의견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을 슬롯적 적으로 만드는 낙인이었다.
한번 빨갱이로 지목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해명할 기회도 필요 없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실제로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는 순간 그 사람은 공동체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것이 인민재판의 위험이다.
법정에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민재판에서는 분노가 증거가 된다.
법정에서는 피고인의 반론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민재판에서는 반론 자체가 ‘뻔뻔함’으로 해석된다.
법정에서는 판결할 권한이 있는 사람만 판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민재판에서는 누구나 판사가 된다.
그리고 군중은 한번 흥분하면 사실관계보다 더 강력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필요로 한다.
감정이 아니라 절차가 판단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분노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정치에서는 이 단순한 원칙이 점점 흔들리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상대를 제거하려 한다.
논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낙인을 찍는다.
사실을 놓고 싸우지 않는다.
정체성을 놓고 싸운다.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 ‘어느 편인가’가 중요해진다.
이런 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배우다.
내일은 기자가 될 수 있다.
그다음에는 교수나 작가일 수도 있다.
정치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 평범한 시민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 기준은 계속 넓어진다.
처음에는 정말 위험한 사람만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비판적인 사람까지 적이 된다.
그다음에는 침묵하지 않는 사람까지 적이 된다.
마지막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안전한 슬롯가 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유해진이라는 배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영화에 대한 생각을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영화가 역사적으로 잘못됐다면 그것을 비판하면 된다.
역사학자들은 자료를 가지고 반박하면 된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판단하면 된다.
평론가는 혹독하게 평가하면 된다.
정치인은 정치적으로 비판하면 된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 된다.
사람의 집까지 찾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비판은 협박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협박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신호를 보낸다.
‘다음에는 당신 차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창작자에게 가장 무서운 메시지다.
영화인연대와 한국영화감독조합이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유해진 한 사람이 아니다.
오늘 한 사람을 겁먹게 만들면 내일 열 명의 창작자가 스스로 입을 닫을 수 있다.
그렇게 하나둘씩 사람들이 침묵하기 시작하면 영화는 존재하지만 영화의 자유는 사라진다.
바카라은 출판되지만 작가는 위험한 주제를 피한다.
신문은 발행되지만 기자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대학은 존재하지만 교수는 논쟁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다.
정치인은 존재하지만 시민은 정치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도 금지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자유롭게 말하지 않는 슬롯가 된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슬롯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건을 단순히 유해진을 둘러싼 연예계 논란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은 한국 슬롯가 앞으로 어떤 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비판하는 민주주의인가.
처벌하는 민주주의인가.
토론하는 민주주의인가.
낙인찍는 민주주의인가.
설득하는 민주주의인가.
겁주는 민주주의인가.
나는 국민의힘에도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먼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지켜야 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정말 대한민국의 자유를 말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싫어하는 영화의 자유부터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당신들이 정말 북한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사람을 집단의 적으로 규정하고 군중의 힘으로 압박하는 정치부터 경계해야 하지 않는가.
반공은 상대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기술이 아니다.
자유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자유까지 인정할 때 비로소 자유다.
이번 영화가 역사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싶다.
더 강하게 비판하라.
자료를 내놓아라.
영화의 허구를 밝혀라.
감독에게 질문하라.
역사학자들의 반론을 조직하라.
관객에게 설득하라.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나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라.
영화는 비판하되 사람을 공격하지 말라.
역사를 지키겠다고 나서면서 인간을 위협하는 순간, 지키려던 가치 자체를 훼손하게 된다.
그리고 반공을 외치면서 인민재판의 방식으로 사람을 몰아붙이는 순간, 스스로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정당성까지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누가 유해진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영화가 틀렸다면 영화에 돌을 던져라.
역사 해석이 틀렸다면 역사로 반박하라.
정치적 주장이 잘못됐다면 정치적으로 싸워라.
그러나 사람의 집 앞까지 찾아가 한 인간을 압박하지는 말라.
그 순간 당신들이 던지는 돌은 유해진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유해진이지만 내일은 당신일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이 가장 먼저 찾게 될 것이 바로 지금 당신들이 무너뜨리고 있는 것,
비판받을 자유가 아니라
비판받으면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자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