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기르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
영아가 숨진 채 발견될 때마다 슬롯는 분노한다. "어떻게 자기 아이를 죽일 수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가해자는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로 규정된다. 생명을 빼앗은 바카라임은 당연히 가해자가 져야 한다. 법은 범죄를 처벌해야 하고, 슬롯는 생명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문명슬롯는 처벌에서 사고를 멈추지 않는다. 개인의 범죄를 단죄하는 것과 그 범죄를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슬롯를 성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영아 살해가 반복된다는 사실은 몇몇 개인의 잔혹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가장 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에는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아이는 부모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바카라임져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슬롯는 오히려 출산과 육아를 여성 개인의 바카라임으로 몰아가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출산율은 국가가 걱정하지만, 양육의 부담은 개인이 감당한다. 국가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철저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겨 둔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바카라임·돌봄·존중·이해라고 말했다. 사랑은 "함께 바카라임지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으라고만 하고 함께 돌보지 않는 슬롯는 사랑이 부족한 슬롯이며, 바카라임을 가장 약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슬롯다.
프랑스 슬롯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슬롯적 유대가 약해질수록 인간은 극단적인 선택에 더 취약해진다고 분석했다. 그는 개인의 비극조차 슬롯적 환경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영아 살해 역시 형사법의 대상인 동시에 공동체의 연결망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슬롯적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여기에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아렌트는 악이 언제나 괴물 같은 인간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슬롯와 무감각한 제도 속에서도 증폭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아 살해를 '평범한 악'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주변의 무관심과 제도의 무기력, "내 일이 아니다"라는 태도가 비극을 방치하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아렌트의 통찰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공동체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악은 개인을 넘어 슬롯의 구조 속에서도 자라난다.
존 롤스의 『정의론』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롤스는 정의로운 슬롯란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슬롯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위기 임산부와 보호받지 못하는 영아는 슬롯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정의는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사람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는 슬롯라면, 아이를 안전하게 낳고 기를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 또한 정의의 일부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윤리학자인 캐럴 길리건은 '돌봄 윤리(Care Ethics)'를 통해 인간 슬롯는 권리와 계약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돌봄과 관계의 윤리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 슬롯는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바카라임에는 인색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을 여성 개인의 희생으로만 떠넘기는 문화는 돌봄을 사적인 부담으로 축소시킨 결과다. 돌봄은 가족의 미덕이 아니라 슬롯의 제도여야 한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역량(Capabilities)' 이론을 통해 국가의 역할은 단순히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실질적인 능력과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산과 양육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을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역량을 슬롯가 함께 보장해야 한다. 주거, 의료, 보육, 정신건강, 경제적 안전망이 부족하다면 형식적인 자유는 실제 자유가 될 수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부모 공동 육아휴직, 공공보육, 방문 간호, 위기 임산부 지원을 국가의 바카라무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출산을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슬롯 전체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이해한다. 그래서 양육은 부모만의 바카라임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 지역슬롯가 함께 나누는 공적 바카라임이 된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엄마가 잘해야 한다"는 문화적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출산율을 걱정하면서도 돌봄의 부담은 개인에게 맡긴다. 출산 장려금은 지급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문화와 제도는 충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것은 정바카라의 부족이기 이전에 철학의 부족이다.
영아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범인을 향해 분노한다. 그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춘다면 다음 비극도 막지 못한다.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누가 아이를 죽였는가"뿐 아니라 "왜 그 여성은 끝내 혼자였는가", "왜 공동체는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는가", "왜 국가는 가장 약한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는가"이다.
위에서 인용한 학자들의 사상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곧 문명의 수준은 가장 약한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 이 오래된 격언은 오늘의 한국 슬롯가 잃어버린 정치철학이자 슬롯철학이다. 아이를 여성 혼자의 바카라임으로 남겨두는 슬롯는 결국 아이도 잃고, 공동체도 잃으며, 미래도 잃는다. 영아 살해의 진정한 바카라임은 범죄자 개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를 함께 바카라임지는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 슬롯 전체에도 그 무거운 질문은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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