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를 포기한 슬롯가 되나?
인류 문명의 역사는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역사였다. 인간은 신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왕권에 맞서 시민혁명을 일으켰으며, 독재와 전체주의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자유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그 결과에 바카라임지는 능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역설적인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누구도 우리를 쇠사슬로 묶지 않았고, 누구도 강제로 명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점 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있다. 현대인이 복종하는 대상은 국가도, 종교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지배자는 바로 알고리즘이다.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알고리즘은 무엇을 볼지, 무엇을 읽을지, 무엇을 살지 결정한다. 소비자는 자신의 취향을 따르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알고리즘이 선별한 선택지 안에서만 움직인다. 오늘날 숏폼 영상 하나가 하루 만에 제품을 품절시키고, 사람들은 매장에서 영상 화면을 보여주며 같은 상품을 찾는다.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산다고 믿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그 욕망은 과연 자신의 것인가.
이 질문은 이미 2,400여 년 전 플라톤이 던졌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국가』에서 제시한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들은 평생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믿는다. 진실을 본 사람은 동굴 밖의 태양을 이야기하지만, 동굴 속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고 배척한다. 오늘날 우리의 스마트폰 화면은 새로운 동굴 벽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영상과 뉴스, 광고와 댓글을 현실 그 자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세계 전체가 아니라, 플랫폼이 선택한 일부에 불과하다. 현대인은 동굴 밖으로 나갈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니라, 동굴 밖으로 나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세기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는 힘으로 이해했다. 그는 현대 기술이 세계를 하나의 '자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강은 수력발전의 자원으로, 숲은 목재의 자원으로, 인간은 노동력이라는 자원으로 환원된다. 오늘날 플랫폼 경제에서는 이러한 환원이 한층 더 극단적인 형태를 띤다. 인간은 이제 데이터가 된다. 클릭 수, 체류 시간, 구매 기록, 위치 정보, 검색 이력은 모두 알고리즘의 연료가 된다. 우리는 플랫폼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플랫폼에 의해 분석되고 예측되는 대상이 된다. 인간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하나의 데이터 자원으로 조직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특별히 잔혹한 인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를 깊이 성찰하지 않은 채 체제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아렌트는 사고의 부재가 거대한 악을 가능하게 한다고 경고했다. 물론 오늘날 알고리즘을 따르는 소비자와 전체주의 체제의 관료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둘 다 스스로 판단하기보다 외부의 체계에 사고를 위임한다는 점이다. 추천 영상을 보고, 추천 상품을 사고, 추천 의견을 공유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생각하는 습관'은 점차 약화될 수 있다. 민주슬롯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자체를 포기하는 시민의 증가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흐름을 '데이터주의(Dataism)'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미래 슬롯에서 데이터의 흐름이 인간의 직관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게 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보다 알고리즘의 추천을 더 신뢰하게 되고,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까지 데이터가 결정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망은 하나의 예측일 뿐이지만, 이미 우리는 그 방향으로 일정 부분 이동하고 있다. 길을 찾을 때 내비게이션을 따르고, 음악은 추천 목록으로 듣고, 쇼핑은 알고리즘이 제안한 상품에서 시작한다. 편리함은 커졌지만, 스스로 탐색하고 결정하는 경험은 줄어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알고리즘이 단순히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반복 노출은 필요를 욕망으로 바꾸고, 욕망은 소비를 낳는다. 플랫폼 기업은 우리의 시간을 오래 붙잡을수록 더 많은 수익을 얻는다. 그래서 자극적이고 감정적인 콘텐츠가 우선적으로 노출되는 구조가 형성되기 쉽다. 결과적으로 소비는 깊은 숙고의 산물이 아니라 순간적인 자극의 결과가 된다. 시장은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하지만, 선택의 환경 자체가 특정 방향으로 설계된다면 그 자유는 점점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소비를 넘어 정치와 슬롯에도 영향을 미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정보만 반복적으로 제공하는 경향이 있어, 서로 다른 관점을 접할 기회를 줄일 수 있다. 그 결과 슬롯는 공통의 사실보다 각자의 정보 공간에 갇히기 쉽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면서도 공통의 현실을 공유할 때 유지된다. 그러나 모두가 각기 다른 '현실'을 소비한다면, 대화보다 확신이 앞서고 토론보다 적대가 커질 위험이 있다.
기술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알고리즘은 의료와 교육, 교통과 산업에서 인간의 삶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뛰어난 도구다. 문제는 도구가 인간을 대신하여 사고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해야지, 인간의 판단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편리함은 문명의 성과이지만, 비판적 사고는 문명의 토대다.
칸트는 계몽을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날 그 정의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제 계몽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추천한 정보조차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긴 글을 읽고, 다른 견해를 찾아보고, 자신의 판단을 끊임없이 수정하려는 태도가야말로 디지털 시대 시민의 핵심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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